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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 대학원생으로 산다는 것은 (1) (7/500)


007. 대학원생으로 산다는 것은 (1)
2021.02.15.


무엇보다도 공부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 이제 모르는 개념이 나오면 만년필 하나로 쉽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신기한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번 써 본 단어는 머릿속에 각인되어 절대 잊어버리지 않는다는 것. 외우려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머릿속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민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만년필을 내려놓은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렇다고 마음을 놔서는 안 돼. 이건 어디까지나 물건이야. 내가 아니라고. 내 실력이 중요하다.’

민우는 이 도구들을 백 퍼센트 신뢰하지 않았다.

망가지면 끝이니까.

대신 이 도구를 철저히 자신의 지식을 쌓는 데 이용하기로 결정했다.

안경으로는 외국어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고, 펜으로는 여러 학문적 개념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날개를 단 꼴이었다.

‘인생 역전 프로젝트. 오늘부터 시작이다!’

민우는 즉시 만년필로 문학용어 사전을 필사하며 방대한 데이터를 머리에 집어넣었다.

팔은 아팠지만 즐거웠다. 단어를 하나하나 적을 때마다 실력이 향상되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전화?’

민우는 조심스럽게 만년필을 내려놓고 휴대폰을 찾았다. 이불 속에 빠져 있어서 찾는 데 꽤 애를 먹었다.

‘누구지? 누나인가? 화장실 드립을 쳤으니 오늘은 전화 안 할 텐데.’

액정을 보니 모르는 번호였다. 010으로 시작하는 걸로 봐선 스팸이 아닐 것 같은데, 도대체 누가 전화를 건 걸까.

일단 민우는 전화를 받기로 했다.

“여보세요?”

― 민우니?

목소리는 젊었다. 아니, 어리다고 해야 할까. 그리고 여자였다. 일단 누나는 아니다.

“네. 그런데 누구시죠?”

― 오랜만이야.

민우의 경계심이 조금 풀렸다. 그러고 보니 어디선가 많이 듣던 목소리였다.

― 나야. 효진이. 목소리 벌써 잊었어? 전화번호 지웠나 보네.

“아.”

민우는 깜짝 놀랐다.

이제야 목소리 주인공의 얼굴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녀는 분명 자신의 대학 동창 강효진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얼마 전에 핸드폰이 고장 나서 바꿨는데 그때 번호가 없어졌나 봐.”

― 하하하. 뭐야. 그 뻔한 변명은. 문학하는 사람이 그렇게 변명거리가 없어서 쓰겠어?

“아니 진짜라니까. 술 마시고 집에 오다가 떨어트렸거든. 그나저나 정말 오랜만이네. 1년 만인가? 졸업하고는 처음이지?”

― 응. 그렇지.

잠시 침묵이 돌았다. 민우는 뭐라도 말을 하고 싶었지만 평소처럼 입이 수다스럽게 움직이지 않았다. 너무 갑작스러웠던 탓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야?”

― 다른 건 아니고, 너 시간 괜찮으면 좀 만날 수 있나 해서.

“만나자고?”

민우는 또다시 깜짝 놀랐다.

그럴 만도 했다. 강효진. 그녀는 민우가 짝사랑하던 사람이었으니까.

그런 그녀가 1년 만에 연락을 해왔다.

그것도 톡이 아니라 전화로. 뭔가 중요한 일이 있는 게 아닐까?

“급한 일 아니면 주말에 볼까? 이번 주말에 대전에 내려갈 예정이라서.”

― 아니. 내일 내가 명인대로 갈게. 마침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내일 올라갈 거야. 시간 괜찮지?”

두근.

심장이 박동하며 가슴이 뛰었다. 민우는 재빨리 스케줄표를 떠올렸다.

“어…… 어 괜찮을 거 같아. 내일 오전에 수업 하나 있는데 그것만 끝나면 프리야.”

사실 프리는 아니었다. 오후에 청강해야 하는 강의도 있었고, 도서관에서 밀린 과제와 공부를 해야 했다.

하지만 짝사랑의 힘은 무서운 법.

“그럼 내일 열두 시에 보자.”

“응. 그래. 그럼 잘 자구.”

