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태풍이 몰아치면 (1) (193/200)


  • 태풍이 몰아치면 (1)
    2022.05.12.



    “이건…….”

    나는 조심스레 금고에 있던 물건을 꺼냈다.

    엄청나거나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작은 통장 하나와 증명서 한 장.

    그게 전부였다.

    “아…….”

    실체를 확인한 고태욱 총리는 나지막이 탄성을 흘렸다.

    무엇인지 눈치챈 모양.

    “어떤 건지 아십니까?”

    “예.”

    고태욱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이쪽으로 오시죠.”

    평범하게 한두 마디로 정리될 내용이 아닌 모양.

    나는 그를 따라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조금 전에 미뤄 뒀던 커피까지 오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각하를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국가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던 분이라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밑밥을 까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깨끗한 돈은 아니라는 뜻이지.

    “저는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셨다고 한들, 가장 존경하는 인물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고태욱 총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액수를 한 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나는 대답 대신 통장을 열었다.

    $50,000,000.

    5천만 불.

    원화가 아니라, 달러로 5천만이다.

    현재 환율로 따지면, 대략 600억 정도.

    “허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고 총리도 액수는 알고 있었는지.

    “꽤 크죠?”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네. 개인 자금이 따로 있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불법적인 은닉 자금은 맞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각하께서 금단의 범죄를 저지르신 건 아닙니다.”

    “총리님은 잘 알고 계시나 보네요.”

    “예. 그걸 만들어온 게 저였거든요.”

    “아아…….”

    역시 고태욱 총리다.

    유일하게 아버지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인물.

    “어떻게 된 건지 출처를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예.”

    그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우선, 그 돈의 출처는 최일그룹과 한별그룹 그리고 봉성그룹 세 곳에서 모은 자금입니다.”

    총수가 운영 방식이 깨끗하지 않기로 유명한 그룹들이다.

    특히나 최일그룹은 내가 정계에 입문했던 직후에 그쪽의 비자금을 가로채기도 했었지.

    “그중에 중심이 된 건 한별그룹입니다.”

    한별그룹은 총수가 경제사범이 되며 그룹이 해체되어 현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기업.

    “한별그룹을 중심으로 두 개 그룹이 국내에서 비자금을 만들어 해외영업부를 통해 세탁을 한 뒤, 국내로 들여오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걸 국정원에서 포착한 겁니다.”

    “역시…….”

    “각하께서 그들에게 철퇴를 내리려고 하자, 세 개 그룹은 모두 자신들의 관여한 바가 없다며 꼬리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결국 해외 영업부 대가리들만 책임을 지게 된 거죠.”

    “법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지만, 문제는 돈이었겠군요.”

    “예, 맞습니다. 국내에서 자금이 유출된 건 확인되었으나, 단순히 그렇다고 해서 회수할 수 있는 게 아니었거든요.”

    일단 돈이 해외로 송금된 이상, 국제법 혹은 해당 국가의 법률에 따라야 한다.

    “그런데 이게 여러 나라를 거치기도 했고, 또 마지막으로 걸렸을 당시에 돈이 위치했던 국가는 마다가스카르였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법률 검토를 해보니, 최소한 50% 많게는 80% 이상까지 떼어줘야 가져올 수 있는 거였죠.”

    600억 원 중, 기껏해야 100억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다른 나라만 좋은 일을 시키는 꼴이 된다.

    “결국 국내 자금 유출이라는 결과가 되었겠네요.”

    “그렇죠. 회수해서 세수로도 충당할 수 있고 개인 자금으로도 쓸 수 있으나, 각하는 이 정도의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아버지는 대통령으로서 10년이 넘게 대한민국을 통치하셨다.

    돈이 없어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즉 돈에 욕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그래서 이후에 분명, 해외에 로비할 때 쓰일 일이 있을 거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묵혀 둔 것이고요.”

    “그런데 지금까지 쓸 일이 없었던 거군요.”

    “예. 아무래도 최준석 대통령의 통치 하에 대한민국이 강대국 반열에 오르다 보니, 어지간한 사안은 굳이 뒷돈을 주지 않아도 외교를 통해 해결이 가능하게 되었거든요.”

