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풍전야 (1)
(18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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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전야 (1)
2022.05.02.
“어, 왔나. 고 실장.”
“예, 각하.”
“참, 고 실장이 아니라 고 총리라고 불러야 하는데.”
최준석 대통령은 낮게 조소를 지었다.
“슬슬 깜빡깜빡하기 시작하는구먼.”
“편한 대로 부르십시오. 직위는 어차피 다 각하께서 만들어주신 거 아니겠습니까?”
“클클클. 그런가?”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대선 준비는 잘되어 가고?”
“예. 뜻이 같은 사람들이 전부 미래당으로 분열되어서 나온 덕분에 지난 대한당처럼 당내에서 분열할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진보건, 보수건 할 거 없이 힘을 합쳐야 제대로 된 정치를 하는 건데…… 쯧쯧.”
“정치적 이념도 있기야 하지만, 각하를 보고 모였던 거 아니겠습니까? 빛나는 별이 지게 되니 모였던 조각들이 사라지는 거죠.”
고태욱 총리의 말에 최준석 대통령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 사탕발림이 늘은 것 같은데? 내가 죽을 때가 되어서 착각하는 건가?”
“실제로 맞습니다.”
그도 넉살을 떨며 받아쳤다.
“가시기 전까지 좋은 말씀만 들려드리려고요.”
최준석 대통령은 미소를 짓다가 손을 저었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은 말게. 내 죽기 전날까지도 고 총리에게만큼은 직언을 듣고 싶으니까. 내가 그래서 자네를 곁에 둔 거 아니겠나?”
“알고 있습니다. 각하.”
“그래. 그래야 고 총리지.”
최준석 대통령은 끌끌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담배 한 대 태우겠나?”
“밖에서 피우십니까?”
“언제까지고 집무실에서 서류만 보겠어?”
그는 외투를 들며 걸음을 옮겼다.
“죽기 전에 풍경도 보고 숲도 거닐고 그래야지.”
물론, 그렇다고 해 봤자 청와대 내에 있는 숲을 도는 게 전부긴 했다.
“그러면 주말에 저랑 한 번 등산이라도 가 보시겠습니까?”
“예끼, 이 사람아.”
최준석 대통령은 담배를 꺼내며 휘익 손짓했다.
“이 몸으로 등산을 가면 어떻게 되겠어? 날 죽일 셈이야?”
“아, 죄송합니다.”
그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고 총리 라이터 있나?”
“예, 각하.”
치익-.
“후우.”
청와대의 숲은 금연 구역이었으나, 최준석 대통령에겐 해당되지 않는 말이었다.
“각하.”
“말해.”
“입원은 언제쯤 하실 생각이십니까?”
반드시 해야만 했다.
그나마 병원에서 매일 관리를 받아야 며칠이라도 더 살 수 있으니까.
그만큼 무서운 게 췌장암이었다.
그러나 최준석 대통령은.
“내가 입원할 것 같나?”
태연한 눈빛으로 물었다.
“병실에 앉아서 멀뚱멀뚱 죽을 날만 기다리는 거, 전혀 내 스타일 아니잖나.”
“그렇긴 합니다만…….”
“난 가더라도 집무실에서 갈 걸세.”
고태욱 총리는 말리고 싶었지만, 말리지 않았다.
삶의 마지막을 결정할 권리는 최준석 자신에게 있을 테니까.
또 말린다고 들을 사람이 아니기도 했고.
“참, 고 총리.”
“예, 각하.”
“열쇠는 잘 가지고 있나?”
“집무실 내 금고 말씀이십니까?”
“그래.”
“예. 늘 주머니에 품고 다닙니다.”
지금도 그의 품속엔 지갑보다도 더 안쪽에 위치하고 있었다.
“고맙네.”
최지훈에게 물려줄 선물이 담겨 있는 금고.
“이건 총리가 아니라, 개인적으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어떤 건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보면 알게 될 거야.”
“혹시 제가 생각하는 그겁니까?”
그의 물음에 최준석 대통령은 대답 대신 가볍게 미소만 지었다.
“그토록 아끼시더니…… 이유가 있었군요.”
