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대학원생으로 산다는 것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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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 대학원생으로 산다는 것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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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8. 대학원생으로 산다는 것은 (2)
2021.02.18.
버스가 지나간 자리에 늘씬하고 예쁜 여자가 나타났다.
화사한 봄옷과 짧은 치마가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그 주인공, 강효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민우와 눈이 맞았다.
“좀 늦었지? 많이 기다렸어?”
“아니. 나도 지금 나왔어. 수업이 좀 늦게 끝났거든. 그나저나 진짜 정말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보다시피.”
“아주 잘 지냈나 보네. 얼굴이 폈다. 정말.”
민우는 취업했는지 물어보려다가 그만두었다. 괜히 실례가 될 수 있으니까.
“대전엔 자주 안 와? 연락 좀 하지. 아, 내 번호를 지워서 연락은 못 했겠네.”
“오해라니까. 번호 없어진 지 얼마 안 됐어.”
사실 핸드폰을 잃어버렸다는 건 거짓말이었다. 민우는 명인대에 진학하며 연락하지 않는 사람들의 연락처를 모두 정리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민우가 화제를 돌렸다.
“배고프지? 밥 먹으러 가자.”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며 학생 식당으로 이동했다. 정문으로 나가서 외식을 하기엔 너무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명인대 학생들은 어떤 밥을 먹는지 궁금했어.”
“하하하. 별거 없어. 사람 사는 덴데 다 똑같아. 오히려 밥은 상아대 학식이 더 맛있더라.”
“정말?”
“그렇다니까. 여긴 생협이 아니라 외주업체가 운영하거든. 다 그 나물에 그 밥이지. 비싸기만 하고 맛이 없어.”
두 사람은 A코스 식권을 사서 밥을 받았다. 김치찌개와 제육볶음, 그리고 콩나물무침과 여러 반찬이 있는 백반이었다.
“천천히 많이 먹어.”
민우는 고개를 돌리다 흠칫 놀랐다.
“응? 왜 그래?”
“아, 아니. 아무것도.”
건너편에 이수빈과 한진섭이 앉아 있었다. 두 사람이 이쪽을 보며 눈알을 부라리고 있다.
민우는 빨리 먹고 자리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입에 좀 맞아?”
“응. 생각보다 맛있는데?”
강효진이 귀엽게 입을 오물거리며 계속 말했다.
“그나저나 1년 만에 보는 건데도 별로 안 어색하다. 오래 알고 지낸 친구 같아. 그치?”
“어? 어. 어. 그러네. 하하하.”
“왜 그렇게 당황해?”
“그냥.”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 건지 코로 들어가는 건지 모르겠다. 민우는 이런 게 행복인 거라고 느끼며 식사를 빨리 끝냈다.
민우는 슬쩍 동기들이 있던 자리를 살폈다. 수빈이는 식사 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그들은 여전히 자리를 못 뜨고 있었다.
지금이 찬스다.
“다 먹었으면 자리 옮길까? 근처에 괜찮은 카페 하나 있는데.”
“그래. 그러자. 그런데 왜 그렇게 서둘러? 저녁에 약속 있니?”
“아니. 여긴 좀 시끄럽잖아. 빨리 조용한 데로 가고 싶어서.”
민우는 어떻게든 수빈과 진섭의 시야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놈들. 일부러 학식으로 따라온 게 분명해. 어떻게든 따돌려야 한다.’
식사를 마친 두 사람은 경영대 뒤편에 있는 카페 ‘미엘’로 자리를 옮겼다. 인문관 카페로 가는 척하며 뒷길로 빠진 것이다.
물론 명분은 있었다. 효진에게 캠퍼스를 보여준다는 그럴듯한 핑계. 때마침 봄꽃이 한창이라 걷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런 노력이 통했는지 수빈과 진섭은 더 이상 따라오지 못했다.
“뭐 마실래?”
“나 아이스 카페라떼.”
“오케이.”
민우가 카드를 점원에게 건네려 하자 효진이 팔을 잡았다.
“커피는 내가 살게.”
“괜찮으니까 저기 가서 자리 좀 잡아 줘. 서울까지 온 손님을 홀대할 수는 없지.”
“됐어. 저기, 이걸로 계산해 주세요.”
“야.”
결국, 커피값은 강효진의 카드로 계산되었다.
곧 민우가 커피를 들고 효진의 앞에 앉았다.
마침 창가 자리가 비어있었는데, 조명이 반쯤 드리워져 분위기가 좋았다.