전화가 끊긴 이후로도 민우는 한참이나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짝사랑이 먼저 연락을 하더니 보자고 한다.

공부에 찌들어 있던 민우에게는 마치 꿈같은 이야기였다.

그날 밤, 결국 민우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 * *

4월 중순. 명인대학교 캠퍼스는 한창 봄기운으로 가득했다. 벚꽃이 한창 위엄을 발휘하는 중이다.

하지만 명인대학교 교정을 거니는 학생들의 발길엔 여유가 없다.

중간고사 기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명문대라 할지라도 청춘의 낭만을 즐기려는 무리들은 있기 마련.

통기타를 든 이름 모를 학생 하나가 연주를 시작한다. 길거리를 거닐던 학생들이 삼삼오오 모여 노래를 감상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민우는 그런 사치를 누리지 못했다. 대학원 세미나실에서는 한창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자, 이쯤 해서 하나 마무리 짓기로 하고. 다음 발제는 누구 차례지? 수빈 양인가?”

“예, 이수빈 선생입니다.”

“그래. 잠시 10분 정도 쉬었다가 계속 이어서 하지.”

“선생님, 커피 좀 더 드시겠습니까?”

“좋지.”

김태순 교수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학생들이 한숨을 돌렸다. 총무 역을 맡은 이경환이 재빨리 김 교수의 잔에 커피를 채웠다.

명인대학교 대학원 국문학 전공은 중간고사 기간에 시험을 보거나 하지 않는다. 기말고사 시즌에 페이퍼 하나를 제출하면 한 학기 끝이다.

하지만 그 소논문 하나가 나오는 과정은 마치 출산과도 같다. 충분한 시간 동안 여러 고충을 겪어야만 한 편의 논문이 완성되는 것이다.

또한, 대학원 수업은 학부 수업과는 조금 다르게 진행된다.

학부 수업이 교수 중심의 주도적인 수업이라고 한다면, 대학원에서는 원생 중심의 토론식 수업이 이루어진다.

흔히 수업을 세미나라고 말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오빠. 뭐 좋은 일 있어요?”

옆자리에 앉아 있던 수빈이 민우에게 물었다.

“이 좋은 날에 수업이나 듣고 있는데 무슨 좋은 일이 있다고.”

“이상한데. 뭔가 오늘은 표정도 밝고 덜 피곤해 보여서요. 어제 일찍 들어가서 그런가? 도서관에 안 갔잖아요.”

“내가 도서관 안 간 거는 어떻게 알아?”

이수빈은 아차 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그녀도 매일 도서관에 들른다. 자리에 앉기 전에 민우가 즐겨 앉는 자리를 확인하는 게 버릇처럼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니, 그냥 느낌이 그랬지요.”

“촉이 좋네. 어젠 좀 일찍 들어갔어. 준비해야 할 게 있어서. 참, 나 강철훈 선생님 프로젝트에 들어가기로 했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우와 진짜요? 얘기 잘된 거예요?”

강철훈 교수의 이름이 나오자 동기생들의 시선이 이쪽을 향했다. 뭔가 이긴 기분에 민우는 목에 힘을 주었다.

“다 네 덕분이다. 네가 프로젝트 이야기를 해 주지 않았더라면 좋은 기회를 놓칠 뻔했어. 다음에 밥 한 끼 살게.”

“알죠? 비싼 걸루.”

“알았다, 알았어.”

김 교수가 언급한 10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학생들이 하나둘 세미나실에 정좌했다. 곧 이수빈이 발표문을 읽기 시작했다.

“‘감수성의 혁명’은 1960년대 신세대 작가를 대표했던 김승옥을 지칭하는 하나의 표어였습니다. 그의 문학은…….”

아나운서처럼 발음이 정확하고 목소리가 청아하다. 이수빈은 좋은 교수가 될 자질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물론 동기생들은 귀를 열고 집중했다. 공격할 것이 없나 살펴보는 것이다. 논지의 오류를 찾아 논박한다. 이것이 교수의 눈에 들어가는 첫걸음이다.

하지만 민우는 좀 달랐다. 이수빈의 발제문을 보며 내심 감탄하고 있었던 것.

