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5. 기연을 얻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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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5. 기연을 얻다 (4)
2021.02.11.
“섭.”
“어, 왔냐? 숙취는?”
“늘 그렇지 뭐.”
민우는 가방을 던지며 대학원 제3연구실에 앉았다. 석사과정생들만 사용할 수 있는 곳이었는데, 마침 진섭만 있었다.
진섭이 물었다.
“나 어제 너한테 뭔 얘기했냐? 중간에 필름이 끊겨서 어떻게 집에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학교 때려친다고.”
“엉?”
“자퇴서 언제 쓰러 갈래? 대학원 교학과에 가면 되는데. 이 형이 같이 따라가 주마.”
“뭔 개소리야. 내가 여기 어떻게 들어왔는데!”
진섭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래, 술을 마셔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겠지. 민우는 실실 쪼갰지만 그의 속을 충분히 이해했다.
“섭.”
“왜.”
“만약에. 만약에 말이다.”
그렇게 운을 뗀 민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 말아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궁금하게 중간에서 자르고 지랄이야. 뭔데 그래?”
“아니, 그냥.”
“뭐야. 서, 설마! 수빈이가 너한테 고백이라도 했냐?”
“미친 새끼. 아주 소설을 써라 써.”
민우는 소리 내어 웃었다. 한참 동안 고민하던 그는 결국 진섭에게 물어보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말이다. 어떤 유명한 학자가 있어. 그런데 그 사람이 너에게 미완성 원고를 주면서 완성해달라고 부탁한다면 넌 어떻게 할 거 같아?”
“얼마나 유명한 학자인지에 따라 다를 거 같은데.”
“이를테면…… 루카치 정도?”
“거절한다. 20년이 지나도 내가 그 정도의 학식을 갖출 수 있으려나 모르겠다. 자신이 없어.”
“눈물 나게 솔직한 놈이네.”
그때 문이 열리고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이수빈이었다.
“오빠들 언제 왔어요? 아까는 없던데. 어휴, 술 냄새. 어제 몇 차까지 간 거예요?”
“4차.”
“우와…… 몇 병이나 마셨어요?”
“몰라. 그런 거 안 센다.”
수빈은 민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늘 버릇처럼 민우의 옆자리에 앉곤 했다.
“야, 그거 수빈이한테도 한번 물어봐라. 어떨지.”
“뭔데요?”
이수빈이 눈을 큼지막하게 뜨며 두리번거렸다. 민우는 곤란한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좀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아니 별 이야기는 아니고. 만약에 어떤 유명한 학자가 너에게 미완성 원고를 주면서 끝까지 완성해달라고 부탁한다면 넌 어떻게 할 거 같아?”
“유고인가요?”
역시 수빈은 똑똑하다. 진섭이가 하지 못한 질문을 해내다니.
민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고라고 가정해 보자.”
“그럼 당연히 해야죠. 그 사람이 못 이뤘던 걸 부탁하는 거라면 나를 그만큼 신뢰해준다는 이야기잖아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완성해서 세상에 내놓고 싶어요.”
“공저로?”
“당연한 거 아녜요? 내가 도둑도 아니고.”
진섭이 발끈했다.
“왜 도둑도 아니라고 하면서 날 보는 거냐?”
“아니, 그냥.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냥, 정말 우연의 일치죠.”
“하하하하!”
민우는 소리 높여 웃었다.
이 상황이 재미있어서가 아니었다. 자신이 고민하던 것을, 수빈이가 단 한 방에 해결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 맞아. 그 사람은 나를 믿고 유고를 남긴 거야. 어떻게 해서든 내가 완성해야지. 지금은 어렵겠지만 열심히 공부해 나가면 분명 그 사람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을 거야.’
민우는 기대감과 벅참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뭔가 막연하던 길 위에 이정표가 하나 세워진 느낌이었다.
“그런데 오빠들, 번역 과제는 잘했어요?”
“난 어제 꽐라돼서 영어를 번역한 건지 불어를 번역한 건지 모를 정도의 상황이야.”
민우는 마음속으로 진섭의 명복을 빌었다. 수빈의 시선이 민우를 향했다.
“큰일이네. 민우 오빠는?”
민우는 씨익 웃으며 가슴을 두어 번 쳤다.
“자신감 백 퍼센트. 자세한 건 이따 수업시간에 공개하도록 하지.”
“발로 했구나.”
“아니 왜 이야기가 그렇게 흘러가는 건데?”
“괜히 또 혼나지 않을까 걱정이라서 그래요. 민 선생님은 괜히 오빠만 트집 잡잖아요.”
수빈은 진심으로 민우가 걱정됐다. 민우도 그런 수빈의 마음을 잘 알았다.
하지만 수빈은 민우의 저력을 믿었다.
그가 매일 밤 도서관에서 보충 공부를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매일 새벽까지 공부하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민우가 수빈의 어깨를 다독였다.
“걱정 붙들어 매. 내가 멋지게 한 방 날려줄 테니까.”
잠시 후 민영환 교수의 수업이 열렸다.
‘한국근대문학연구’라는 수업이었는데 석사 1학기생들이 듣는 수업이었다.
민우와 진섭, 수빈도 수강 대상이었기에 수업에 참가했다.
총 수강 인원은 10명. 모두가 진지한 눈빛으로 세미나에 임했다.
열띤 토론이 오가는 사이, 과제를 체크하던 민영환 교수가 손을 들어 멈추게 했다. 그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잠깐, 이거 누가 맡은 파트였지? The Function of Literature. 이 파트.”
