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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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1. 프롤로그
2021.02.01.
국내 최고 학부인 명인대학교의 도서관은 오늘도 만원이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곳곳에 불이 켜져 있었다.
IMF 이후 몇 차례의 경제위기를 겪고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 됐다.
아무리 명문대를 나온다고 해도 그만큼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 지성들의 생각이었다.
그것은 이제 막 명인대학교 국문과 대학원에 입학한 박민우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는 도서관 한구석에 앉아 열심히 수업 준비를 하고 있었다.
‘발제 준비는 이 정도면 됐어. 핵심 질문은 내일 다시 한번 검토하면서 넣고 이제 과제를 해야지. 그래. 과제.’
민우는 르네 웰렉, 오스틴 워렌이 공저한 <문학의 이론>을 열었다. 영문 원서였는데, 한 챕터 번역이 수업 과제였다.
자신이 맡은 부분을 확인하곤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보다 양이 많았다.
‘글자가 빽빽하다. 시간 내에 할 수 있을까?’
영어는 어느 정도 할 줄 알았지만, 번역은 또 다르다. 거기에 이론서 번역은 더욱 다르다. 학술용어가 많이 들어가서다.
국문학 전공이지만 명인대 국문과에서는 대개 원서로 수업을 진행한다. 이론은 대부분 해외에서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민우는 번역 과제를 할 때마다 늘 의문을 품었다.
‘왜 우리가 만든 이론은 해외에 소개할 수 없는 걸까? 역량 부족은 아닐 텐데.’
그러한 의문은 곧 민우의 궁극적인 목표로 이어졌다.
‘내가 꼭 성공해서 해내고 말겠어. 학계의 거장이 돼서 한국인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줄 거야!’
민우의 꿈은 세계적인 학자가 되는 것이었다. 물론, 지금은 과제 하나 하기 버거운 신출내기 대학원생이지만 말이다.
사실 꿈을 이루는 과정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많이 있었다.
학계에서 가장 우선시되는 것은 능력이 아니라 학력이다. 그러나 민우는 속칭 3류 대학으로 통하는 상아대학교 출신.
명인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긴 했지만 시작점이 자대생에 비해 한참 부족한 것이다.
게다가 능력 면에서도 명인대 학생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뒤처지는 게 많다.
작품 분석능력은 물론, 자료 수집능력과 이론 이해도, 그리고 논문 작성능력 중 출중한 게 하나도 없었다.
그런 그가 국내 최고인 명인대 대학원에 입학했다는 것은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아니, 그건 기적이 아니었어. 내 손으로 해낸 일이라고.’
적어도 민우는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능력은 몰라도 노력만큼은 최상급이었으니까.
그래서 그는 자는 시간을 줄여 남들보다 두 배, 아니 세 배는 노력했다.
매일 세 시간만 잤고, 수업과 논문을 준비했다. 점심을 먹을 때도 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물론 아직은 수준이 낮고 실수투성이라 수업 도중 공격을 받거나 조롱을 듣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샌드백이 따로 없을 정도.
천덕꾸러기. 낙제생, 3류대 출신.
문득 자신을 표현하는 여러 키워드가 떠오르자 민우는 펜을 꽉 쥐었다.
‘까짓것 자는 시간 줄이고 더 열심히 하면 되지. 공부만큼 정직한 건 없어. 한 만큼 돌아온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사실 민우는 남들이 모두 취업의 길을 택할 때 학문의 길을 택했다.
모두가 말렸다. 미친 짓이라고.
대한민국에서 인문학을 하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지만 민우는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았다. 재능은 부족하지만 학문 자체가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민우는 잠시 시선을 돌려 손에 책을 쥐었다. 1985년 심설당에서 발간된 루카치의 <소설의 이론>이었다.
그가 학부 2학년 때 처음 읽게 된 책이기도 했다.
‘이 책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내가 이 자리에 있지도 못했겠지?’
이 책을 만난 이후로 학문을 하고 싶어졌다.
단지 그 이유였다.
하나뿐인 인생, 자신이 하고 싶은 걸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누구도 그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후회는 없어.’
민우는 잠시 책에서 눈을 떼고 펜을 들었다. 그리고 비어있는 노트에 이렇게 휘갈겼다.
Vis ta Vie.
그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