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 (4)
(186/200)
폭풍전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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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전야 (4)
2022.05.05.
여의도에 차명으로 마련해 둔 오피스텔.
똑똑.
노크소리에 조심스레 문고리를 돌렸다.
어차피 올 사람은 한 명밖에 없으니까.
“들어오시죠.”
“예.”
강효석 의원의 손엔 묵직한 가방 하나가 들려 있었다.
표정을 보자, 결과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받으셨나 보군요.”
“물론입니다.”
그는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말했다.
“최지훈 의원님도 제가 실패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셨잖습니까?”
“물론이죠.”
그렇기에 강효석 의원을 섭외했던 것이니까.
“앉아도 될까요?”
“이쪽으로 오시죠.”
“예.”
그는 소파에 앉으며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그 보좌관분께서 일러주신 대로 했더니 어렵지 않게 넘어오더군요.”
강효석 의원은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그것도 최 의원님 의견이셨죠?”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실제로 이 계획의 처음부터 끝까지는 전부 다 내가 짠 것이었으니까.
“우선 자료 먼저 확인해 보시죠.”
강효석 의원은 가방에서 두툼한 서류 봉투를 하나 꺼냈다.
여항석에게 받은 파일일 터.
“제가 먼저 확인해 봤는데 따로 조작을 가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의원님께서 말씀하신 내용과 큰 차이도 없었고요.”
“그런가요?”
나는 대답하며 서류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혹시나 하는 상황을 대비하기 위해 강효석에게도 자료의 내용을 전부 공유하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직접 확인해야만 했다.
서류 점검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애당초 내가 여항석에게 공유해 줬던 파일이기에 그 자료의 내용과 일치하는지만 확인하면 되는 법이니까.
10분쯤 지난 뒤, 나는 서류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료는 그대로네요.”
“다행이네요.”
계획대로 흘러간다는 성취감이 드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살짝 헛웃음이 나왔다.
여항석 이 자식.
이럴 줄 알고 뽑은 거긴 했지만, 내가 공유하지 말라고 했던 걸 홀라당 넘겨버리다니.
접촉한 게 내가 직접 고용한 강효석이었기에 망정이지, 다른 인물이었다면 계획이 완전히 어긋날 뻔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아닙니다.”
그는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또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예. 다음엔 다시 임지현 보좌관 통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강효석 의원은 고개를 꾸벅이며 오피스텔을 빠져나갔다.
모든 건 계획대로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아주 기가 막히게 연기를 펼치는 것.
그거 하나면 된다.
* * *
“공소시효 폐지법, 일명 정민이 법이 통과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탕!
경쾌한 망치 소리와 함께 나는 흡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든 형사 사건에서 공소시효를 폐지해야 한다는 우리 민국당의 주장.
죄질이 나쁜 범죄에 국한하여 적용해야 한다는 대한당의 주장.
양측의 제안을 절충하여 모든 강력 범죄 사건 및 아동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범죄 사건에 대하여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방향으로 통과가 되었다.
여당과 야당 중 누군가의 승리라고 보기 보다는, 대한당과 민국당 양측 모두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이라고 봐야지.
사기나 절도 같은 형사 사건은 배제가 되었지만, 개중에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클 경우에는 선택적으로 공소시효를 무기한으로 연장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수고했어, 최 의원.”
“고생하셨습니다, 의원님.”
민국당 의원들과 인사를 나누며 의기양양하게 본 회의실을 빠져나왔다.
“담배 한 대 피우실까요?”
“좋지.”
당 대표를 맡은 구태양 의원은 내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최 의원, 잘했어.”
“아닙니다. 대표님께서 서포트해 주신 덕분이죠.”
“대한당과 조율은 했지만, 그래도 이번 정기 국회에서 제일 굵직한 건이 될 거야. 그게 우리 민국당에서 발의해서 통과가 된 거고.”
한 마디로 기를 세운 것이지.
