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2. 기연을 얻다 (1)
(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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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2. 기연을 얻다 (1)
2021.02.04.
따르르릉!
알람 소리에 민우가 게슴츠레 눈을 떴다. 하지만 곧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러길 한 시간 뒤.
“으아악!”
늦잠을 잔 민우는 급하게 가방을 챙기고 부리나케 튀어 나갔다.
오늘은 석박사 논문 프로포절이 있는 날이었다.
석사 1학기생인 민우는 한 시간 전에 도착해서 미리 세팅을 도와야 했는데 지각의 위기에 몰린 것이다.
‘하필 왜 오늘 지각을…… 어휴, 이거 먼지 나게 털리겠는데?’
발을 동동 굴려 봐도 버스는 올 생각을 하지 않았다. 버스 도착시간 안내 어플을 확인하니 정류장에 도착하기 직전 떠난 것 같다.
때마침 전화가 한 통 걸려왔다. 대학원 동기 이수빈이었다.
“오빠 어디예요?”
“하하하. 어디긴. 저승 갈 준비하고 있지. 저승사자 아저씨가 좀 늦네.”
“……웬일로 늦잠을 잤대? 어째 전화 안 받는다 했어. 지금 선배들이 오빠 찾고 난리예요. 왜 아직도 안 오고 있냐고.”
“곧 간다고 말씀드려. 총알 같이 튀어갈게.”
전화를 끊고 한참이 지나서야 버스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그가 다니는 대학은 서울에 위치한 명인대학교. 국내는 물론, 아시아권 최고 대학이라고 평가받는 곳이었다.
그래서일까. 학교 안까지 들어가는 버스에 오를 때만큼은 민우는 목에 쫙 힘을 준다.
하지만 속은 새카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마음이 급했던 민우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40분 지각. 오늘 집에 무사히 돌아가기는 틀렸네. 일단 전력 질주다.’
버스가 서자마자 그는 인문관을 향해 뜀박질했다. 평소라면 10분을 걸어야 하지만, 오늘은 3분 만에 도착했다.
인문관 2층 세미나실.
숨 돌릴 틈 없이 문을 열었다.
덜컥!
동시에 미리 도착한 선배와 동기들의 따가운 눈총이 쏟아졌다.
“이야, 우리 민우. 아주 그냥 박사 8학기여. 야 인마! 지금이 몇 시야? 선배들이 네 뒤까지 닦아줘야 하냐?”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죄송할 짓을 대체 왜 해? 다른 동기들을 좀 본받아라. 다들 제시간에 와서 척척 일하잖아? 엉?”
마음 같아서는 어제 하연이와 놀아줬던 이야기를 꺼내며 핑계를 대고 싶었지만, 후폭풍이 두려워 그러지 못했다.
어쨌든 늦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으니까.
“프린트 세팅하고 어서 자리에 앉아.”
“예, 선배님.”
선배와 동기들 모두 한심하다는 듯 민우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그중에 아군이 몇 있었다.
한진섭. 그는 민우처럼 타 대학 출신이었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동갑이기도 해서 학창시절 친구처럼 친하게 지내고 있었다.
아까 전화를 했던 이수빈도 그의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자대 출신임에도 열심히 노력하는 민우를 응원하는 착하고 귀여운 동생이다.
한진섭이 슬쩍 다가왔다.
“대체 왜 늦은 거냐?”
“말도 마라. 어제 하연이 케어하느라. 하, 집에 가니까 밤 열 시였어. 도서관에서 밀린 과제하고 공부하느라 세 시간밖에 못 잤다.”
대답하면서도 민우의 손은 정신이 없다. 프린트를 돌리는 손이 하루 이틀 해 본 솜씨가 아니다.
“하연이? 그게 누군데?”
“민영환 선생님 딸.”
“허, 걔가 걔였어? 빡셌겠네. 걔 성격 장난 아니라던데. 전에 춘식 선배도 같이 놀이공원 갔다가…….”
“일단 이것 좀 도와 봐!”
“알았다, 알았어. 지각한 놈이 입은 살아 가지고. 절반 띵.”
두 사람은 프린트를 나눠 갖고 테이블에 하나씩 깔기 시작했다.
“오빠. 나도 도울게요.”
“됐어. 괜히 미운털 박하지 말고 가서 앉아 있기나 해.”
“그래도.”
“훠이.”
민우는 수빈을 돌려보냈다. 오늘은 큰 잘못을 한 날이다. 그녀에게 불똥이 튈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이다.
안쓰럽게 민우를 바라보던 수빈은 자리에 앉았다. 한동안 시선이 민우의 등에 머물러 있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그럼 이것으로 프로포절을 모두 마치겠습니다.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논문 프로포절은 큰 문제 없이 마무리되었다. 오후 세 시가 넘어서야 국문과 교수들과 대학원생들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논문 발표자들은 신물이 날 정도로 까였고, 다들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프로포절이 있는 날 밤에는 늘 술을 마신다. 술로 스트레스를 푸는 것이다.
“잠깐. 석사들은 남아 봐.”
박사 6학기 최민식이 짜증스러운 표정으로 한마디를 했다. 오늘 최고로 공격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분위기가 살벌했다. 나가려던 석사과정생들이 움찔하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것은 민우도, 수빈도, 진섭도 마찬가지였다.
최민식의 시선이 민우에게 꽂혔다. 먹이를 발견한 매의 눈이었다.
“박민우.”
“죄송합니다.”
“이 자식, 죄송하다는 말은 아주 그냥 등재지급으로 튀어나오네. 페이퍼를 좀 그렇게 빠릿빠릿 써보지 그러냐?”
