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이 몰아치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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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이 몰아치면 (2)
2022.05.13.
상자에 붙어 있었던 글귀는 ‘둘째 결과.’
즉.
최지원의 유전자 검사 결과라는 뜻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설명이 되지 않는다.
문서에는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익명으로 표시가 되어 있으나, 안 봐도 그게 우리 부모님이라는 건 확실한 사실.
“……하.”
단말마의 헛웃음만 지어졌다.
믿기지 않았다.
허나, 문서는 사실이었다.
조작의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었지만, 그 꼼꼼하신 아버지께서 검사를 한 번만으로 끝내지는 않았을 터.
다른 곳에서 이 문서를 입수했으면 당연히 거짓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아버지의 금고에 있던 물건이다.
진실이라는 뜻이지.
다시 말해.
최지원은 나의 핏줄이 아니다.
정확히는 어머니는 같지만, 아버지는 다르다.
나는 그의 이부(異父)동생이다.
“……X발.”
어이가 없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을 지경.
그놈이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었다니.
호전적이고 대담한 성격을 가진 다른 형제들과 달리, 세심하면서도 반사회적인 소시오패스 경향이 있던 건 사실이다.
허나, 그게 문제가 있다고 여긴 적은 있었어도, 우리랑 달라서 그런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멘탈이 바스스 부서지려 했다.
연신 담배가 당겼다.
그렇게 결과지를 들고서 줄담배를 피웠다.
한 네 대쯤 태웠을까.
그제야 머리가 진정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알고 계실까.
지금까지 어머니가 둘째 형을 대하던 태도를 생각하면, 별다른 건 없었는데…….
아니지.
그건 의미가 없다.
그분의 자식은 맞다.
그저 아버지의 자식이 아닐 뿐.
애초에 어머니의 성격 상 자식들의 사랑에 차별을 주시는 분도 아니니까.
아마 어머니는 모르실 가능성이 높다.
아버지께서는 말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검사 날짜가 2022년 1월이다.
지금으로부터 겨우 3년 전.
아버지께서 무언가 의심할 거리가 생기셨던 모양이었겠지.
오래 지나지 않은 시기긴 했으나, 아버지께서는 누구보다 어머니를 사랑하셨다.
죽음과는 동떨어져 있던 시기였으나, 그래도 무덤까지 숨기시려 했겠지.
아마 고태욱 총리에게도 말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아버지께서는 이 자료를 나에게 넘겼다.
상황을 거슬러 아버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았다.
자신의 치부다.
아니, 어머니의 치부인 건가.
그렇지 않다.
부모님 두 분 모두의 치부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를 다른 이에게 숨기면서도 나에게는 결과를 남겨주셨다.
즉.
본인의 치부를 드러내면서까지도 나를 지원해 주시려고 한 것이다.
“……아버지.”
눈시울이 붉어지려 했다.
단순한 내리사랑이 아니다.
진정으로 나를 믿고 본인의 후계자이자, 대통령감으로 생각하시기에 이런 결정을 하신 거겠지.
“하아.”
짙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머리는 진정되었으나, 가슴은 여전히 쿵쿵 뛰고 있었다.
현재 대선 구도에서는 고태욱 총리와 최지원이 팽팽하게 맞서 싸우고 있다.
아버지의 진정한 후계자를 주장하는 최지원이었고.
그의 지지자들 또한, 대부분이 최준석 대통령이라는 향수 때문이었기에.
이 문서를 공개하면, 대선은 단번에 고태욱 총리의 승리로 이끌 수 있다.
아니, 이끄는 수준이 아니라, 확정할 수 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허나…….
꼬깃.
나는 서류를 다시 접어 상자에 넣었다.
그리고는 서랍 대신, 서재의 비밀 금고에 넣어 봉인했다.
이 문서는 쓰지 않을 것이다.
나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낙마시킬 수 있다.
내 이득을 위해 아버지의 명예를 더럽힐 순 없었다.
내가 패배하는 한이 있더라도 그러고 싶진 않았다.
그게 나의 신념이고 가치관이다.
아버지는 이것을 사용하라고 주셨겠지만.
나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찢어버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최지원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까.
최소한의 보험으로 손에 쥐고는 있어야만 한다.
허나, 그가 대선에 당선이 되더라도 쓸 일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녀석이 선거에서 승리할 수도 없을 테지만.