“나에겐 필요하지 않지만, 지훈이 그놈에게는 필요할 테니까.”
대통령은 아련하게 미소를 지었다.
“잘 챙겨 줘.”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각하.”
* * *
“허억. 허억. 허어억…….”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최지곤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그는 쓰레기 박스 뒤에 몸을 숨기며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이런 제기랄…….”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현재 그가 있는 곳은 필리핀의 작은 도시.
분명 추적이 쉽지 않도록 3개국을 거쳐서 도망 왔는데 사흘도 되지 않아 쫓기고 있었다.
‘최지훈 이 악독한 새끼…….’
한국만 벗어나면 건드리지 않을 줄 알았으나, 자신을 죽이기로 아주 굳은 결심을 했는지, 해외에까지 킬러를 고용한 모양.
어느새 그의 몸은 떨리고 있었다.
이전에 도망 다닐 때와 달리, 먼 타국 땅에서는 정말 죽어도 알려지기는커녕, 가족들이 자신의 시체조차 수습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
‘동남아는 위험해. 내일 아침에 아예 선진국으로 가서 개인 경호를 붙여야겠어.’
그런데 그 생각도 잠시.
팟-.
자신을 향해 손전등의 빛이 쏘아져 왔다.
“Hey.”
최지곤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젠장!’
눈앞의 남자는 영어로 자신을 향해 물어왔다.
“너 한국인이지?”
“…….”
주먹을 꽉 쥐었다.
그의 손엔 모래가 한 움큼 쥐어져 있었다.
여차하면 눈에 모래를 뿌리고 도망갈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권 꺼내. 필리핀 경찰로서 너는…….”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 X발 경찰이었어?”
최지곤은 거칠게 욕설을 뱉어냈다.
“진작 경찰이라고 말을 해야지!”
순간, 그의 몸에 긴장이 쫙 풀렸다.
킬러인 줄 알았다.
경찰이라면 오히려 안심이었다.
밀입국을 하긴 했지만, 쫓겨나는 것밖에 더하겠는가?
돈이 있으면 징역은 어차피 살지 않을 테니까.
그는 주머니에서 여권을 꺼내 던지듯 내밀었다.
“자, 받아.”
필리핀 경찰은 여권을 체크했다.
동료에게 연락하는 모습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돌리기도 잠시.
최지곤은 그때 직감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평생 쫓기며 살아야한다는 걸.
* * *
“안녕하십니까, 최지훈입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여항석입니다.”
여항석.
현재 PBC의 9시 뉴스 진행자이자,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토론을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진행자로서 굉장히 뛰어난 지식과 교양을 갖춘 것으로 알려진 인물.
단순한 아나운서는 아니었다.
정확히는 정계 진출을 꿈꾸는 인물.
“PBC 건물은 지나가면서 많이 봤습니다.”
“하하하, 저도 그렇습니다. 국회의사당과 같은 여의도에 있잖습니까?”
여항석은 능청스레 말을 이었다.
“제 사무실에서 국회의사당이 보입니다. 그리고 볼 때마다 같은 여의도인데 참으로 건너가기가 쉽지 않다는 걸 느끼고 있죠.”
나는 대답 대신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짧은 소강상태 이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렇게밖에 만날 수 없다는 점 죄송스레 생각합니다.”
“아닙니다. 최 대표님 통해서 사정 전달 받았습니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가 말하는 최 대표는 나의 넷째 형 최지성을 말하는 것이다.
내게 여항석을 소개해 준 인물이 바로 그 사람이었으니까.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예. 실은…….”
그는 서류가방에서 조심스레 서류 봉투를 꺼내 내게 내밀었다.
“제보를 하나 받아서요.”
“제보요?”
“예. 정계 인물들과 관련된 건인데…… 보낸 곳을 포함해 어떠한 소장도 찍혀 있지 않아서요.”
여항석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개인적으로 확인하다보니, 아무래도 일반적인 규모가 아니라서요.”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예.”
그는 서류를 꺼내다가 문득 멈추며 물었다.
“혹시 밝혀지더라도 제 신상은…….”
“여항석 씨.”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언제까지고 멀리서 바라보고만 계실 겁니까?”