원래 정당과 국회의원이 얼마나 일을 열심히 하고, 제대로 하는가에 대한 척도는 법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키는 걸로 정해지는 법이기 때문.
치익-.
담뱃불을 붙여, 두어 모금쯤 마셨을까.
지이잉-.
지잉지잉-.
지이이이잉-.
휴대폰에 연신 알림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비단 내 휴대폰뿐만 아니라, 함께 담배를 피우고 있던 의원들의 휴대폰에도 일제히 진동이 울렸다.
심상치 않은 기운에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정민이 법 통과와 동시에 인터넷에 유출된 문건……. 과연 정민이를 죽인 진범은?
-태정민군 살인 사건 10년 전 사건의 배후가 밝혀지나?
-정민이 사건의 경찰이 음폐했던 근황?
-대한당의 조직적 움직임인가, 의원 하나가 단독 행동인가?
“……이게 뭐야?”
주변에 의원들은 놀란 얼굴로 기사를 읽어내려갔다.
“뭔가 사건이 터지긴 터졌나 본데.”
“대충 읽어보니, 대한당과 연관이 있나 봐요.”
“그래?”
그러자, 당 대표 구태양 의원의 안색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이거 아무래도 하늘이 우리를 돕나 본데요?”
“대한당이 자충수를 던졌어.”
“이걸 노리고 일부러 공소시효 폐지 대상을 축소하자고 한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나오겠는데?”
“느낌이 좋습니다.”
우리는 웃음꽃이 피었다.
대한당과 연관이 되었다는 건, 그들에게 의혹이 가해질수록 우리 야당에 힘이 실린다는 뜻이었으니까.
아니나 다를까, 저 멀리 대한당 의원들이 심각한 얼굴로 부리나케 뛰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저도 슬슬 들어가보겠습니다.”
“그래, 쉬어. 조만간 한잔하자고.”
“예, 대표님.”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의원실로 향했다.
그렇게 흡연 구역에서 멀어졌을 즈음, 나는 발걸음을 옮겨 주차장으로 향했다.
내 차에 올라, 곧장 나는 따로 마련해 둔 오피스텔로 향했다.
다른 이들의 눈을 피해 대화를 나눠야만 했으니까.
“크흠흠.”
나는 목울대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최대한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화난 연기를 해야 했으니까.
어느 정도 감정이 몰입된 뒤에야, 여항석에게 전화를 걸었다.
휴대폰을 들고 있었는지 그는 수신음이 채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예, 의원님…….
잔뜩 움츠러든 목소리.
9시 뉴스를 진행하는 아나운서가 현재 터지고 있는 뉴스를 모를 리 없다.
“여항석 이 개X끼야!”
나는 흥분한 듯 소리쳤다.
“너 미쳤어?!”
-죄, 죄,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 튀어와!”
-예, 예. 알겠습니다.
* * *
“죄송합니다!”
여항석은 오피스텔에 들어오자마자 머리를 땅에 박았다.
나는 최대한 굳은 얼굴로 차갑게 그를 내려다봤다.
“죄송하다고 해서 될 일입니까?”
“면목이 없습니다.”
“하아…….”
나는 거칠게 한숨을 내뱉으며 소파로 턱짓했다.
그는 내 눈치를 보더니 조심스레 엉덩이를 붙였다.
나는 입을 꾹 닫고 지그시 여항석을 노려보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그는 슬쩍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죄인처럼 어깨를 움츠렸다.
나는 말없이 위스키만 스트레이트로 두 잔을 마셨다.
에어컨이 빵빵하게 틀어져 있음에도, 그의 이마에선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을 하고 있겠지.
나는 다시금 위스키를 입에 털어넣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게…….”
여항석은 열심히 머리를 굴리고 왔는지, 조심스레 말을 시작했다.
“다른 의원님을 한 분 만났거든요.”
“뭐요?”
내가 한껏 인상을 찌푸리자, 그는 움찔하며 힘겹게 변명을 이어나갔다.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넘겼는데…….”