‘벌써 초안이 완성됐나 보네. 서론의 수준이 높다. 역시 자대생은…… 아니, 자대생이어서가 아니라 수빈이의 진짜 실력이겠지.’

수빈은 원래 똑똑한 학생이었다. 명인대 국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대학원 입시 성적도 최상위권이다.

학부 때 과제로 쓴 논문이 KCI급 학술지에 실렸다는 것은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일화다.

‘도대체 이런 애가 왜 나랑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지 모르겠단 말이지.’

민우는 턱을 괴고 이수빈을 빤히 쳐다보았다.

처음에는 그냥 천성이 착한 거라고 생각을 했는데, 간혹 잘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 보통 저런 캐릭터들은 고집 세고 이기적이기 마련인데.

혹시 뭔가 다른 목적이 있어서 접근하는 건 아닐까?

그러다 보니 문득 강효진 생각이 났다.

‘그나저나 효진인 왜 만나자고 하는 걸까?’

학부 때 친하게 지낸 사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연락을 할 만한 무언가가 있지도 않았는데.

“민우 군.”

“……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아차 싶었다. 어느덧 이수빈은 발제를 모두 마친 상태였고, 모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약 30분가량을 멍 때린 것이다.

김태순 교수가 안경을 고쳐 썼다.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다. 마치 호랑이처럼 잡아먹을 듯한.

“수업 시간에 무슨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 수빈 양의 발표 내용 중에 여성의 일탈에 대한 부분이 있었다. 자네의 생각을 듣고 싶은데.”

“아, 그게…….”

결국,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한 민우는 김태순 교수에게 박살이 났다.

“자네는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할 입장일 텐데 그렇게 집중을 못 해서 쓰겠나? 허허. 민 선생도 안 됐지. 이런 학생을 제자로 들였으니 고생문이 훤히 열렸군.”

“죄송합니다. 선생님. 다음부터는 집중하겠습니다.”

“여기는 자네가 다니던 대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좀 명심해 줬으면 좋겠군. 수업은 여기까지 하지.”

모두가 나가고 세미나실에 세 사람만 남았다. 민우, 수빈, 진섭이었다.

“오빠 괜찮아요?”

“그러게. 네가 웬일이냐. 수업 시간에 집중을 안 하고.”

“아무 일도 없어. 뭐 좀 생각하느라고.”

거짓말이었다. 어젯밤에 걸려온 전화 한 통 때문에 마음이 들뜬 탓이다. 덕분에 김 교수에게 혼쭐이 난 것도 흐릿해졌다.

‘슬슬 나가자.’

수업을 마친 민우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1시 45분. 이제 15분 뒤면 강효진과 만나게 된다. 마음이 설렜다.

“아무 일도 없다면야 다행이고. 그나저나 오늘은 점심 뭐 먹을까? 학식? 아니면 외식?”

“오늘은 패스. 약속이 있다.”

“약속이요?”

수빈이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갸웃했다. 늘 같이 먹어왔는데 약속이라니. 좀 이상했다.

고개를 끄덕이는 민우의 입가에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걸 진섭이 캐치해냈다.

“설마 여자? 와 박민우 너 배신 때린 거야? 대 솔로 동맹에서 탈퇴하려고? 안 되겠다. 수빈아. 빨리 경찰 불러.”

“오버하지 마. 대학 동창이야. 좀 만나자고 해서 약속 잡은 거고.”

“원랜 처음엔 다 친구고 동창인 거지. 근데 대학 동창이면 대전에 사는 애 아니야? 서울까지 찾아온 건가.”

“어.”

“예뻐?”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우의 표정엔 진심이 묻어나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을 수빈은 못마땅하게 쳐다봤다.

결국, 그녀가 몸을 돌렸다.

“진섭 오빠. 가요. 우리끼리 먹지 뭐. 배신자는 버려도 돼.”

“그래. 맞아. 가자.”

“맛있게들 먹고 와라.”

민우는 들뜬 마음으로 중앙도서관 앞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렸다. 머리를 다듬고, 재킷에 뭐가 묻은 게 없나 다시 살펴보았다.

잠시 후 버스가 멈춰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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