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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가족이란 (1)
2021.02.19.


화창한 토요일. 민우는 고속버스에 올랐다.

그의 본가는 대전이었다. 계룡 쪽에 더 가까워 도심에서 조금 나가야 했다. 총 세 시간 반 걸려서야 고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전화를 한번 해볼까?’

민우는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강효진의 연락처를 들여다보았다. 통화 버튼에 손이 가다 멈췄다.

‘됐어. 이제 와서 사과해봐야 무슨 소용이야. 괜히 서로 더 불편해지겠지.’

민우는 미련을 버리고 핸드폰을 다시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덧 집 앞에 도착했다.

다 쓰러져가는 구식 빌라의 반 지하층. 민우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그래서 그는 부끄럽다기보다는 정겨운 감정이 늘 앞섰다.

민우는 재빨리 계단을 내려가 현관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아이고, 우리 아들! 어서 와. 먼 길 고생 많았다. 점심은 먹었니?”

“터미널에서 먹고 왔어. 된장찌개 시켰는데 맛 하나도 없더라고. 괜히 사 먹었어. 돈 아깝게.”

“엄마가 맛있게 끓여줄게. 우리 아들 된장찌개가 먹고 싶었구나? 하긴, 혼자 살면 이것저것 해 먹기가 좀 어렵긴 하지.”

민우는 마음이 아팠다.

몇 달 전에 봤을 때보다 어머니의 얼굴에 주름이 더 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빨리 교수든 뭐든 돼서 어머니를 편하게 모셔야 할 텐데.’

하지만 갈 길은 구만리였다. 교수는커녕 시간강사 자리라도 구할 수 있으면 다행인 상황이다.

‘인문학의 위기’라는 말이 있다.

특히 문학 관련 학과는 최근 통폐합 위기에 처해 있다. 이 추세라면 민우가 강단에 설 때면 자리가 많이 없어질 것이다.

‘아니, 벌써부터 걱정하지 말자. 실력만 있다면 분명 성공할 수 있을 거야. 못해도 입에 풀칠은 하겠지.’

민우는 애써 웃음을 지어 보였다.

곧 어머니가 과일을 내왔고, 민우는 그것을 맛있게 먹으며 오랜만에 어머니와 담소를 나눴다.

“그간 별일은 없었니?”

“그냥 집이랑 학교 왔다 갔다 하느라 정신없었어. 참, 엄마 나 강철훈 선생님이라고, 되게 유명한 교수님 밑에서 일하게 됐어.”

“어어? 그래? 무슨 일 하는데? 강의하는 거니?”

“아니, 아직 강의까진 못 하고…… 외국책 번역하는 일인데 돈도 받고 경력도 쌓을 수 있을 거 같아서 해보려고.”

강의하려면 최소 석사학위가 있어야 했다. 일부 대학에서는 박사학위 이상으로 가이드라인을 잡는 곳도 있다.

민우가 대학 강단에 서려면 적어도 2년, 넉넉잡아 3에서 4년 정도는 남은 셈이다.

“잘됐구나! 돈도 중요하지만 경력을 많이 쌓아야지. 좋은 선생님이신가 봐. 우리 아들 실력을 알아볼 정도면.”

민우는 마음이 좀 복잡해졌다. 그 안경이 없었다면 과연 강 교수는 자신을 발탁해 줬을까?

“운이 좋은 거였어. 엄마, 우리 학교엔 똑똑한 애들이 너무 많아. 나도 이번에 겨우 들어간 거야.”

“그래도. 너도 열심히 해서 명인대에 입학한 거잖니? 노력만큼 좋은 재능은 또 없는 법이야. 열심히 살면 보답을 받는단다.”

“알았어요.”

민우는 집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무엇을 해도 어머니는 자신을 응원해 준다.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런데 오늘 장사는?”

“오늘은 쉬어야지. 우리 아들 맛있는 거 해 줘야지.”