민영환 교수가 진지하게 물었다.
석사생들이 모두 얼음이 됐다. 잘못 걸렸구나, 다들 그런 생각을 한 것이다.
“제가 했습니다.”
“네가?”
민영환 교수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손을 든 것은 다름이 아니라 민우였기 때문이다.
민우의 표정엔 자신감이 넘쳤다.
“네가?”
다시 한번 물으며 민 교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앞의 이 학생은 3류대 출신 낙제생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훌륭하게 번역을 해낼 수 있단 말인가? 심지어 역서에도 없는 각주를 세 개나 만들어 넣었다.
“왜 그러시죠? 번역에 문제가 있었습니까?”
“아니 그게…… 박민우 너 입시 영어시험 몇 점이었어?”
“701점입니다.”
“그 점수로 용케도 입학했군.”
명인대학교에서 자체적으로 시행하는 영어시험을 말하는 것이었다. 참고로 인문대 입학 커트라인은 700점이다.
“그런데 고작 그 실력으로 이렇게 번역을 했다고? 군더더기가 없는데? 업체에 맡긴 거 아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민우의 번역은 완벽했다.
<문학의 이론>은 한국어로도 이미 번역이 되어 있는 저서였다.
그런데 한국어판과는 다른 기조로 번역을 한 것은 물론, 용어에 대한 풀이가 거의 완벽했던 것이다.
“하하, 선생님. 저 업체를 쓸 정도로 살림이 넉넉하진 않습니다.”
월세도 누나가 내주고 있다는 말을 하려고 했지만 참았다.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업체들 이렇게 디테일하게 못하는 거 잘 아시잖아요. 영어 공부는 틈틈이 해 왔고요. 영어 점수가 실력의 척도가 될 순 없지 않습니까. 즐거웠습니다.”
“뭐가 즐거워?”
“번역 과제가요. 앞으로도 많이 주셨으면 합니다.”
동기들이 놀람과 감탄의 눈빛을 민우에게 보냈다. 이런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수빈의 눈빛이 제일 초롱초롱했다.
수업시간에 늘 혼나거나 비판을 당하기 일쑤였는데, 오늘 번역 과제로 보기 좋게 만회한 것.
“크흠.”
도무지 오점이 보이지 않았다. 민 교수는 헛기침하며 번역물을 내려놓았다.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좋아. 그럼 다음 시간엔 한 챕터가 아니라 두 챕터를 맡기지. 기대해도 되겠지?”
“감사합니다, 선생님.”
민우는 자신 있게 대답하며 활짝 웃었다.
수업이 끝나자 민우는 두 동기의 손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두 사람도 민우의 번역물을 확인했다. 정말이지 대단했다.
진섭이 추궁했다.
“솔직히 말해. 안 꼰지를 테니까. 어디 업체야? 아니면 친구 찬스 썼냐?”
“진짜 내가 한 거라니까. 왜들 이래.”
“한국어판보다 더 자연스럽던데요? 오빠. 학부 때 영어 특기자였어요? 아니면 외국에서 고등학교라도 다닌 건지.”
수빈이 한술 더 떴다. 민우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특기자도 아니고 한국에서 학교 다녔어. 뭔 바람들을 이렇게 넣는 거야? 번역 하나 한 거 가지고.”
“민 선생님 당황하시는 거 저 처음 봐요. 학부 때도 못 봤던 건데. 그 정도면 대단한 거잖아요.”
“앞으로도 많이 보게 될 거야. 기대하라고. 오빠의 황금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이수빈은 외압에도 굴하지 않는 민우의 자신만만한 모습이 좋았다. 이윽고 미소가 떠올랐다. 그녀의 웃음은 정말 귀엽고 예뻤다.
“그런데 오빠. 번역에 자신 있으면 강철훈 선생님 프로젝트에 지원해 보는 건 어때요?”
“강철훈 선생님?”
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철훈 교수.
명인대학교 비교문학 전공 주임교수. 국내 비교문학계의 권위자이다. 국문과가 아니라도 워낙 유명한 이름이라 민우도 알고 있었다.
“어떤 프로젝트인데?”
“저도 얼핏 듣기만 한 건데요. 옥스퍼드 대학 전공 교재를 한국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한대요. 원서가 조금 까다로워서 추가로 인력을 모집하는 거 같더라구요.”
“벌써 인원 다 차지 않았을까? 영어 잘하는 사람이야 명인대에 널렸잖아. 못하는 사람 찾는 게 더 어려울 정도로.”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많아도 오빠처럼 학술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또 없잖아요. 문학 이론도 잘 알고 있어야 하고 은근 조건이 까다롭다구요.”
“나 문학 이론 잘 모르는데. 알잖아. 낙제생인 거.”
“에이, 오빠도 참! 매번 도서관에서 밤새 공부하는 사람이 그런 약한 소리 하기예요?”
민우는 마음이 뿌듯해졌다.
비록 안경의 힘을 빌린 것이긴 해도, 자신이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는 순간이었으니까.
“그럼 말 나온 김에 강철훈 선생님 뵈러 가야겠네. 인문관 5층이었던가?”
“4층요. 비교문학 전공은 국문과랑 같은 층을 쓰니까.”
“오케이.”
민우는 손을 슥 들어 작별 인사를 하며 인문관 안으로 들어갔다.
때마침 강철훈 교수는 안에 있는 것 같았다. ‘재실’에 마그네틱이 붙어 있었다.
똑똑.
“실례합니다. 선생님. 계십니까.”
“들어오시게.”
민우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