    그게 오랫동안 묵혀 있다가 내게로 돌아온 것이다.

    “10년이 지났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이자가 붙진 않았을 겁니다.”

    “예. 아마 보관료로 더 줄었을 가능성도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도 3천만 불에서 왔다 갔다 할 겁니다.”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개인적인 판단인데, 저는 대선이 끝나기 전에 도련님께서 이 자금을 찾아와 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대선으로 쏠려있다.

    나는 거기서 한 발 떨어져서 관망하는 상태고.

    대선이 끝나고 나면, 오히려 나를 주목하는 시선이 많아질 터.

    돈이 생기자마자 찾아오는 건 그림이 좋지 않으나, 지금만큼 좋은 기회도 없으니까.

    “그러면 최대한 빠르게 출국 날짜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예. 시간이 흐른 뒤에도 꼬투리를 잡힐 수 있습니다. 조심하셔야 됩니다.”

    “네. 핑계는 확실하게 마련해 두도록 하죠.”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돈 찾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여기 적혀 있는 은행에 가셔서 통장을 보여 주면 제일 높은 사람에게 안내할 겁니다. 지점장 정도가 아니라, 사장일 가능성이 커요. 제가 이곳에 갔을 때는 은닉자금을 보관하는 곳이라, 체인점 같은 건 아니었거든요.”

    “그 다음은요?”

    “지점장에게 증명서를 보여 주시면 됩니다. 금고에 통장과 함께 있던 문서요.”

    “끝입니까?”

    “예. 전부 현금으로 찾을 수도 있고, 수표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원하시면 해외에 있는 차명 계좌로 받을 수도 있고요.”

    “나눠서 받아야겠군요.”

    “네. 그래도 깨끗하게 세탁이 된 거니 수표로 사용하셔도 문제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고태욱 총리는 어렴풋이 미소를 지으며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각하께서 평범치 않은 물건을 남기시리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거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쇠는 돌려드리겠습니다.”

    금고는 청와대의 물건.

    그 열쇠를 관리하는 건 내가 아니라, 현재 청와대의 주인인 고태욱이 맡아야 옳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는 열쇠를 건네받아 금고로 향했다.

    문을 닫으려던 그때.

    “어?”

    고태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멈칫했다.

    “도련님.”

    “예?”

    “잠깐 와 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안에 물건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은데요.”

    화들짝 놀라, 그곳에 다가갔다.

    고태욱 총리의 손끝을 따라가자, 작은 상자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앞에 놓여 있던 통장 및 증명서와 달리, 구석에 박혀 있어서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고태욱 총리는 손수 상자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겉에는 아버지께서 자필로 쓴 쪽지가 작게 붙어 있었다.

    -둘째 결과.

    길지도 않았다.

    딱 4글자.

    “……이건 뭔지 아십니까?”

    “글쎄요. 저도 처음 보는 상자입니다.”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

    “우선, 도련님께 남긴 물건으로 보이니 챙기시지요.”

    “알겠습니다.”

    심상치 않은 내용물이 들어있음은 확실했으나, 직감적으로 이것만큼은 혼자서 확인해야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고태욱 총리라고 해도 아버지가 속에 있는 묵은 먼지까지 내주진 않았을 테니까.

    철커덕-

    고태욱은 금고의 문을 잠그며 열쇠를 주머니에 챙겼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도련님.”

    “쉬십시오.”

    * * *

    “여기 좋네.”

    한예린은 행복한 미소로 호텔의 창가를 바라봤다.

    “뷰 장난 아니야.”

    청와대에 다녀온 지 사흘 뒤.

    나는 아내와 함께 마다가스카르로 향했다.

    지난번에 제대로 다녀오지 못한 신혼여행을 다시 온다는 핑계였다.

    한예린은 한사코 괜찮다며 거절했지만, 내가 억지로 여행을 계획했다.

    물론, 아내는 좋다고 행복해하는 눈치였지만, 아버지의 비자금을 찾으러왔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또 일이야?”