민우는 먼저 궁금증을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근데 무슨 일로 보자고 한 거야? 나 보려고 서울까지 오지는 않았을 거고.”
“왜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하실까? 그럴 수도 있지.”
“아니, 뭐. 현실이 그렇잖아. 내가 번듯한 직장을 잡은 것도 아니고 대학원에서 공부나 하고 있는데.”
민우가 멋쩍게 웃었다. 얘는 농담도 참 설레게 한다고 생각하면서.
“서울에 회사 업무가 있어서 올라왔는데 마침 네 생각도 나고 해서 연락해 본 거야. 명인대에 입학했다고 들어서. 내가 너무 뜬금없이 연락했니?”
“아니. 그런데 회사? 무슨 일 하는데? 취업했다는 얘긴 못 들었는데.”
“얼마 전에 일 시작했어.”
효진은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민우에게 주었다. 누구나 알만한 보험회사 로고가 박혀 있는 명함이었다.
그걸 보자 민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역시 그런 거였나!’
민우는 속으로 탄식을 내뱉었지만, 이미 커피를 얻어먹은 뒤였다. 계산을 억지로 하려던 효진의 속셈이 뭔지 알 것 같았다.
“FSR이면…… 보험설계사?”
“응. 아는 오빠 추천으로 시작하게 됐는데 영 어렵네. 실적도 안 좋고.”
실적 얘기까지 나왔으니 이제 다음 이야기는 안 봐도 뻔했다.
‘보험 가입.’
민우는 통장 잔고와 월 지출액을 계산해보며 상품에 가입할 여력이 있는지 계산했다.
그렇다고 해서 답이 나올 리가 없다. 매달 적자를 간신히 면하는 수준이었으니까.
그 사이 효진이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그만둘 생각이야. 마땅히 할 것도 없어서 대학원이나 갈까 하고.”
마땅히 할 것도 없어서 대학원이나?
민우의 미간이 좁혀진 건 바로 그때였다.
* * *
‘아우, 이놈의 성질 좀 죽여야 하는데.’
민우는 도서관에 자리를 잡고 자아비판 중이었다. 전공 책을 펼쳤지만, 진도가 전혀 나가고 있지 않았다. 노트에도 낙서만 가득하다.
‘그냥 순수하게 도움이 필요했던 거잖아? 얘기 잘 들어주고 돌려보냈다면 좋았을 텐데.’
입에서 다시 한숨이 흘러나올 그때 볼에 뭔가가 와 닿았다. 얼음처럼 차가웠다.
“앗 차거!”
조용한 도서관 안에서 소리를 지른 민우.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홱 돌렸다.
하지만 곧 그의 놀란 표정이 풀어진다. 이수빈이 음료수를 들고 서 있었기 때문에.
“뭘 그렇게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어요? 오빠답지 않게.”
“그냥.”
“후훗. 그 여자한테 차였구나?”
“뭘 차여.”
“딱 봐도 차였구만.”
한숨을 내쉰 민우는 그녀와 함께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스무 평 남짓한 휴게실엔 쪽잠을 자거나 통화를 하는 몇 명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민우는 자리에 앉아 수빈이 건넨 캔 음료를 열었다.
“웬일이야? 도서관엔.”
“웬일은요. 학생이 도서관에 왜 오겠어요? 공부하러 오지.”
“우문현답이네.”
“근데 오빠 안경은 왜 쓰고 있어요? 요즘 눈 안 좋아졌나? 원래는 안경 안 썼잖아요.”
이 안경을 쓰면 외국어를 모국어처럼 읽을 수 있게 된단다. 신기하지?
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민우는 요즘 책을 너무 많이 읽어 눈이 좀 나빠졌다고 적당히 둘러댔다.
“잘 어울려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진짜로요.”
수빈이 생긋 웃었다. 민우는 왠지 그 표정이 부담스러워 시선을 슬쩍 돌렸다.
“그런데 오빠. 그 사람하고 무슨 관계에요?”
“알면서 뭘 물어? 내가 짝사랑하던 사람이었어.”
“응? 과거형이네요.”
“오늘 카페에서 화를 내버렸거든. 이제 깔끔하게 끝이 난 거지. 돌아갈 때 걔 표정 장난 아녔어. 두 번 다시 연락하나 봐라, 뭐 이런 표정이었지.”
수빈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랬냐, 표정이 그렇게 묻고 있었다.
“그게…… 일 그만두고 마땅히 할 것도 없으니 대학원이나 간다고 하니까 순간 화가 나더라고. 대학원은 도피처가 아니잖아. 학문하는 곳이지. 우리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지 사람들은 몰라. 뭔가 무시당한 느낌이 들었어.”
