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기연을 얻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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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4. 기연을 얻다 (3)
2021.02.08.
심부름을 끝내고 돌아오니 진섭은 완전히 취해 있었다. 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반쯤 감고 있다.
“자냐?”
“아니. 너 기다렸지. 이 새끼. 금방 오라니까 더럽게 늦게 오네.”
“담배 셔틀 좀 하느라.”
예상하던 일이라 진섭이 피식 웃었다. 그는 소주병을 들더니 민우의 빈 잔을 채워주었다.
“야. 민우야.”
“왜.”
둘은 잔을 부딪쳤다. 진섭은 만취한 상태에서도 잔을 깨끗이 비웠다.
“크아아. 시원하다.”
“왜 말을 하다가 말어?”
“아니, 그게. 나 그냥 그만두려고.”
“뭘? 연애?”
“아니 이 새끼야. 나 모태솔로인거 몰라? 같은 모태솔로끼리 서운하게 왜 이래. 대학원 말야. 그만두려고.”
술잔을 내려놓던 민우의 손이 멈칫했다. 생각지도 못한 진섭의 고백에 주변을 한번 두리번거린 민우는 그를 부축해 밖으로 나갔다.
“야, 너희들 어디 가냐! 도망치는 거냐?”
“진섭이가 속이 안 좋대요!”
“벌써? 쯧. 잘 봐주고 와.”
민우는 진섭과 술집 근처에 있는 벤치에 앉았다. 진섭은 한참이나 땅을 보며 말없이 있기만 했다.
“힘들어서 그만두려고? 새끼, 남자인 줄 알았는데 소심남이었네.”
“엿 같잖아. 우리가 왜 서자야? 엉? 당당하게 입학원서 쓰고 시험 치고 면접 보고 들어왔는데 왜 차별을 당해야 하냐고? 엉?”
입이 썼다. 그건 민우도 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하지만 민우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건 당연한 거야. 저 사람들 입장에서는 우리랑 같은 선상에서 출발하는 게 못마땅하게 보일 수 있겠지. 실제로 보면 나쁜 사람 별로 없다. 수빈이도 봐. 우리랑 친하게 잘 지내잖아?”
“사람 좋아서는. 니가 그러니까 호구처럼 당하는 거야.”
“당하는 게 아니라 기다리는 거지. 두고 봐. 조만간 우리 과의 에이스가 될 거니까. 학계의 거물이 돼서 보란 듯이 비웃어줄 거라고!”
“푸하하핫!”
진섭은 무릎을 탁탁 치며 자지러졌다. 하지만, 민우의 눈에 진심이 담겨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민우가 진섭의 어깨를 다독였다.
“좀만 참자. 분명 좋은 날 온다. 우리가 포기하려는 자리, 누군가에게는 진정으로 원하는 자리일 수도 있어. 소중하게 지키자고. 엉?”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의 한탄을 안주 삼아 밤새도록 술을 마셨다.
민우가 집에 들어오니 새벽 네 시였다. 결국 4차까지 달렸다. 곧 밖이 환해질 것 같았다.
‘젠장. 오늘은 공부하기 틀렸네. 바로 자야겠는데?’
민우는 가방을 아무렇게나 던져놓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리고 그날 밤, 민우는 꿈속에서 어떤 남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인 건가. 내 물건을 찾아주다니 고맙네. 소중히 사용해 주길 바라네. 자네라면 내 유고를 맡길 수 있겠어. 이어서 써줄 텐가?
유고?
민우는 눈을 번쩍 떴다.
마치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말한 것 같은 생생함이 느껴졌던 것이다.
시계를 보니 오전 6시 32분. 아직 준비하지 않아도 되는 여유로운 시간.
이제 지각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것 같았다.
‘그런데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환청이 다 들리고. 그런데 환청치고는 너무나 선명했어. 꿈이었나?’
머리가 지끈거렸다.
간만에 소주 다섯 병을 돌파했다. 한진섭이 아니었다면 기록을 세울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다행이지. 진섭이가 마음을 다잡은 거 같아서.’
사실 그를 설득한 것은 자신 때문이기도 했다.
한진섭이 없다면, 말 그대로 대학에 혼자 남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진섭이 자신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민우는 앞으로 진섭에게 더욱 신경을 써야겠다고 다짐하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르긴 하지만 슬슬 준비를 해볼까?’
민우는 간단히 씻고 해장 겸 라면을 끓였다. 김치와 대파, 그리고 남은 두부를 모조리 썰어 넣으니 제법 근사한 해장 라면이 완성되었다.
‘여기에 오징어만 있다면 최고일 텐데.’
후루루릅!
정신없이 라면을 먹던 민우의 손이 뚝 멈췄다. 우연히 눈에 들어온 가방을 보면서 뭔가 잊었던 것이 생각난 것이다.
‘맞다! 어제 보존 서고에서 주운 그 상자. 도서관에 맡긴다는 걸 깜빡했네.’
민우는 라면을 먹다 말고 가방을 열었다. 넣었던 그대로 나무 상자가 잠자고 있었다.
‘대체 이걸 누가 거기에 흘린 걸까? 사서 선생님들 물건 같아 보이진 않았는데. 희한한 일이야.’
민우는 무심결에 다시 상자를 열어보았다.
딸깍.
어제와 마찬가지로 만년필과 안경, 그리고 원고로 보이는 종이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민우는 원고지를 주목했다.
‘무슨 원고지?’