    내가 태블릿 PC를 보고 있자, 한예린은 허리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미안, 아무래도 대선이라서…….”

    “신경 쓰이면 굳이 안 와도 된다니까. 여행은 다음에 안 바쁠 때 와도 되고.”

    “아니야, 안 볼게.”

    태블릿 PC를 덮으려고 하자, 한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먼저 씻고 올게. 쉬고 있어.”

    “고마워.”

    “응.”

    나는 다시금 태블릿 PC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에 떠 있는 건 현재 국내 선거 구도.

    한국의 대선은 양강 구도로 좁혀지는 중이었다.

    미래당의 고태욱 총리가 37%, 대한당의 최지원이 34%.

    그 밑으로는 민국당의 구태양 후보가 20% 등 어중간한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아마 누가 당선되든 간에 과반을 넘기는 힘들겠지.

    사실, 아버지의 지지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것이지, 이런 게 일반적인 것이다.

    물론, 생각했던 것보다 최지원이 분발하고 있어서 놀라긴 했으나, 커다란 걱정은 없었다.

    조만간 내가 준비했던 사건을 통해 단번에 찍어 눌러 줄 테니까.

    다음 날 오전 11시.

    “오늘 태닝한다고 했지?”

    “응. 오빠는 또 일할 거지?”

    “아니, 오늘은 가볍게 산책 좀 하려고.”

    “웬일이래?”

    “놀러 왔으면 좀 쉬려고.”

    “그래. 그래야지.”

    한예린에게 태닝 크림을 발라주고 나서, 나는 홀로 통장과 증명서를 챙겨 은행으로 향했다.

    돈을 찾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고태욱 총리가 말한 대로 통장과 증명서를 제출하면 끝.

    600억 중 100억은 1억짜리 수표로.

    나머지 500억은 차명 계좌 몇 개로 나누어 송금했다.

    앞으로의 정치길에서 이게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겠지.

    아버지의 유산이다.

    허투루 쓰지 않을 것이다.

    * * *

    “나 먼저 잘게. 너무 피곤하다.”

    “응. 조금 이따가 갈게.”

    “너무 늦게 오지 말고.”

    “그래.”

    마다가스카르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

    한예린을 먼저 침실로 보내고, 나는 홀로 서재로 향했다.

    혹시나 아내 한예린도 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문을 걸어 잠그고 나서야 열쇠로 서랍을 열었다.

    드르륵-.

    그곳에서 꺼낸 건 아버지가 내게 남긴 상자.

    ‘둘째 결과’라…….

    지금 떠오르는 건 두 가지.

    두 번째의 결과 혹은 둘째 형 최지원에 대한 어떠한 결과.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 같았지만, 아버지가 내게 남겼다는 뜻은, 직접 확인하라고 남겨주신 것일 터.

    “흐으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담배 한 대를 꼬나물며 상자를 열었다.

    어찌나 꽁꽁 봉인해 놨는지, 자물쇠도 없는데 낑낑거린 끝에 겨우 열었다.

    “어?”

    작은 상자 안에는 반듯하게 접힌 문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훼손되지 않도록 조심스레 펼쳤다.

    -DNA 유전자 검사 결과.

    -귀하께서 익명으로 의뢰하신 결과 친자 확인 유전자 검사 결과입니다.

    -대상 샘플 A(父) : 친자 확률 : 0.00003%

    -대상 샘플 B(母) : 친자 확률 : 99.9891%

    “……미친.”

    말문이 턱하고 막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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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풍이 몰아치면 (1)
    2022.05.12.



    “이건…….”

    나는 조심스레 금고에 있던 물건을 꺼냈다.

    엄청나거나 대단한 것은 아니었다.

    작은 통장 하나와 증명서 한 장.

    그게 전부였다.

    “아…….”

    실체를 확인한 고태욱 총리는 나지막이 탄성을 흘렸다.

    무엇인지 눈치챈 모양.

    “어떤 건지 아십니까?”

    “예.”

    고태욱은 잠시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이쪽으로 오시죠.”

