켕기는 게 있으면 (5)
(164/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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켕기는 게 있으면 (5)
2022.04.13.
“이, 이건…….”
이익현 의원의 얼굴이 사색으로 물들었다.
비단 그 한 명만이 아니라, 백태성 대표를 비롯해 그를 지지하던 세력들은 전부 하나같이 똥이라도 씹은 듯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나는 가볍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정확히 오후 4시 5분부로 엠바고가 풀렸습니다. 본 영상은 정부에서 직접 제공했고, 백령도 교전을 북한 측에서 찍은 영상입니다.”
물론, 나는 사전에 손에 넣었으나.
시간상으로 보면, 엠바고가 풀린 직후, 동영상을 공개한 것이기에 문제가 될 게 없다.
동영상의 출처를 묻는다고 해도, 제보를 받았다는 밑밥까지 뿌려 둔 덕분에 꼬투리를 잡을 수는 없을 터.
“해당 영상을 보셨으니 알 수 있겠지만, 태홍함은 추가 폭격을 맞지 않았습니다. 북한에게 맞은 첫 어뢰 한 방으로 선체가 기울었고, 이내 침몰한 것입니다.”
나는 어깨를 펴며 결정적 한 마디를 보탰다.
“자세히 보시면 선체가 부서진 부분에서 기포가 엄청나게 일고 있죠? 저기가 원래 특수 소재 철판으로 덧대어져 있어야 하는데, 빈 공간이었다는 증거입니다.”
나는 증인석에 있는 설계자 임수홍을 바라보며 말했다.
“이건 기존에 설계와는 다르죠?”
“예, 전혀 다릅니다.”
그 또한 놀란 눈빛을 감추지 못한 채로 대답했다.
“제 설계에서 저 부분은 고밀도의 특수 소재판을 덧대어서 물이 들어가지 않아야 합니다.”
“혹시 그 소재가 비싼가요?”
“네. 안쪽에서 3차적으로 배 하단부를 전체적으로 감싸주는 건데, 영상에서는 보이지 않는 걸로 확인됩니다.”
백태성 대표는 어떻게든 판을 뒤집고 싶은지 끼어들며 물었다.
“확실한 건 아니잖습니까? 이 화질에 그게 구분이 된다고요?”
“100%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임수홍 설계자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허나, 제가 직접 설계해서 알 수 있습니다. 첫 설계대로 작업이 진행되었다면, 저런 식으로 배가 기울지 않습니다.”
“…….”
더 이상 갑론을박할 거리가 없었다.
아니, 임수홍은 전문가다.
보통 전문가도 아니고, 저 배를 직접 설계한 인물.
설계자가 그렇다는데 일개 의원이 반박해 봤자 먹힐 리가 없는 일.
백태성 의원도 패배를 직감하고 쓴 침을 삼켰다.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상입니다.”
다음은 대한당의 차례.
이미 모든 팩트가 드러난 상황인 걸 넘어, 그들은 너덜너덜해진 상태.
아무리 천하의 백태성 대표라고 한들, 이 상황에서 이익현을 살리는 건 불가능했다.
제 목숨 부지하기도 힘들 지경이니까.
국정감사는 그렇게 일방적으로 끝이 났다.
* * *
“고생하셨습니다.”
“수고했어.”
짠-.
우리는 가볍게 소주잔을 부딪쳤다.
백령도 교전으로 인해 국가적으로 애도 기간이었기에 구태여 책잡힐 일을 할 필요는 없었던 만큼, 의한회에 가는 대신 구태양 의원과 간단한 술자리를 가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외부는 아니고 구태양 의원의 집에서.
“이제 마무리 된 거겠죠?”
“다 끝났어.”
그는 거칠게 입꼬리를 휘었다.
“어차피 당 대표 선거가 코앞이야. 우리 쪽 사람들은 이미 과반이 넘고.”
“백태성 없는 민국당이라니…… 확실히 느낌이 다르네요.”
“그렇지. 그 양반, 야당에서만 10년이 훨씬 넘게 터줏대감으로 자리했었으니까.”
“구도는 확실히 뒤집어지겠네요.”
만약 백태성 대표가 이익현 의원을 지켰으면 오히려 우리가 쫓겨났을 것이다.
