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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6. 기연을 얻다 (5) (6/500)


006. 기연을 얻다 (5)
2021.02.12.


오래된 책 냄새가 확 풍겼다. 좌우 벽엔 책으로 가득했는데, 대부분이 외서였다. 과연 비교문학 전공자다운 장서였다.

민우는 그 위압감에 꽉 눌렸다. 지도교수인 민영환 교수의 연구실에서는 볼 수 없는 그런 압박감이었다.

이것이 진짜 학자의 연구실이다.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자네는?”

“아, 죄송합니다.”

강철훈 교수는 굵직한 뿔테안경을 쓴, 백발의 교수였다. 강직한 인품이 주름에 묻어 있었다.

정신을 차린 민우가 90도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국문과 박민우라고 합니다. 석사 1학기생입니다.”

“그래, 민우 군. 내 연구실에는 무슨 볼일이지?”

“이번에 옥스퍼드 대학 교재 번역 프로젝트가 있다고 들어서요. 제가 참여할 수 있는지 여쭤보려고 찾아왔습니다.”

“자네가?”

강철훈 교수는 안경을 한 번 고쳐 쓰더니 소파를 가리켰다. 앉으라는 의미였다.

“그런데 자네는 처음 보는 얼굴인 것 같아. 국문과라면 학부 때 내 수업을 한 번쯤은 들었을 텐데. 나는 한 번 본 얼굴은 잊어버리지 않거든.”

“아, 선생님. 저는 다른 학교 출신입니다.”

“어디지?”

“상아댑니다.”

민우는 강 교수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교수들과는 달리 표정의 변화는 없었다. 오히려 흥미를 느끼는 쪽이었다.

“상아대라…… 서지훈 선생 밑에서 배웠겠군.”

“예, 제 학부 때 지도교수십니다. 강의 시간에 종종 강 선생님 말씀을 하셨어요.”

“내 얘기를? 욕을 하지 않았다면 다행이겠군그래. 서 선생은 잘 지내던가?”

“아주 건강하시죠. 매 학기 학술답사에 참여하실 정도로 열정적이십니다.”

강철훈 교수가 미소를 보였다. 서지훈 교수는 강철훈 교수와 인연이 있었다. 어쩌면 일이 잘 풀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 교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묵직한 눈빛으로 민우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번 프로젝트는 번역이라는 한마디로 재단할 수 없네. 간단한 일이 아니라는 말이야. 몇몇 학생들을 시험해 봤는데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어.”

“자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시험을 보겠습니다.”

“지금 당장?”

강 교수의 얼굴에 흥미가 동했다.

서른 살도 안 된 젊은 친구가 다짜고짜 찾아오더니 프로젝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거기에다 시험까지 보겠다고 한다.

강 교수는 민우의 패기가 마음에 들었다. 요즘 젊은이답지 않은 씩씩함이 있었다.

“준비를 하지 않아도 상관없나?”

“부족하더라도 이 자리에서 바로 실력을 보여드리는 게 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민우는 가방에서 안경을 꺼냈다. 예의 그 안경이다.

그 사이 강 교수는 준비물을 챙겨주었다.

영문으로 된 용어해설집, 그리고 번역해야 하는 원고의 원본. 옥스퍼드 대학 엠블럼이 전면에 선명하다.

‘긴장할 필요 없어. 이 안경이 도와줄 거니까.’

안경을 쓰자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이 부분만 한번 번역을 해 보게. 필요하다면 해설집을 봐도 좋아. 시간은 넉넉히 줄 테니 여유롭게 해 봐.”

약 열 줄가량 되는 영문 원고였다.

기본적으로 단어의 길이가 길다. 그만큼 학술용어가 많이 사용되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특수한 능력이 깃든 안경 앞에서는 그 어떤 외국어 원고도 죽을 쓰지 못했다.

펜을 움직이기 시작한 민우는 순식간에 한 문장의 번역을 끝냈다.

“……!”

그것을 보던 강 교수의 눈이 빛났다.

민우가 여러 번 메모하지 않고 단 한 번에 완벽한 문장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그의 번역 작업은 계속되었다. 다음 문장에서 낯익은 용어가 하나 나왔다.

transcendental.

이 단어는 굳이 안경을 쓰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단어였다.

‘선험적. 칸트 철학의 기본이지. 알고는 있지만 이쯤에서 용어해설집도 한번 봐 주자. 꼼꼼하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있으니까.’

용어해설집은 말 그대로 기본적인 해설만 되어 있었다. 어원이나 기타 배경 지식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았다.

민우는 문장을 번역한 다음, 용어의 뒤에 각주를 달았다. 그리고 용어의 원어인 ‘transzendental’과 그 배경 지식을 짤막하게 서술했다.

“공부를 많이 한 모양이군.”

“솔직히 말씀드리면 많이 했습니다. 상아대 출신으로 명인대에 들어오기가 쉬운 일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공부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끝이 없습니다. 하면 할수록 제 무지를 깨닫게 된다고 할까요.”

강 교수는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동의한다는 의미였다. 기분이 좋아진 민우는 좀 더 속도를 내서 번역을 계속했다.

‘다 됐다!’

열 줄 원고의 번역은 채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완성물을 강 교수에게 넘긴 민우는 어깨를 펴고 당당히 앉았다.

꼼꼼히 원고를 체크해 보던 강 교수가 안경을 벗고 미소를 보였다.

“언제부터 내 연구실에 나올 수 있겠나?”

해냈다!

민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가능합니다. 주말에는 본가에 좀 내려가 봐야 해서요. 괜찮을까요?”

“좋아. 그럼 그렇게 알고 있지. 저녁에 연구실에 들르게. 식사하면서 다른 학생들을 소개해 주지.”