    평범하게 한두 마디로 정리될 내용이 아닌 모양.

    나는 그를 따라 소파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는 조금 전에 미뤄 뒀던 커피까지 오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었다.

    “각하를 어떻게 생각하실지는 모르겠지만, 국가의 발전을 위해 최선을 다하셨던 분이라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밑밥을 까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깨끗한 돈은 아니라는 뜻이지.

    “저는 아버지가 어떤 일을 하셨다고 한들, 가장 존경하는 인물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고태욱 총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입을 열었다.

    “액수를 한 번 확인해 보시겠습니까?”

    나는 대답 대신 통장을 열었다.

    $50,000,000.

    5천만 불.

    원화가 아니라, 달러로 5천만이다.

    현재 환율로 따지면, 대략 600억 정도.

    “허허…….”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고 총리도 액수는 알고 있었는지.

    “꽤 크죠?”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네. 개인 자금이 따로 있으리라고는 생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불법적인 은닉 자금은 맞습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각하께서 금단의 범죄를 저지르신 건 아닙니다.”

    “총리님은 잘 알고 계시나 보네요.”

    “예. 그걸 만들어온 게 저였거든요.”

    “아아…….”

    역시 고태욱 총리다.

    유일하게 아버지가 믿고 맡길 수 있는 인물.

    “어떻게 된 건지 출처를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예.”

    그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우선, 그 돈의 출처는 최일그룹과 한별그룹 그리고 봉성그룹 세 곳에서 모은 자금입니다.”

    총수가 운영 방식이 깨끗하지 않기로 유명한 그룹들이다.

    특히나 최일그룹은 내가 정계에 입문했던 직후에 그쪽의 비자금을 가로채기도 했었지.

    “그중에 중심이 된 건 한별그룹입니다.”

    한별그룹은 총수가 경제사범이 되며 그룹이 해체되어 현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 기업.

    “한별그룹을 중심으로 두 개 그룹이 국내에서 비자금을 만들어 해외영업부를 통해 세탁을 한 뒤, 국내로 들여오려고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걸 국정원에서 포착한 겁니다.”

    “역시…….”

    “각하께서 그들에게 철퇴를 내리려고 하자, 세 개 그룹은 모두 자신들의 관여한 바가 없다며 꼬리자르기를 시전했습니다. 결국 해외 영업부 대가리들만 책임을 지게 된 거죠.”

    “법적으로는 그렇게 되었지만, 문제는 돈이었겠군요.”

    “예, 맞습니다. 국내에서 자금이 유출된 건 확인되었으나, 단순히 그렇다고 해서 회수할 수 있는 게 아니었거든요.”

    일단 돈이 해외로 송금된 이상, 국제법 혹은 해당 국가의 법률에 따라야 한다.

    “그런데 이게 여러 나라를 거치기도 했고, 또 마지막으로 걸렸을 당시에 돈이 위치했던 국가는 마다가스카르였습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 법률 검토를 해보니, 최소한 50% 많게는 80% 이상까지 떼어줘야 가져올 수 있는 거였죠.”

    600억 원 중, 기껏해야 100억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다른 나라만 좋은 일을 시키는 꼴이 된다.

    “결국 국내 자금 유출이라는 결과가 되었겠네요.”

    “그렇죠. 회수해서 세수로도 충당할 수 있고 개인 자금으로도 쓸 수 있으나, 각하는 이 정도의 필요치 않았습니다.”

    그럴 수밖에.

    아버지는 대통령으로서 10년이 넘게 대한민국을 통치하셨다.

    돈이 없어도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즉 돈에 욕심을 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지.

    “그래서 이후에 분명, 해외에 로비할 때 쓰일 일이 있을 거라 여겼습니다. 그래서 묵혀 둔 것이고요.”

    “그런데 지금까지 쓸 일이 없었던 거군요.”

    “예. 아무래도 최준석 대통령의 통치 하에 대한민국이 강대국 반열에 오르다 보니, 어지간한 사안은 굳이 뒷돈을 주지 않아도 외교를 통해 해결이 가능하게 되었거든요.”