구태양 의원에게 붙었던 사람들도 전부 다시 등을 돌리고 백태성에게 돌아갔을 것이고.
허나, 이번 국정감사로 인해 백태성 대표가 오히려 국민들에게 외면받은 탓에 당권은 당연히 이쪽으로 쏠릴 수밖에.
“그래서 이제 당 대표를 결정해야하는데…….”
조심스럽게 그가 본론을 꺼냈다.
오늘 따로 만난 가장 큰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으니까.
“원내대표님이 하십시오.”
나는 더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 시원하게 말했다.
“원내대표님이 그 자리에 제격이십니다.”
“에이, 아닐세.”
“이미 사람들도 전부 원내대표님 위주로 모여 있지 않습니까? 그게 그림 상 좋습니다.”
“그런가?”
구태양 의원도 아마 비슷한 생각이었을 터.
나 또한 애초에 그럴 생각이었다.
그래서 구태양을 당내 2인자인 원내대표까지 올린 것이고.
“1인자가 쫓겨났으니, 2인자가 자리를 차지하는 게 자연스러운 그림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자네는?”
구태양 의원은 잔을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말했다.
“원내대표로 올라오는 게 어떤가? 어차피 내 자리는 공석이 될 테니까.”
당내 2인자.
굉장히 높은 자리다.
무려 제 1야당에서 2인자라는 건 어마어마한 파워를 가지게 해주는 것이니까.
허나, 나는.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습니까?”
단칼에 거절했다.
“저는 지금 이 자리에 만족합니다.”
“아니, 왜?”
구태양 의원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원내대표 자리를 차지하면 할 수 있는 게 많다는 건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제가 원내대표가 되지 않아도 의원님께서 저를 도와주실 테니 그만한 힘은 발휘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야 하지만…….”
“게다가 제 나이를 생각해보십시오.”
문득 내 얼굴을 바라본 그는 낮게 탄식을 뱉었다.
“아…….”
“너무 어리잖습니까? 게다가 초선입니다. 아무리 종로를 차지했다고는 해도, 이 바닥에서 어린놈,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 소리 들을 게 뻔합니다. 젊은 유권자들은 지지할지 몰라도, 나이가 있으신 분들은 거부감이 생길 수밖에 없죠.”
정치에서 ‘경력’이란 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짬이니까.
“저는 지금 이 자리를 지키겠습니다.”
“자네 뜻이 정 그렇다면…….”
그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나 못내 아쉬운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면 최고 위원 자리는 어떤가?”
“최고 위원이요?”
“그래. 어차피 그건 당에서 한두 명만 하는 것도 아니고 자리가 꽤 널널하지 않나?”
물론, 하고 싶은 사람은 많기에 ‘널널하다’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겠지만, 당 대표나 원내대표에 비해서는 머릿수가 많긴 하니까.
“적어도 자네가 간부직은 꿰고 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이야.”
틀린 말은 아니다.
당에서 단순히 일개 의원일 때와 최고위원일 때 파워는 비교하지 못할 정도로 다르니까.
“알겠습니다. 원내대표님께서 그렇게까지 말씀해주신다면야…….”
“고맙네.”
그는 가볍게 내 손을 잡았다.
“혹시 내 후임 원내대표로 추천할 만한 인물은 있나?”
구태양 의원은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자네가 원하는 인물로 추대해보도록 하겠네.”
“글쎄요. 민국당에서는 아직 저와 굉장히 가까운 사람은 없어서…… 제 추천보다는 원내대표님께서 믿을 만한 인물을 앉히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예. 아무래도 백태성 대표가 떠난 직후라서 원내대표님의 측근이 자리를 꿰고 있어야 당권을 안정화시켜서 휘어잡기 쉬울 테니까요.”
“맞는 말이긴 하네.”
“그리고…….”
나는 눈을 번뜩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이제는 원내대표님이 아니라, 당 대표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순간, 구태양 의원의 입가에 미소가 헬쭉 지어졌다.
“하하하하, 최 의원이 역시 사회생활은 잘하는구먼.”
“감사합니다.”
“그러면 내가 조만간 원내대표 후보군 한 번 뽑아서 보여줌세. 자네도 같이 한 번 봐보자고.”
내 의견을 적극 수렴하겠다는 뜻이다.
이는 즉 내 뒤통수를 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것인 다름없었고.