꿀꺽.
여항석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국회 입성하셔야죠. 그러려고 지금까지 방송국에서 버티신 거 아니십니까?”
“……맞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함부로 터뜨리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가볍게 입꼬리를 휘며 말했다.
“이걸 터뜨리는 건 여항석 씨가 될 겁니다.”
“……예?”
“국회로 오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임팩트 한 방 정도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확신에 찬 눈빛으로 내게 서류를 건넸다.
나는 천천히 서류를 한 장 한 장 정독하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읽는 척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내용이었으니까.
애초에 그에게 이 서류를 보낸 것 또한 나였다.
이 모든 게 처음부터 설계된 것이니까.
오래 전부터 정치를 꿈꾸고 있지만, 그렇다 할 인맥도 없었고 또 재산도 부족했다.
그런 그에게 정계와 연결할 수 있는 몇 되지 않는 연줄 중 하나가 바로 최지성.
내가 최지성을 만나서 고르고 고른 인물이 여항석이었다.
이번에 서류와 관련된 이야기를 술자리에서 슬쩍 뿌려주고.
오래 지나지 않아 익명으로 그 서류를 받는다?
당연히 정치에 욕심이 있다면, 이걸 보도하기보다는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들 터.
그리고 그 예상은 기가 막히게 먹혀들었다.
여항석은 서류를 받은 지 만으로 24시간이 되기도 전에 최지성에게 연락을 했으니까.
단순히 평범하고 욕심 많다는 것만으로 여항석을 이용하려는 건 아니었다.
그가 앵커로서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으니까.
일반적인 앵커의 수준이 아니었다.
방송국 근속이 30년도 넘은 만큼, 그가 PBC 내에서 가지는 영향력은 어마어마하다.
실제로 PBC의 부사장 역할까지 겸하고 있을 정도니까.
각종 엔터테인먼트에서 터지는 사건사고들에 대한 보도를 묻어 주며 뒷돈을 챙겨 받고, 악덕 엔터테인먼트의 피해자들에 대한 인터뷰를 묻었다.
이번 사건이 끝나고 나면, 그의 실체 또한 밝혀낼 생각이다.
물론, 그것을 알아채게 해서는 안 된다.
“제가 보면서 생각을 해봤는데…….”
나는 서류를 덮으며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이 수준이면 대한민국 역사에 획을 그을 만한 게이트가 터질 수도 있겠는데요?”
“그 정도입니까?”
여항석은 눈썹을 들썩이며 몸을 기울였다.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크게 터질 ‘게이트.’
“잘만 하면 앵커님 배지 다실 수도 있겠는데요?”
순간, 그의 주먹이 불끈 쥐어졌다.
자신도 모르게 쥐었다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자연스러운 움직임인 척했으나, 포착하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이 자료는 우선 제가 보관해도 되겠습니까?”
“그럼요. 당연하죠.”
“감사합니다.”
나는 서류를 챙기다가 멈칫하며 물었다.
“혹시 사본은…….”
어쨌든 지금 여항석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그를 신뢰하는 척해서는 안 된다.
나 또한, 정치인으로서 조심하는 모습을 보여야 하니까.
“없습니다.”
당연히 없다고 말하지만,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정도로 멍청했다면, 내게 이용당할 가치도 없을 터.
가지고 있어야만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갈 테지만, 굳이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여항석 씨.”
나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예, 의원님.”
여항석은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이번 사건은 절대 외부로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알고 있습니다.”
“때가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그 전까지는 이 사건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시면 안 됩니다. 절대로요.”
“예, 물론입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믿고 있겠습니다.”
신신당부를 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에 대해 그 어느 곳에도 밝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여항석은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답답한 마음에 슬쩍 다른 곳에 이야기하고 싶어질 터.
그때쯤 새로운 인물을 통해 그에게 접촉할 생각이다.
그러면 정치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말할 터.
물론, 그래도 여의도 입성의 꿈을 놓지 않기 위해 내 이름은 이야기하지 않겠지.
그때가 바로 작전의 포문이 열리는 것이다.
여항석.
그가 바로 조커 카드와 이어지는 첫 번째 연결고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