    그게 오랫동안 묵혀 있다가 내게로 돌아온 것이다.

    “10년이 지났긴 하나, 그렇다고 해서 이자가 붙진 않았을 겁니다.”

    “예. 아마 보관료로 더 줄었을 가능성도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도 3천만 불에서 왔다 갔다 할 겁니다.”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개인적인 판단인데, 저는 대선이 끝나기 전에 도련님께서 이 자금을 찾아와 주셨으면 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대선으로 쏠려있다.

    나는 거기서 한 발 떨어져서 관망하는 상태고.

    대선이 끝나고 나면, 오히려 나를 주목하는 시선이 많아질 터.

    돈이 생기자마자 찾아오는 건 그림이 좋지 않으나, 지금만큼 좋은 기회도 없으니까.

    “그러면 최대한 빠르게 출국 날짜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예. 시간이 흐른 뒤에도 꼬투리를 잡힐 수 있습니다. 조심하셔야 됩니다.”

    “네. 핑계는 확실하게 마련해 두도록 하죠.”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돈 찾는 방법은 간단합니다. 여기 적혀 있는 은행에 가셔서 통장을 보여 주면 제일 높은 사람에게 안내할 겁니다. 지점장 정도가 아니라, 사장일 가능성이 커요. 제가 이곳에 갔을 때는 은닉자금을 보관하는 곳이라, 체인점 같은 건 아니었거든요.”

    “그 다음은요?”

    “지점장에게 증명서를 보여 주시면 됩니다. 금고에 통장과 함께 있던 문서요.”

    “끝입니까?”

    “예. 전부 현금으로 찾을 수도 있고, 수표로도 찾을 수 있습니다. 원하시면 해외에 있는 차명 계좌로 받을 수도 있고요.”

    “나눠서 받아야겠군요.”

    “네. 그래도 깨끗하게 세탁이 된 거니 수표로 사용하셔도 문제없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고태욱 총리는 어렴풋이 미소를 지으며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각하께서 평범치 않은 물건을 남기시리라고는 생각했지만, 그거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쇠는 돌려드리겠습니다.”

    금고는 청와대의 물건.

    그 열쇠를 관리하는 건 내가 아니라, 현재 청와대의 주인인 고태욱이 맡아야 옳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는 열쇠를 건네받아 금고로 향했다.

    문을 닫으려던 그때.

    “어?”

    고태욱은 미간을 찌푸리며 멈칫했다.

    “도련님.”

    “예?”

    “잠깐 와 보셔야 될 것 같습니다.”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안에 물건이 하나 더 있는 것 같은데요.”

    화들짝 놀라, 그곳에 다가갔다.

    고태욱 총리의 손끝을 따라가자, 작은 상자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앞에 놓여 있던 통장 및 증명서와 달리, 구석에 박혀 있어서 못 보고 지나칠 뻔했다.

    고태욱 총리는 손수 상자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겉에는 아버지께서 자필로 쓴 쪽지가 작게 붙어 있었다.

    -둘째 결과.

    길지도 않았다.

    딱 4글자.

    “……이건 뭔지 아십니까?”

    “글쎄요. 저도 처음 보는 상자입니다.”

    그는 조심스레 말했다.

    “우선, 도련님께 남긴 물건으로 보이니 챙기시지요.”

    “알겠습니다.”

    심상치 않은 내용물이 들어있음은 확실했으나, 직감적으로 이것만큼은 혼자서 확인해야 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고태욱 총리라고 해도 아버지가 속에 있는 묵은 먼지까지 내주진 않았을 테니까.

    철커덕-

    고태욱은 금고의 문을 잠그며 열쇠를 주머니에 챙겼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도련님.”

    “쉬십시오.”

    * * *

    “여기 좋네.”

    한예린은 행복한 미소로 호텔의 창가를 바라봤다.

    “뷰 장난 아니야.”

    청와대에 다녀온 지 사흘 뒤.

    나는 아내와 함께 마다가스카르로 향했다.

    지난번에 제대로 다녀오지 못한 신혼여행을 다시 온다는 핑계였다.