“알겠습니다.”
사실, 구태양 의원이 나를 배신할 염려는 하지 않았다.
이번에 백태성을 몰아낸 걸 옆에서 직접 지켜본 만큼.
나를 적으로 돌리면, 일이 상당히 까다로워진다는 걸 깨달았을 테니까.
원래 나 같은 인물은 아군으로 두는 게 상책이지.
“자네가 내 손을 잡아줘서 참 고맙네.”
구태양 의원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병을 들었다.
“한 잔 받게.”
“예, 당 대표님.”
* * *
민국당 내부는 당 대표 선거를 치르며 깔끔하게 정리가 되었다.
백태성은 당 대표에서 일개 의원으로 몰락하였고.
구태양은 원내대표에서 당 대표로.
그의 오른팔이었던 의원이 원내대표로 올라왔고.
최고위원직 또한 나를 포함해 구태양과 손을 잡은 인물이 전부 차지했다.
새로운 세대가 열린 것이지.
지금까지 민국당과 다른 새로운 정당.
바뀐 김에 새로운 마음으로 시작하자며 정당명 또한 교체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그건 기각되었다.
어차피 국민들에게 각인되어있는 이미지는 바뀌지 않으니까.
이 와중에도 여전히 백태성에게 붙어있는 인물이 있긴 했으나, 이전에 비하면 10명 남짓밖에 되지 않는 소수.
백태성에게 약점이 잡힌 인물이거나, 큰 은혜를 입은 인물을 제외하고는 전부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고 보면 되지.
어쩔 수 없는 정치계의 생태였다.
이번 임기가 끝난 뒤에도 민국당에서 공천을 받으려면, 당연히 힘이 있는 쪽으로 붙어야만 하니까.
자연스레 당에서의 내 입지 또한 훨씬 더 올라갔다.
“안녕하십니까, 최 의원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그럼요. 나중에 식사 한 끼 꼭 하시죠. 제가 사겠습니다.”
“하하, 알겠습니다.”
나이가 나이다 보니, 예전에는 나를 먼저 보더라도 다가오는 인물은 많지 않았으나.
이제는 알아서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민국당이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면, 구태양이 나를 단순한 동료나 참모 그 이상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으니까.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다들 내일 봅시다.”
의원실 보좌진들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퇴근을 알리고는 곧장 종로로 향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은 상견례 날이었으니까.
나의 여자친구 한예린과 그 집안이 함께 만나는 날.
그렇다고 해서 집안사람 전체가 모이는 건 아니었다.
다른 형들이야, 워낙 정신없이 바쁘고.
한예린의 오빠들 또한 각자 위치가 있어서 모두가 비는 날을 정하기가 쉽지 않았으니까.
우리 쪽은 이미 대가족이기도 하고.
그래서 다른 형제들에게는 따로 인사를 가기로 하고, 오늘은 한예린과 나. 그리고 각각의 부모님들만 만나기로 했다.
그래도 상견례인 만큼, 내가 직접 부모님을 모시고 갈 생각으로 청와대로 향했다.
주차장에 도착해서 기다리자, 아버지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천천히 걸어 나오셨다.
그런데 아버지를 보고 당황한 속내를 숨길 수 없었다.
아버지께서 원래 저렇게 야위셨었나?
안 본 지 몇 주나 되었다고…….
눈에 띄게 살이 빠지신 느낌.
“왔느냐.”
“예, 아버지.”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근엄하셨다.
“타시죠.”
띠리링-.
때마침 들려오는 아버지의 휴대폰 벨소리.
“잠깐만.”
그는 손을 들며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버지가 전화를 받는 사이, 나는 어머니를 향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어머니, 청와대 주치의 번호 아시죠? 저한테 좀 보내주시겠어요? 김 박사님 맞죠?”
“아, 얼마 전에 바뀌었어.”
“바뀌었다고요?”
“응. 김 박사님이 캐나다로 이민을 가시게 되었거든. 자식 유학 때문이었던 거 같은데…… 여하튼 그래서 바뀌게 되었어.”
청와대에서 주치의를 하던 인물이 해외로 나갔다고?
단순히 그만두고 일을 하는 것도 아니고, 무려 이민이라니.
이거 뭔가 일이 수상한데.
그런데 순간.
지잉지잉-.
미래 문자가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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