“에이 뭘 또 그랬어. 내일 바로 올라가 봐야 하는데.”

확실히 집이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11평짜리 투룸. 낡은 반지하 방에 이런 잔칫상이 열린 것도 굉장히 오랜만이었다.

“갈비찜이랑 백숙 좀 했다. 맛있게 잘 됐어.”

“백숙까지? 배 터지겠는데.”

“너희 누나가 노래를 부르더라고. 이따 오면 같이 먹자꾸나.”

“하여간 닭 킬러라니까.”

씩 웃은 민우는 가방에서 잘 포장된 상자 하나를 꺼냈다.

“엄마 생일 선물. 늦어서 미안해. 생일 축하해요.”

“아이구 뭘 이런 걸 다 샀어? 그 돈으로 맛있는 거나 챙겨 먹지.”

“별거 아냐. 속옷 좀 샀어.”

만 원 조금 넘는 속옷이었지만 민우의 어머니는 황금이라도 받은 사람처럼 기뻐했다.

‘내년에는 조금 더 좋은 걸 해드려야겠다.’

그렇게 다짐한 민우는 방으로 들어가 책을 꺼냈다. 강철훈 교수 연구팀에서 번역하기로 한 저서였는데, 900페이지에 달하는 두꺼운 책이었다.

원제는 < The Oxford Introduction to Narrative >.

서사학의 기초를 다룬 입문서라고 할 수 있는데, 실제 작품이나 이론이 삽입된 부분이 많아 번역하기에 꽤 난해한 면이 있는 책이었다.

‘예습이다. 미리 읽어 둬서 나쁘진 않겠지.’

민우는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 착용했다. 순간 눈이 트이며 원어가 술술 읽히기 시작했다.

이 안경의 좋은 점은 단순히 내용을 번역한다는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한 번이라도 읽은 단어와 문장은 머릿속에 각인되어 번역이 필요 없게 되었다.

요컨대 원서를 많이 읽으면 많이 읽을수록 외국어 실력을 쌓을 수 있는 그런 안경이었다.

‘기회가 닿는 대로 원서를 읽어야겠어. 학교에 원서 서고가 따로 있어서 다행이야.’

안경은 소모품이다. 떨어지면 부서지는 약한 물건이다.

특히 이 안경은 굉장히 오래된 물건이다.

언제 능력이 없어질지 모르니, 민우는 그 전에 최대한 원서를 읽어 실력을 쌓아 놓으려는 것이다.

목표는 5개 국어.

영어, 독일어, 일본어, 프랑스어, 중국어.

민우는 석사 과정을 마칠 때까지 이 다섯 개 언어를 마스터하기로 했다. 회화까지는 어렵더라도 원서를 읽을 수 있는 수준까지는 올려두려는 것이다.

‘훨씬 더 편하게 연구를 할 수 있게 될 거야. 남들이 하지 못한 것들도 할 수가 있어. 세계 문학의 흐름도 누구보다 빨리 캐치할 수 있고.’

문학은 문화의 일부분이다.

근대 이후 매체의 발달로 인해 문화가 다방면으로 수용되면서, 문학 또한 그에 영향을 받아 변용되거나 새로운 양상을 보이고 있다.

일례로 근대 한국 문학은 중국과 일본의 영향을, 그 이후로는 미국과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최근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는 라이트노벨 장르는 서브컬처 문화로 일본이 원류다. 판타지나 무협도 그 시작은 외국이다.

때문에 광범위한 연구를 위해서는 영어는 물론 중국어, 일본어, 프랑스어 등을 할 수 있어야 했다.

‘세계 문학의 특질을 하나의 저서에 담는다…… 흥미로운 테마야. 능력이 된다면 언젠가 시도해보고 싶어.’

민우는 연구 혼을 불태우며 책을 계속 읽어 나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밖에서 누군가가 들어오는 기척이 들렸다.

“일찍 왔네?”