    한예린은 한사코 괜찮다며 거절했지만, 내가 억지로 여행을 계획했다.

    물론, 아내는 좋다고 행복해하는 눈치였지만, 아버지의 비자금을 찾으러왔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또 일이야?”

    내가 태블릿 PC를 보고 있자, 한예린은 허리에 손을 얹으며 물었다.

    “미안, 아무래도 대선이라서…….”

    “신경 쓰이면 굳이 안 와도 된다니까. 여행은 다음에 안 바쁠 때 와도 되고.”

    “아니야, 안 볼게.”

    태블릿 PC를 덮으려고 하자, 한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먼저 씻고 올게. 쉬고 있어.”

    “고마워.”

    “응.”

    나는 다시금 태블릿 PC로 시선을 돌렸다.

    화면에 떠 있는 건 현재 국내 선거 구도.

    한국의 대선은 양강 구도로 좁혀지는 중이었다.

    미래당의 고태욱 총리가 37%, 대한당의 최지원이 34%.

    그 밑으로는 민국당의 구태양 후보가 20% 등 어중간한 지지율을 기록하고 있었다.

    아마 누가 당선되든 간에 과반을 넘기는 힘들겠지.

    사실, 아버지의 지지율이 비정상적으로 높았던 것이지, 이런 게 일반적인 것이다.

    물론, 생각했던 것보다 최지원이 분발하고 있어서 놀라긴 했으나, 커다란 걱정은 없었다.

    조만간 내가 준비했던 사건을 통해 단번에 찍어 눌러 줄 테니까.

    다음 날 오전 11시.

    “오늘 태닝한다고 했지?”

    “응. 오빠는 또 일할 거지?”

    “아니, 오늘은 가볍게 산책 좀 하려고.”

    “웬일이래?”

    “놀러 왔으면 좀 쉬려고.”

    “그래. 그래야지.”

    한예린에게 태닝 크림을 발라주고 나서, 나는 홀로 통장과 증명서를 챙겨 은행으로 향했다.

    돈을 찾는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고태욱 총리가 말한 대로 통장과 증명서를 제출하면 끝.

    600억 중 100억은 1억짜리 수표로.

    나머지 500억은 차명 계좌 몇 개로 나누어 송금했다.

    앞으로의 정치길에서 이게 든든한 방패가 되어주겠지.

    아버지의 유산이다.

    허투루 쓰지 않을 것이다.

    * * *

    “나 먼저 잘게. 너무 피곤하다.”

    “응. 조금 이따가 갈게.”

    “너무 늦게 오지 말고.”

    “그래.”

    마다가스카르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뒤.

    한예린을 먼저 침실로 보내고, 나는 홀로 서재로 향했다.

    혹시나 아내 한예린도 보면 안 된다는 생각에 문을 걸어 잠그고 나서야 열쇠로 서랍을 열었다.

    드르륵-.

    그곳에서 꺼낸 건 아버지가 내게 남긴 상자.

    ‘둘째 결과’라…….

    지금 떠오르는 건 두 가지.

    두 번째의 결과 혹은 둘째 형 최지원에 대한 어떠한 결과.

    아마 후자일 가능성이 크다.

    판도라의 상자를 여는 것 같았지만, 아버지가 내게 남겼다는 뜻은, 직접 확인하라고 남겨주신 것일 터.

    “흐으음…….”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담배 한 대를 꼬나물며 상자를 열었다.

    어찌나 꽁꽁 봉인해 놨는지, 자물쇠도 없는데 낑낑거린 끝에 겨우 열었다.

    “어?”

    작은 상자 안에는 반듯하게 접힌 문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나는 그것이 훼손되지 않도록 조심스레 펼쳤다.

    -DNA 유전자 검사 결과.

    -귀하께서 익명으로 의뢰하신 결과 친자 확인 유전자 검사 결과입니다.

    -대상 샘플 A(父) : 친자 확률 : 0.00003%

    -대상 샘플 B(母) : 친자 확률 : 99.9891%

    “……미친.”

    말문이 턱하고 막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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