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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3. 기연을 얻다 (2)
2021.02.05.


‘바빠 죽겠는데 왜 또 전화야?’

액정에 뜬 이름은 박민아. 민우의 친누나다.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민우는 체념하듯 녹색 버튼을 슬라이드했다.

“왜?”

― 넌 왜 자꾸 애가 싸가지가 없게 받자마자 왜라고 하냐?

“지금 나 바빠. 끊는다.”

― 야! 이 시키가 명문대 물 먹었다고 겁나 냉정해졌네. 누나 말이 말 같지도 않니? 월세 끊기고 싶어?

민우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끊고 싶지만 친누나니 한번 참았다.

아니, 사실 마지막 말 때문이었다.

남는 시간에 알바가 아니라 공부를 하다 보니 용돈이 부족했다. 쓰는 걸 줄이는 것도 한계가 있다. 특히 월세가 그렇다.

당분간은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해야 한다. 과외 같은 건 꿈도 못 꾼다.

“왜? 무슨 일인데? 빨리 얘기해. 나 지금 도서관 들어가 봐야 해.”

― 너 오늘 엄마 생일인 거 알아 몰라?

바쁘게 걷던 민우가 흠칫했다.

그제야 자취방 달력에 동그라미를 쳐 놓았던 게 떠올랐던 것이다.

평소라면 아무런 문제 없이 간다고 대답하면 된다.

하지만 오늘은 못 간다.

만약, 지각하지 않았더라면 욕을 듣고서라도 빠져나올 수 있겠지만, 이미 오늘치 욕은 다 먹은 상황.

“어, 그게 있잖아. 나 오늘 프로포절 뒤풀이 가야 해서 못 갈 거 같은데…….”

― 니가 그리고도 엄마 아들이냐?

“미안. 대신 엄마한테 잘 좀 말해주라. 응?”

― 너 그러는 거 아냐. 명문대 들어갔다고 사람이 변하면 안 돼. 알아?

누나가 알면 뭘 안다고!

민우는 목까지 차오른 말을 억지로 삼켜놓고는 대강 마무리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래도 누나만큼 자신을 생각해주는 사람은 또 없으니까. 답답했던 마음은 그새 미안함으로 바뀌었다.

생각난 김에 민우는 메신저를 열어 어머니에게 톡을 하나 보냈다.

‘엄마 미안 오늘 나 못가. 다음에 꼭 갈게. 생일 축하해요.’

민우는 전송 버튼을 누르고 도서관으로 바쁘게 달려갔다.

도서관은 한달음에 갈 수 있는 거리였지만, 어머니가 있는 대전은 너무 먼 거리였다.

민우의 집안은 그가 어릴 때부터 가난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시장에서 장사를 했고, 누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직장에 다녔다.

그런 상황에서 막내 민우는 대학에 가고 대학원까지 진학했다.

말 그대로 귀하게 자란 아들이었다.

어머니와 누나의 전폭적인 지원, 아니 전폭적인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필 왜 오늘 지각을 해가지고. 에휴.’

민우는 오늘 대전에 내려가지 못하는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선물도 사 둔 게 있었는데, 그게 자꾸 눈에 밟혔다.

누나의 실망감도 클 것이다. 꼬박꼬박 월세를 내주고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민우는 마음을 굳게 먹었다.

어떻게든 출세해서 어머니와 누나에게 빚을 갚겠다고 생각했다. 교수가 되든 뭐가 되든 성공해서 보란 듯이 잘살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뒤풀이 시간이 한 시간도 채 남지 않았는데도 민우는 보존 서고를 헤매고 있었으니까.

“대체 어디에 있는 거야? 사서 선생님이 분명 A―48번 구역이라고 했는데.”

명인대는 국내 최고의 학부답게 규모와 전통이 있다.

보존 서고도 마찬가지였다. 각계 유명 인사들이 기증한 책은 물론, 자체적으로 수급한 고서들이 즐비했다.

때문에 만약 정리되어 있지 않은 책이 있다면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것도 못 찾으면 또 낙제생 소리 들을 텐데. 진짜 이러다가 학위논문에 도장 못 받는 거 아냐?’

평소에 진섭과 나누던 뼈있는 농담이었다. 논문에 도장을 받지 못하면 졸업을 할 수 없다.

그래서일까. 책을 뒤지는 민우의 손이 다급해졌다.

없다.

민우는 다음 캐비닛으로 이동했다.

“어?”

그런데 그곳에 책이 아닌 뭔가가 있었다.

작은 상자였는데, 크기는 한두 뼘 정도 되어 보였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기에 민우는 그것을 살짝 열어보았다. 오래되었는지 힘이 좀 필요했다.

딸깍.

‘만년필? 그리고 안경. 이건…… 원고지구나.’

굉장히 오래되어 보이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누가 잃어버린 건가? 올라가서 분실물 센터에 맡겨야지.’

민우는 상자를 가방 속에 넣었다.

때마침 상자가 있던 자리에 <개벽> 창간호가 보였고, 민우는 마음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보존 서고를 나설 수 있었다.

민우의 가방이 연한 푸른빛을 발한 것은, 바로 그때였다.

* * *

뒤늦게 술자리에 찾아간 민우는 난처해졌다. 여기에서도 지각을 한 것이다.

“낙제생. 또 지각이야?”

하지만 이번엔 오전과 다르다. 할 말이 있었다.

“민영환 교수님 심부름 때문에 좀 늦었습니다. 보존 서고에서 <개벽> 창간호 찾아 왔어요.”

“그래? 우리 학교 보존서고는 무슨 종합운동장이야. 쓸데없이 넓어. 게다가 사서들은 일도 안 하고 왜 학생들이 직접 찾게 내버려 두는지 원.”

“그러게 말이에요. 저도 한 시간이나 헤맸습니다.”