민우는 침대에서 일어섰다. 박민아가 문고리를 잡고 안을 들여다본다. 여성 정장을 타이트하게 입은 모습이 직장인답다.

민우는 누나를 볼 때마다 마음이 좋지가 않다.

박민아는 민우와 달리 공부에 재능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안 형편과 민우의 뒷바라지 때문에 진학을 포기하고 취업 전선에 뛰어들었다.

물론 누나가 아니라 형이었다면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지도 몰랐다.

“아까 오후에 왔어.”

“웬일로? 역시 월세 끊기는 게 무섭긴 한가 보네. 어? 너 안경 써?”

“요즘 책을 많이 읽었더니 눈이 좀 안 좋아져서.”

박민아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민우는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해 많이 읽었다. 그럼에도 안경을 쓰지 않았었는데, 갑자기 눈이 나빠졌다니 이상했던 것.

“명인대가 빡세긴 한가보다.”

“당연하지. 국내 탑 대학인데.”

“내 말이. 그런 대학이 왜 널 받아줬는지 아직도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민아가 히죽 웃으며 비아냥거렸다.

말은 그렇게 해도 하나뿐인 동생이 자랑스러웠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월세는커녕 틈틈이 용돈도 보내주지 않았을 것이다.

허리에 손을 올린 민아가 진지하게 말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너 나중에 성공해서 입 싹 닦으면 안 된다? 엄마랑 내가 너 뒷바라지 한 거 잘 알고 있지?”

“걱정 마. 누나 시집은 내가 보내줄 테니까. 이자까지 다 쳐서.”

“어느 세월에? 요즘 결혼하려면 돈 엄청 깨져. 나 내일이면 서른이다. 알아?”

“내가 돈을 모으는 것보다 누나랑 같이 살 남자 찾는 게 산술적으로 더 어렵지 않을까. 으음, 누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같은 남자로서 참…….”

짝!

결국 등짝을 맞고 말았다.

“매를 벌어요! 콱 그냥.”

민아는 동생이 들고 있던 책에 주목했다. 온통 영어로 적혀있는 책. 문득 뭔가를 떠올린 그녀가 말했다.

“너 영어 좀 하니?”

“당연하지. 내가 누구야. 명인대 국문과 에이스잖아. 원서쯤은 껌이지.”

“까분다 또. 너 영어 못해서 국문과에 원서 쓴 거 동네 사람들이 다 아는데.”

민우가 움찔했다. 잠시 자신의 부끄러운 과거를 망각한 것이다. 화제를 돌릴 필요가 있었다.

“그런데 영어는 왜?”

“바이어가 보내준 계약서가 영어야. 참고삼아 한번 읽어보고 싶은데 도통 무슨 이야긴지 알아먹을 수 있어야지.”

민아는 경기도에 있는 작은 무역회사에 다닌다. 고졸인 그녀가 갈 수 있는 회사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10년 차임에도 불구하고 직급이 주임이었다.

만약 누나가 대학을 갔더라면 훨씬 더 좋은 직장에서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었을 텐데.

오히려 민우는 그럴수록 내색하지 않고 더 열심히 했다.

동정하는 것보다 열심히 해서 성공하는 것. 그 이상의 보답은 없을 테니까.

“누나 경영 지원 쪽 아니었어? 계약서 볼 일 없잖아.”

“그게.”

민아는 말을 하다 말고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모양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고 싶은 말이 아니라 쌓여 있는 말이라고 해야 할까.

“뭔데?”

“됐네요. 고민은 무슨. 못난이 대학원생 앞에서 할 푸념은 아니지.”

“연애 문제는 아닐 거고. 회사에 뭔 일 있는 거야?”

“없다.”

민아가 방문을 쿵 하고 닫고 나갔다. 평소 누나의 모습과는 좀 다른 모습이다.

‘없긴 뭘 없어. 분명 뭔가가 있구만.’

안경을 벗은 민우는 이따 누나와 나가서 술이나 한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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