“감사합니다, 선생님.”

연구실을 나서는 민우의 기분은 날아갈 것 같았다. 뭔가 한 단계 성장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 * *

“아, 진짜 이번 주말엔 꼭 내려간대도 그러네. 속고만 살았어?”

― 오냐. 속고만 살았다! 박민우 전과가 얼마나 화려한지 아는 사람은 다 알지. 너 진짜 이번 주말에 안 내려오면 월세 끊어버릴 거야. 알았어? 엄마가 겉으로는 괜찮다 하면서도 속으로는 얼마나 서운해했겠어.

“누나.”

― 왜 인마. 짱구 굴리지 마. 머리 굴러가는 소리 여기까지 다 들린다.

“나 화장실이야. 이제 나가야겠어. 말라붙기 시작했다.

― 어휴, 더런 새끼.

물을 내리고 밖으로 나온 민우는 방에 드러누웠다.

다음 주에 두 파트 번역을 맡는 바람에 주말에 시간이 없는데 누나는 자꾸 내려오라고 성화다.

‘그래도 내려가야겠지. 어머니 생신이었는데. 선물도 빨리 전해드리고 싶고.’

한숨이 절로 나왔다.

‘몸이 세 개, 아니 그것까지도 안 바란다. 두 개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강 교수 프로젝트에 참가하게 된 것은 분명 기쁜 일이었다.

그러나 그 이상으로 일정에 부담이 생겼다. 저녁에는 보통 보충 공부를 하는데, 이제 번역 프로젝트에 시간을 할애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번역 자체만으로도 공부가 되겠지만 민우의 마음은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다.

‘박민우. 급할수록 돌아가야지.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하자. 서지훈 선생님이 평소에도 말씀하셨잖아. 공부는 평생을 두고 하는 거라고.’

그러다 뭔가가 생각났는지 민우는 몸을 일으켜 예의 그 상자를 찾았다.

그 안엔 루카치의 유고만 들어 있었다. 만년필과 볼펜은 민우가 가방에 넣어서 다녔다.

‘이걸 내가 이어 써야 한단 말이지?’

확실히 수빈의 말이 맞다.

꿈속에서 들렸던, 그리고 메모지가 루카치 본인이 남긴 것이라고 가정한다면 그는 자신을 신뢰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특별한 유품을 남긴 것도 원고를 완성해 달라는 의지의 발현일 것.

자신은 그와 아무런 연고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선택했다. 단지 후학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것을 이어받지 않는다는 것은 후학으로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래.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한번 해 보자. 지식과 연륜이 쌓이다 보면 길이 보일 거야.’

민우는 안경을 끼고 원고를 살펴보았다. 읽히긴 했지만 역시나 어려운 느낌.

‘문학이라는 개념을 철학적 프레임으로 접근한 원고인 것 같네.’

아직 서두만 작성되어 있어 전반적인 논조만 알 수 있을 뿐, 논문의 목표는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도 민우는 루카치의 사상과 학풍에 대해 깊게는 알지 못했다. 날 잡아서 파고 싶다는 생각만 했지, 늘 과제와 수업에 쫓겨서 시간을 내지 못했다.

‘아니, 굳이 그의 사상에 맞춰 유고를 이어 쓸 필요는 없겠지. 지금은 21세기야. 뭔가 새로운 접근으로 논문을 이어갈 필요가 있어. 그게 그 사람도 원하는 바일 거야.’

그렇게 결론을 내린 민우는 유고를 넣고 상자를 소중히 보관했다.

‘참, 만년필 시험해 본다고 잉크 샀었지?’

민우는 가방을 열어 필통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그리고 잉크 뚜껑을 열었다.

‘그런데 이 만년필. 이건 아무런 기능이 없는 걸까? 안경에는 정말 엄청난 기능이 있는데.’

민우는 잉크에 펜촉을 적셨다.

야릇한 기대감.

그러나 빈 메모지에 필기를 해 보아도 뭔가 달라지는 부분은 없었다. 말 그대로 그냥 만년필이었다.

종이 위에서 서걱거리는 느낌은 좋았다. 왠지 중세시대의 학자가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이건 보통 만년필인가 보네. 그래도 고풍스럽고 좋다. 이것도 써보듯 해 볼까?’

민우는 무의식적으로 유고에 적혀 있던 단어 하나를 만년필로 베꼈다.

Surrealismus.

“어?”

그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민우가 마침표를 찍음과 동시에 푸른 글자들이 종이 위로 떠 오른 것이다.

[초현실주의]

20세기 초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 세계로 확산된 예술사조.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의 세계 혹은 꿈의 세계의 표현을 지향한다.

“뭐야 이거…… 해설이잖아?”

민우는 환영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단어 아래에 정확히. 마치 사전을 보는 것처럼 상세하게 설명이 되어 있었다.

안경 때문인가 싶어 벗어보았는데, 벗어도 효과는 동일했다. 마치 마법 글자처럼 메모지 위에 떠 있었다.

눈을 비벼도 없어지지 않았다.

다시 안경을 낀 민우는 재빨리 다른 용어를 적어 보았다.

이번에도 똑같았다.

정확한 해석과 예시가 푸른 글씨로 환영처럼 떠올랐다.

‘만년필에 이런 기능이 있었던 거구나…… 믿을 수가 없어. 어떻게 이런 일이?’

두 번째라 그런지 놀라움보다는 즐거움이 앞섰다.

매번 용어사전을 뒤져가면서 개념을 이해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민우는 만년필로 계속 다른 용어를 메모지에 작성해 보았고, 안경 너머로 그것의 해석을 확인했다.

실로 완벽한 기능이었다.

‘세상에. 나 지금 꿈꾸고 있는 거 아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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