민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이 상황에서는 어떤 말을 해도 좋게 돌아오지 않는다. 경험상 조용히 넘어가는 게 좋다.
최민식의 잔소리는 10분이나 계속되었다.
“다음부터 늦으면 얄짤없어. 알았냐? 무식하면 용감하다더니. 누가 이런 천덕꾸러기를 우리 대학원에 입학시킨 거야?”
“죄송합니다. 다음부터는…….”
“이래서 3류대 출신은 받으면 안 된다니까. 쯧, 아무튼 다른 친구들은 수고했고 이따 뒤풀이에 꼭 참석해라. 알았냐?”
“네!”
석사과정생들이 흩어지는 와중에 민우는 우두커니 서서 주먹을 꽉 쥐었다.
천덕꾸러기. 낙제생. 3류대 출신.
그게 자신을 따라다니는 키워드였다.
‘박민우. 넌 낙제생이 아니야. 천덕꾸러기도 아니고! 모교 상아대는 곧 명문 반열에 오를 거야. 분명히. 꼭!’
선배나 교수들에게 비난을 들을 때마다 늘 해오던 마인드컨트롤이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명인대학교 대학원에 붙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좋아하던 어머니의 얼굴. 누나의 격려. 그것들을 생각하니 민우의 주먹이 천천히 풀렸다.
‘아직 1학기야. 절반도 오지 않았다고. 얼마나 어렵게 입학을 한 학교인데. 가족들에게 실망을 줄 순 없어.’
사실, 선배들의 꾸지람은 얼마든지 견딜 수 있었다. 한 귀로 듣고 흘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진짜 걱정이 되는 건 민영환 선생님인데. 어제 하연이가 잘 얘기해 줬으려나?’
일단 교수를 목표로 공부하는 자신의 미래를 쥐고 있는 것은 바로 민 교수다.
민영환. 명인대 국문과 부교수.
학계 중진이기도 한 그의 입김 한 방이면 천국과 지옥을 오갈 수 있다고 전해지는 인물이다. 로비도 굉장히 많이 받는다.
그래서일까. 민우의 발걸음이 자동으로 민영환 교수의 연구실로 향했다.
“나 잠깐 민 교수님 연구실 좀 다녀온다. 걱정 말고 다들 볼일 봐.”
“오빠, 정말 괜찮아요?”
“오늘 민식 선배 말이 좀 지나치긴 했지. 괜찮어? 이따 한잔하면서 다 풀어버리자.”
“하루 이틀 깨지냐. 신경 쓰지 마.”
민우는 쿨하게 웃으며 세미나실을 나섰다.
민 교수의 연구실은 인문관 3층에 있었다. 한 층 올라간 다음 문 앞에서 차분히 노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나가 있어.”
“네? 아, 네…….”
손님이 있었다.
민우는 황급히 문을 닫고 밖으로 나왔다.
‘어제 고생했다는 말 한마디 정도는 해 줘도 괜찮을 텐데. 아예 문전박대하시네.’
어제는 말 그대로 황금 같은 주말이었다.
민우는 명인대 출신에 비해 전공 지식이 부족했다. 학문적 센스도 부족. 그래서 주말에 보충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됐다.
그런데 그 시간을 통으로 날렸으니 민우의 입장에서는 큰 손해였던 것.
그렇게 30분 정도를 기다렸을까.
“학생. 안으로 들어가 보세요.”
“예, 감사합니다.”
손님이 용무를 마치고 연구실을 나왔다. 그제야 민우는 눈치를 보며 안으로 들어갔다.
“선생……님?”
그런데 민영환 교수의 표정이 좋지 않다. 뭔가 일이 잘못된 것이 분명했다.
“아니, 야. 박민우. 도대체 가서 뭐 하고 놀았길래 애가 재미있었다는 말을 한마디도 안 하냐?”
“예? 어제 서울월드 가서 놀이기구 탔습니다. 하연이 분명 웃으면서 잘 놀았는데.”
“논문을 못 쓰면 애라도 잘 데리고 놀아야지 그렇게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어디 쓰겠어? 전에 춘식이가 데려갔을 때는 좋아라 하던데.”
“죄송합니다. 제가 좀 부족했던 모양입니다.”
“됐다. 됐어. 쯧. 한 번 속는 셈 치고 맡겼더니 일을 그딴 식으로 해? 이래서 서자들은. 쯧.”
민우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비난. 타 대학 출신이라는 편견. 늦둥이 딸이 귀한 줄은 알겠다. 하지만 나도 귀한 집 아들이라고!
물론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었다. 민우는 꾹 참고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선생님. 심부름시키실 건 없으시고요? 제가 오늘 오후에 수업이 없어서 시간이 남거든요.”
“아 그래. 마침 잘됐다. 너 보존 서고 어디에 있는지 알지?”
“중앙도서관 지하에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민영환 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 가서 책 좀 하나 찾아와. <개벽> 창간호. 사서한테는 얘기해 뒀다. 내 이름 대면 보존 서고 오픈해 줄 거야.”
“예.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근데 너 개벽이 언제 창간됐는지는 아냐?”
“1920년입니다. 6월 24일. 아니지, 25일입니다.”
대답을 못 할 줄 알았는지 민 교수가 살짝 놀랐다. 하지만 그게 끝이었다. 손을 휘휘 젓는 민 교수에게 인사하고 민우는 밖으로 나왔다.
드르르르.
휴대폰에 진동이 울린 것은 바로 그때였다. 민우는 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