호흡을 가다듬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향했다.
저 멀리 커다란 보름달이 떠올라 있었다.
밤하늘의 어딘가에서 아버지의 모습이 일렁거리는 것만 같다.
* * *
“예, 의원님.”
마돈나는 브레이크를 밟으며 주차장에 차를 멈췄다.
“지금 도착했습니다. 예. 만나고 오겠습니다.”
그녀가 도착한 곳은 부산 연제경찰서.
묵혀 둔 사건을 터뜨릴 때가 왔으니까.
마돈나는 최지훈에게 짤막한 보고를 마치고 곧장 차에서 내렸다.
경찰서 입구는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다.
다만, 민원실과 접수실 등 한계가 있었고.
수사팀에는 입구에서 순경이 길을 막았다.
“어떻게 오셨을까요?”
“강력 1팀 제영민 반장님 만나러 왔습니다.”
“혹시 약속하고 오셨나요?”
“아니요.”
그녀는 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꺼내 건넸다.
국회의원실에서 왔다는 걸 확인한 순경은 멈칫하더니.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짧은 말과 함께 제일 안쪽으로 향했다.
대충 봐도 저 보고를 받는 인물이 제영민 반장이라는 건 마돈나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는 파티션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나 마돈나에게 말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제영민 반장을 따라 들어간 곳은 작은 회의실.
그는 혹시나 밖으로 소리가 새어나갈까 싶어 문을 꽉 닫은 뒤, 다시금 명함을 살피며 물었다.
“임지현 보좌관님?”
“네, 맞습니다.”
“혹시 무슨 일로 오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마돈나는 오래 끌 것 없이 입을 열었다.
“2015년에 있었던 정민이 사건 아시죠?”
그 말에 제영민 반장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건 이미 지난 사건인데요.”
“아니요. 아직 범인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예. 그러니까 미제 사건으로 넘어갔습니다. 벌써 10년이나 지났어요.”
“당시에 담당 형사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옛날에 담당했죠. 관련된 내용은 미제 사건 수사팀에 문의해 주십시오.”
제영민 반장은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허나, 마돈나는 유연하게 다리를 꼬며 고개를 들었다.
“켕기는 게 있으신가 봐요?”
도도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제영민 반장은 정색하며 반발했다.
“의원실에서 나왔다고 해서 사람 함부로 의심해도 되는 겁니까?”
“저는 반장님께 기회를 드리는 겁니다.”
마돈나는 가볍게 눈꼬리를 휘며 그에게 몸을 기울였다.
“제영민 경위님.”
그녀는 눈썹을 들썩이며 하나둘씩 읊었다.
“경찰 월급 뻔하잖아요. 당장 인터넷에 검색만 해도 나오는데. 반장님은 현재 경위. 거기다가 호봉 생각하면 대략 350만 원 돈 정도 받으시겠네요. 거기다가 수당 이것저것 해도 500은 안 넘죠.”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지금 사시는 아파트가 어디였죠? 연제 롯데캐슬? 거기 꽤나 비싸던데. 33평에 10억이 넘어가더라고요.”
“……나 같은 공무원은 집도 사면 안 됩니까?”
“사도 되죠. 그런데 어떻게 샀느냐가 문제죠.”
“쌀 때 샀는데 집값이 오른 겁니다.”
“집 처음 사실 때 매입가가 5억. 근데 제가 계산을 해 보니, 반장님이 월급을 받아서 단 한 푼도 안 쓰고 숨만 쉬며 모았다면, 매입하던 당시까지 한 1, 2억 정도 모을 수 있었더라고요.”
“그때 당시에는…….”
“에이, 변명하지 마세요. 순경 초봉 해 봤자 다 알잖아요. 반장님 바닥부터 올라온 건 다 알고 있는 건데.”
제영민 반장은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겁니까?”
“그 돈, 어디서 받았는지 난 알고 있는데.”
마돈나는 코를 찡긋거렸다.
여유 넘치는 그녀와 달리, 제영민 반장의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가 뒷돈을 받아 챙기는 건 확실했고, 눈앞에 있는 임지현 보좌관은 모든 걸 알고 온 것 같았으니까.
“원하는 게 뭔가 싶죠?”
마돈나는 생글 웃으며 물었다.
“자잘한 돈 받아먹은 건 신경 안 써요. 뭐, 경찰이 민중 지켜 주는 데 수수료 좀 받을 수 있지. 안 그래요?”