“이 사달이 났군요.”
“죄송합니다.”
“제가 아무한테도 넘기지 말라고 이야기했잖습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여항석은 다급하게 소파에서 내려와 무릎을 꿇었다.
“시간이 길어지면서 제가 마음이 조급해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제가 익명으로 제보를 받은 거다 보니, 다른 누군가에게도 또 자료가 넘어가지 않을까 싶어서…….”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호통을 쳤다.
“죄송합니다.”
문득 여항석은 입술이 달싹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
보나마나 변명이겠지만, 들어는 봐야겠다는 생각으로 물었다.
“저한테 궁금한 거라도 있습니까?”
“묻고 싶다기보다는…….”
그는 잠깐 망설이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좋은 거 아닙니까?”
내가 인상을 굳히자, 여항석은 움츠러든 목소리로 말했다.
“대한당이 위기가 되면 민국당이 힘을 받는 건 사실이 아닐까 생각해서요. 타이밍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당신 미쳤어?”
나는 정색하며 말했다.
“그 주역에 내가 섰어야 할 거 아니야?!”
“아……!”
호통을 치자, 그제야 깨달은 듯 그의 표정에서 낭패감이 짙어졌다.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금 여항석의 머리가 땅에 처박혔다.
한창 아들뻘인 내게 계속해서 머리를 조아리는 걸 보면, 어지간히 정계에 입성하고 싶은 모양.
허나, 그의 정계 입성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대한민국 정치는 인맥으로 한다고 한들, 저렇게 머리가 나쁘면 데려와도 살아남지 못하는 곳이니까.
“이거 어떻게 수습할 겁니까?”
“면목이 없습니다, 의원님. 진심으로 죄송합니다,”
“아니, 죄송하다는 소리는 그만하고 앞으로 어떻게 할 건지 말해 보라고요.”
그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무언가 열심히 생각하는 모양.
그러나 짱구를 굴려도 떠오르는 건 없었는지.
“시키는 건 뭐든지 하겠습니다.”
“하아.”
나는 짙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붙잡았다.
눈을 지긋하게 감고 몇 분쯤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제가 뭘 시키든 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예.”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후우, 알겠습니다.”
그리고는 나가라는 의미로 휘휘 손짓했다.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의원님.”
그는 희망이라도 본 듯 환하게 얼굴이 펴졌다.
“기다리겠습니다!”
여항석은 몇 번이고 고개를 꾸벅이며 오피스텔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힌 뒤.
피식.
내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여항석 저 인간은 대한당을 향해 휘두르는 칼로 쓸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인성을 보면, 시간이 흘러도 그를 거둘 수는 없다.
머리가 나쁜 건 둘째 치고, 사익을 추구하기 위해 서민들을 외면하고 악덕 기업으로 돈을 받으며 많은 사건에 대한 보도를 덮었던 인물이니까.
잘 써먹다가 이용가치가 떨어지면 버릴 생각이다.
한 마디로 토사구팽.
허나, 그전까지는 골수까지 다 뽑아먹을 예정이다.
나는 곧장 김태원 기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의원님! 잘 지내셨습니까?
“그럼요. 기자님은요?”
-저야 늘 똑같죠. 안 그래도 오늘 국회에서 또 이슈 하나 터졌길래 궁금하던 참인데…….
“안 그래도 제가 좋은 소스 하나 드리려고요.”
-정말입니까?
“빠르게 기사 하나 부탁드립니다.”
-예. 말씀하십시오.
휴대폰 너머로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사건에 대해 알려온 방송계의 익명 제보자로부터 들었다. 정민이 사건 은폐에는 현 대한당의 간부들이 깊이 연루되어 있다.”
-오, 아주 기가 막히네요. 이거 진실입니까?
“그럼요. 뒤 스토리는 알아서 짜 맞추실 수 있죠?”
-당연하죠. 30분 내로 기사 올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제가 더 감사하죠.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