대한민국에도 석박사 백만 명 시대가 열렸다.
사회는 고학력을 요구하고, 대학은 좋다 하고 학위로 장사를 한다. 마땅히 갈 곳 없는 사람들이 빚을 내서라도 대학원에 입학한다.
취업이 힘들다 보니 젊은이들은 스펙을 쌓기 위해 대학원을 선택했다.
물론 그 와중에는 민우처럼 진짜 학문에 열의가 있는 학생들도 있긴 하지만 그 수는 압도적으로 적다.
특히 인문학 분야는 여러모로 어렵다.
남학생들은 병역 혜택도 받기 어려울뿐더러, 산학연구나 기타 연구비 산정에서도 이공계에 비해 많이 불리하다. 단기적인 성과를 내기 어려운 분야이기 때문이다.
그런 상황에서 민우는 인문대 대학원을 선택했다.
때문에 아무리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자신이 목숨을 걸고 걸어가는 길을 과소평가했다는 사실 자체에 화가 났던 것이다.
그래도 수빈은 이해했다. 학문에 대한 그의 열의를 누구보다도 잘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예민하게 받아들일 문제였을까요? 난 그분 생각도 옳다고 봐요. 사람마다 가치관은 다른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정론이다.
하긴, 생각해보면 그게 꼭 잘못된 생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사람마다 걸어온 인생이 다르고 목표가 다른 법이니까.
말 그대로 명인대라는 타이틀이 필요하다고 해서 그것이 잘못된 걸까?
아니다.
그것은 개인의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게다가 좋아하는 사람이었다면서요. 에휴, 좀 더 살갑게 굴지. 오빠는 가끔 보면 융통성이 없을 때가 있어요. 지금처럼.”
“그래서 내가 이렇게 반성하고 있는 거잖아. 괜히 훈장질한 것 같아서. 그 친구 입장에서는 나름 도움이 필요해서 날 찾아온 걸 텐데. 친절하게 설명은 못 해주고 매정하게 굴었으니.”
“나쁜 남자네.”
“그래도 내가 화를 내지 않았다면 보험 가입 권유받았을지도 몰라. 아니, 분명히 그랬겠지.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야. 그치?”
“그래요. 그렇게라도 정신승리 하세요.”
웃음을 터트린 수빈이 가방에서 책과 프린트를 꺼냈다. 민영환 교수 수업의 과제 도서인 <문학의 이론>이었다.
“이제 속 좀 시원해졌어요? 얘기 들어줬으니 답례로 나 과제 좀 도와줘요. 번역하다가 막힌 부분이 있는데.”
“막혔다고? 네가?”
지금까지 당당하던 수빈이 멋쩍게 웃었다.
“실은 저 영어가 좀 약하거든요.”
“뭐 어렵진 않은 부탁이지만…… 이 음료수는 뇌물이었던 거냐?”
“헤헤.”
안경을 끼고 나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하며 민우는 책을 받아들었다. 수빈은 민우의 옆에 밀착해 앉아 그의 설명을 들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30분이나 시간이 흘렀다. 두 사람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고마워요, 오빠. 덕분에 막혔던 부분이 시원하게 해결됐어요.”
“고맙긴. 서로 도우며 살아야지. 이제 집에 들어가냐?”
“그래야죠. 차 끊기기 전에.”
민우는 늘 그렇듯 손을 들어 작별 인사를 먼저 했다.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던 수빈은 뭔가 아쉬운 표정이다.
“오빠!”
그녀가 처음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깜짝 놀란 민우가 돌아섰다.
“왜?”
“저기.”
수빈은 쉽게 말을 잇지 못했다. 머뭇거리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이번 주말에 영화 보러 갈래요?”
“뜬금없이 웬 영화야?”
“오빠 마블 영화 좋아하잖아요. 이번에 신작 개봉했어요. 신세 진 것도 있고 하니까 제가 예매할게요.”
수빈이가 산다는 말에 혹한 게 사실이었다. 요즘은 영화 값도 만만치 않으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일정이 있었다. 이번 주에 본가에 내려가지 않으면 정말 월세가 끊길지도 모른다. 누나는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다.
“미안한데 다음에 보자. 대전에 내려가 봐야 해. 어머니 생신이었거든.”
“아 그래요? 그럼 어쩔 수 없지.”
수빈은 아쉬웠지만 이내 미소를 보였다. 앞으로 기회는 얼마든지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