그는 문학 전공자였다. 글로 된 거라면 뭐든 관심 있게 읽는 사람이기도 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원고를 열었다. 한글로 적혀 있지 않아 쉽게 읽을 수 없었지만 눈에 익은 언어였다.
‘독일어구나. 글자를 날림으로 써서 읽기는 좀 어려울 거 같고. 어? 이건…….’
민우의 눈이 멈춘 곳은 원고의 첫 페이지였다.
보통 저자의 이름이 들어가는 공간에 익숙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 György Lukács.
영어는 아니었지만 문학 전공자인 민우는 저 글자를 분명 본 적이 있었다. 읽을 줄도 알았다.
“루카치.”
죄르지 루카치.
헝가리의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그를 모르는 사람은 문학도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유명한 사람.
민우를 학문의 세계로 이끈 주인공이기도 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재빨리 원고를 넘겨보는 민우. 독일어로 된 그것은 컴퓨터가 아닌 손으로 써진 원고였다.
그래서 민우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루카치의 육필(肉筆) 원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뭐야 이거…… 설마 진짜야?”
믿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루카치의 독일어 원고가 명인대학교 보존 서고 지하에 잠들 수 있었던 것일까?
하지만 중요한 건 그런 공간적인 제약이 아니었다.
꿈속에서 어렴풋이 들었던 그 한마디. 그것이 불현듯 떠올라 이 상황을 재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유고.
민우의 손이 바빠졌다. 곧 그는 원고의 말미에 있는 단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 die Hinterlassenschaft.
모르는 단어다.
민우는 책상에 있던 독일어 사전을 꺼냈다. 제2외국어 시험을 치르고 난 뒤 처음 열어보는 사전이었다.
버리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과 함께, 민우는 전율을 느꼈다. 저 단어가 뜻하는 것은 바로 ‘유고’였다.
툭.
그때 쪽지 하나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원고 말미에 접혀 있던 쪽지였다. 민우는 그것을 집어 펼쳐 보았다.
두 줄로 된 독일어 문장이 있었다.
‘당신에게 보내는 쪽지? 운명, 물건이라는 단어가 있고…… 찾다. 사용하다. 소중하게?’
민우는 명인대학교 대학원 입학시험에서 독일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했었다. 쪽지에 적힌 뜻을 대강 이해할 수 있었다.
보다 확실히 번역하기 위해 민우는 다시 사전을 뒤졌다. 몇 분 후, 민우는 완벽한 한글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그가 소리 내어 문장을 읽었다.
“이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인 것인가. 내 물건을 찾아주어서 고맙다. 소중히 사용해 주길 바란다…… 헉.”
민우는 깜짝 놀랐다. 분명 어디선가 들은 말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그가 해답을 찾았다.
“맞아, 꿈속!”
꿈속에서 들었던 남성의 말과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정확히 일치했던 것이다.
민우는 어안이 벙벙했다.
‘이 물건을 소중하게 사용해 달라고? 나에게 보내는 쪽지였던 거야?’
민우는 상자 속에 담긴 것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얼핏 봐도 50년 이상은 되어 보이는 낡은 물건들. 만년필은 써본 적도 없었고, 특히 안경은 도수가 맞을지도 가늠할 수 없었다.
민우는 만년필과 안경을 상자에서 꺼냈다. 둘 다 나무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줄 거면 다른 걸 주지. 지금은 21세기야. 누가 만년필을 써?’
민우는 만년필을 손에 쥐고 뚜껑을 열었다.
깨끗하고 날렵한 펜촉이 햇빛에 드러났다. 잉크를 빨아들이는 것엔 문제가 없어 보였다.
이번에는 상자에 담긴 안경을 써 보았다. 민우는 시력이 조금 낮긴 했지만 안경을 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뭐야 이거.”
놀랍게도 도수가 맞았다.
아니, 한 번 더 교정한 것처럼 선명하게 잘 보였다. 마치 자신을 위해 만들어진 안경 같았다.
민우는 무심결에 안경을 쓴 채로 원고를 바라보았다.
“세상에!”
독일어로 된 원고가 술술 읽히기 시작했다. 수준이 높아 내용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분명 읽히긴 읽혔다.
너무 깜짝 놀란 민우는 안경을 벗었다. 신기하게도 안경을 벗으니 원고를 다시 읽을 수 없게 됐다.
‘마법인가?’
그럴 리는 없었다. 그런 이야기는 책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침착하자. 박민우. 침착해. 이건 현실이야. 결코, 꿈이나 환상이 아니라고. 술에 취한 것도 아니다. 정신은 멀쩡해.’
심호흡하며 민우는 책상에 앉았다. 그리고 안경을 다시 썼다.
‘한번 실험을 해보자. 정말 외국어를 번역해서 볼 수 있는 안경인지.’
그렇게 결심한 민우는 책상 위에 놓인 <문학의 이론>을 꺼냈다. 내일까지 한 챕터 번역을 끝마쳐야 하는 책이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민우는 접힌 곳의 책장을 펼쳤다.
“읽힌다!”
분명 어제까지 영어로 되어 읽기 힘들었던 부분이 마치 한글로 쓰인 듯 매끄럽게 읽혔다.
놀라움을 뒤로 하고, 민우는 재빨리 노트북을 켰다.
이게 꿈이든 뭐든 상관없었다. 기회가 왔을 때 빨리 과제를 끝내 놓으려는 것이다.
타타타닥.
아침 해가 떠오르는 새벽녘, 민우의 자취방에선 타자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