“……그렇죠.”
“그렇긴 뭐가 그래요?”
“아니, 그게…….”
“됐고. 그건 문제 삼지 않을게요. 그런데 10년 전에 받아먹은 돈은 액수가 좀 크더라고요.”
제영민 반장은 손에 땀을 쥐었다.
일반인이라면 입막음 비용을 원했겠지만, 상대는 무려 국회의원실의 보좌관.
대체 무엇을 원하는지 가늠이 가질 않았으니까.
“삼민 C&C에서 돈 받았죠?”
“…….”
“대답 안 해요? 나 증거 있는데. 굳이 보여줘야 되나?”
마돈나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품에 있던 서류를 꺼내 팔랑거렸다.
결국 제영민 반장은 고개를 푹 숙이며 자백했다.
“받았습니다.”
“그래서 반장님은 당시 담당했던 사건인 정민이 사건에서 유력한 용의자 하나를 풀어줍니다. 맞죠?”
“풀어준 게 아니라, 증거 불충분으로…….”
“스읍!”
마돈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꾸 거짓말 할래요?”
“…….”
“얼마 받았어요?”
“…….”
“받을 만큼 받았겠지. 아닌가? 그러면 승진을 대가로 받은 건가? 하긴, 생각해 보면 30대 중반에 반장은 조금 이르긴 해. 그쵸?”
제영민 반장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실제로 돈과 승진이라는 두 개의 대가를 모두 받았으니까.
“경찰이란 사람이 너무하다는 생각 안 들어요? 고작 10살 된 어린 학생한테 흉기를 휘둘러서 팔과 다리의 힘줄을 다 끊는 것도 모자라 대장까지 파열시켰잖아요. 정민이가 생명은 건졌어도 팔 하나를 빼고는 아예 못 움직이고, 평생 기저귀까지 차고 살아야 하는데, 죄책감 안 들어요?”
“죄송합니다.”
“저한테 왜 사과를 해요. 정민이한테 해야지.”
“…….”
“이거 밝혀지면 반장님 모가지 날아가는 거 알죠?”
제영민 반장은 빠르게 상황 판단을 마치고 곧바로 소파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한 번만 봐주십시오!”
“에이, 사람들 다 보겠다. 아니네. 언제 커튼까지 치셨대?”
마돈나는 능청스레 미소를 지었다.
“반장님 살아나는 방법이 딱 하나 있는데.”
그녀는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제영민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한 번 해볼래요?”
* * *
여의도.
국회의사당의 기자회견장으로 불리는 정론관에 많은 기자들이 모여 있다.
이들은 전부 ‘최지훈’의 기자회견으로 알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래?”
“최지훈 의원이 나설 정도면…… 게다가 무려 정론관이야. 평범한 일이 아니란 건 확실해.”
“대선이랑 관련된 거 아닐까?”
“100%지. 안 그래도 오늘 TV토론회 있잖아. 날짜 맞춘 거겠지.”
“최지원 지지 선언인가?”
“그건 아니지 않을까? 그래도 민국당 최고위원인데 대한당 후보를 지지할 순 없잖아.”
“하긴…… 그렇긴 해도 핏줄이잖아.”
“그 집안사람들이 어디 형제들이야? 다들 권력 갖고 싸우기 바쁜데.”
“일단 요즘 선거 구도 팽팽했는데 재미는 있을 것 같네.”
기자들의 잡담이 지루해질 즈음.
벌컥-.
정론관의 문이 열렸다.
VJ들은 카메라를 잡았고.
기자들은 기사를 쓰기 위해 노트북 키보드 위에 손을 얹었다.
그런데.
“어?”
“최지훈이 아닌데?”
“누구야?”
처음 보는 남자가 단상 위로 올라왔다.
그의 등장에도 경호원들은 제지하지 않았다.
제대로 등장을 했다는 소리.
남자는 뚜벅뚜벅 걸어가 깍듯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마이크를 잡아 또박또박 말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부산 연제 경찰서에서 근무하고 있는 제영민 경위입니다.”
기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게 누구야?”
“일단 적어.”
분주해진 기자들 사이에서 이를 지켜보는 최지훈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제 최지원이 자신의 작은 치부를 가리려다가 자폭하는 꼴을 지켜보는 일만 남았으니까.
‘잘 가라, 최지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