다행히 화살이 대학 당국에게 돌아가 민우는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재빨리 진섭의 옆자리를 차지해 술잔을 받았다.

그런데 수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빈이는?”

“한 교수님 강의 보조 갔어. 오늘은 저녁에 수업 있다고 하더라고.”

“계 탔네. 부럽다.”

민우는 혀를 차며 잔을 들었다. 진섭이 실실 웃으며 술을 따랐다.

“오늘 고생했다. 욕먹느라.”

“이런 말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대학원에 공부하러 온 건지 욕먹으러 온 건지 이제는 구분이 안 될 정도야.”

“뭐 어쩌겠어. 서자들인데.”

진섭이 작은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둘은 구석 자리라 아무도 그들의 대화에 주목하지 않았다.

사실 옆자리에 석사 동기생들이 자리했지만, 대부분 여자인 것도 있고 은연중에 민우와 진섭을 멀리했다. 자기들과는 급이 다르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게 현실이었다.

민우와 진섭을 제외하고는 모든 석사 신입생들이 명인대 학부 출신이었다.

물론 이수빈처럼 착한 자대생도 있긴 했지만, 그들도 속으로는 두 사람을 멀리하고 있었다.

민우와 진섭은 주거니 받거니 술잔을 기울였다.

쨍.

“캬, 오늘따라 소리 좋은데?”

“좋기는 개뿔. 근데 너 무슨 일 있었냐? 표정이 왜 그래? 오늘 신나게 털린 건 난데 왜 니가 초상집이냐.”

진섭은 뭔가 고민이 있는 표정이었다. 아까부터 술만 기울이고, 민우가 하는 말에만 가볍게 대꾸하고 있었으니까.

진섭이 고개를 홰홰 저으며 술잔을 살짝 들었다.

“아무것도 아니다. 오늘 좀 달려볼까?”

“아니. 피곤해. 일찍 가고 싶다. 하연이한테 시달린 후유증이 아직 사라지지 않고 있어. 미운 네 살이란 거 오늘 처음 알았다.”

“그게 뜻대로 돼야 말이지. 민식 선배 기본 4차인 거 너도 알잖아. 탈출할 자신 있어?”

1차인데도 둘은 벌써 각각 소주 두 병을 비우고 있었다. 다른 테이블은 난리도 아니다. 끼리끼리 모여 앉아 정신없이 이야기하기에 바쁘다.

그때 저쪽 테이블에서 민우의 이름이 거론되었다.

“진짜라니까? 민우 걔 리얼리즘하고 모더니즘 구분도 제대로 못 하더라고. 얼빵한 게 얼마나 귀여웠는데.”

“에이 설마요, 그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우리 대학에 들어와요?”

“자기 말로는 긴장해서 그랬다던데?”

민우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 자체가 익숙한 일이 되어 버렸다. 그들이 무슨 얘기를 하든 나는 내 갈 길을 가겠다. 그게 민우의 생각이었다.

모른 척 휴대폰을 집었다.

“나사 풀리기 전에 전화 좀 한 통 하고 올게.”

“길게 하지 마. 혼자 외롭다.”

“징그러운 새끼.”

민우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들 자기들만의 세계에 빠져 있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민우는 단축번호 1번을 길게 눌렀다. 곧 액정에 ‘엄마’라는 이름이 떴다.

곧 착신음이 들렸다.

― 응 그래. 우리 아들.

“엄마. 오늘 못 가서 미안. 나 오늘 학교에서 행사가 있었어. 도저히 시간을 못 내겠더라.”

― 괜찮아. 엄마는 네 누나랑 맛있는 저녁 먹었다. 저녁은 챙겨 먹었니? 공부는 할 만해? 녀석, 전화 좀 자주 하지 그랬어.

민우는 이를 악물었다.

갑자기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미안해요.’

민우의 어머니는 생활이 안정된 지금까지도 좌판 장사를 그만두지 않고 있었다.

아들이 대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뒷바라지를 하겠다. 그게 어머니의 입버릇이었다.

그게 마음에 걸린 것이다.

그래서 학교에서 쌓인 억울함을, 울분을 가족들에게 풀어낼 수가 없었다.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싶지 않았다.

그때 뒤에서 최민식의 고함이 들렸다.

“야. 박민우! 술 안 빨고 거기서 뭐 하고 있냐? 어서 안 텨와?”

민우는 깜짝 놀랐다. 비밀 통화하듯 전화기를 쥐고 작게 말했다.

“엄마 나 들어가 봐야 해. 다음에 또 전화할게. 건강해요. 예! 지금 갑니다!”

“너 연애하냐?”

“연애가 뭐죠? 먹는 건가요?”

“새끼 같잖은 드립은. 가서 담배 하나 사와. 뭔지 알지?”

“예, 선배님.”

지폐를 건네며 민식은 뚫어져라 민우를 쳐다보았다. 그래서 민우는 자리를 뜨지 못했다.

“너 요즘 도서관에 처박혀 산다며?”

“예. 부족한 게 많아서 공부를 좀 더 하고 있습니다.”

민식은 입을 다물었다.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꺼내야 할지 말지 고민하는 눈치다.

이윽고 그의 입이 열렸다.

“열심히 하는 건 좋은데,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빨리 정리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알지? 타대생들은 석사 마쳐도 박사과정 잘 안 받아주는 거. 괜히 시간 낭비할 필요 없이…….”

“다녀오겠습니다!”

술김이었을까. 민우는 그의 말을 끊고 편의점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잠시 후 담뱃갑을 받아 든 민식은 꿍한 표정을 지었지만 잔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돌아서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민우는 생각했다.

‘당신이 뭔데 그만두라 말라야? 누가 뭐래도 난 내 갈 길을 갈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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