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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도 (3) (146/200)
  • 보이지 않는 것도 (3)2022.03.26.

    여의도의 한 호텔. “안녕하십니까, 여사님.” “오랜만이네요.” 실내로 들어오는 남자를 확인한 최은실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담배를 태우고 있던 꽁초를 짓이겨 불을 꺼뜨렸다. “잘 지내셨죠, 박사님?” “그저 하루하루 버티고 있습니다.”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고 있던 인물은 대통령의 주치의 김 박사. 그는 최은실이 자리에 앉자마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 이민은…….” “잘 처리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감사합니다.” 김 박사는 손수건으로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닦아냈다. “진행은 어떻게 되고 있나요?” 그는 심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각하 건강이 안 좋으신 게 슬슬 눈에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주입했던 유전자가 효과를 보고 있나 보네요.” “예. 제대로 안착해서 암세포로 발현했습니다.” 최은실은 무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번에 혹시 홀드할 수 있냐고 말씀해주셔서 약으로 일단 진행을 더디게 만들긴 했으나, 유전자가 변이된 암세포의 특성 상 완전히 멈출 수는 없었습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지금이 췌장암 1기 정도 되나요?” “예. 완전 초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외 특이사항은요?” “병원 측에서는 제가 직접 검사를 진행하기에 간호사 한 명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 간호사도 확실히 입을 막아뒀고요. 다만…….” 김 박사는 스읍 숨을 들이마시며 고개를 꺾었다. “고 실장님께서 최근 들어 연락을 자주 하십니다.” 최은실은 흠칫하며 손을 멈추었다. “고태욱 비서실장님이요?” “예. 각하 건강에 대해서 자주 여쭤보십니다. 건강한 게 맞느냐, 심하지 않느냐, 현재 피부색이 이러하신데 괜찮으시느냐는 둥 요새 한 사흘에 한 번 꼴로 연락하십니다.” 그는 흔들리는 시선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건강에 대해 의심하시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요.” 최은실은 이를 꽉 깨물며 말했다. “손쓸 수 없어지기 전까지는 절대 몰라야 합니다.” “예. 당연합니다. 2기까지는 제가 주치의로 남아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암 중에서도 치사율이 가장 높은 췌장암의 특성상 2기만 넘어가면, 아무리 의료진의 실력이 좋다고 한들 살아남을 확률은 현저히 떨어지니까. 최은실은 호흡을 가다듬고는 가방에서 작은 파우치를 꺼내 김 박사에게 건넸다. “약속했던 돈입니다. 차명 계좌로 스위스 은행에 넣어 뒀습니다. 출금하는 데 필요한 자료는 파우치 안에 다 들어있어요.” 통장을 확인한 김 박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미국으로 부탁드렸잖습니까? 캐나다로 이민 가는 거라 유럽 쪽을 경유하면 티가 날 텐데.”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김 박사님이 조금 더 일정을 당겨달라고 하셔서 이게 최선이었어요.” 최은실은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돈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겁니다. 여행을 빙자해 가족을 보내서 회수하셔도 되고요.” “일단 알겠습니다.” 김 박사는 긴 호흡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일 처리되는 대로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고 실장이 이상행동하면 언제든 전화주세요.” “알겠습니다, 여사님.” 대통령 주치의는 꾸벅 인사를 하며 호텔을 빠져나갔다. 최은실은 홀로 소파에 기대어 앉아 다시금 담뱃불을 붙였다. “후우.” 금연인 호텔이었기에 클리닝 요금을 더 내야하나, 그녀에게 그 정도 돈은 개의치도 않았다. 도덕적인 건 더욱 더 그렇고. 아버지의 목숨을 빼앗는 여자가 이런 것 따위를 고려할 리가 없었으니까. “하아.” 그녀의 입에선 짙은 숨이 새어나왔다. 최은실 또한 적지 않게 고민했다. 처음 계획은 본인과 쌍둥이인 최지곤과의 합작으로 아버지의 췌장암을 치료해 그의 눈에 들며 고태욱 비서실장을 밀어내는 것이었으나. 최지곤이 후계 구도에서 떨어져나가며 모든 게 어긋나버렸다. 차라리 시기가 조금 빨랐으면 모를까, 최준석 대통령에게 암세포를 주입한 뒤에 최지곤이 손을 떼기로 선언한 바람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으니까. 그래서 오랜 고민 끝에 최은실은 결국 인륜을 저버리고 패륜을 저지르기로 했다. 물론, 상황을 되돌릴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주치의에게 주려던 돈을 그대로 주고 대통령이 췌장암에 걸렸던 사실을 알려주면, 지금은 충분히 치료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최은실이 그걸 선택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결론이 나면, 자신이 몇 년 동안 시간과 돈을 투자한 게 물거품이 되는 것이었으니까. 게다가 남아선호사상이 강한 아버지의 특성상 아버지의 집권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그녀가 권력을 잡을 수 있을 리는 만무했고. 또 그가 제일 아끼는 고태욱 비서실장이야말로, 최은실의 시댁과 으르렁거리는 인물. 최준석 대통령이 권좌에서 물러나면 자연스레 그도 권력의 곁에서 떠날 테기에 결국 아버지가 죽어야만 그녀에게 가능성이 열리는 법이니까. “하아아.” 그녀는 짙은 한숨을 내뱉으며 줄담배를 태웠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싶었지만,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제 최은실이 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이 교체되는 시기를 가장 정확하게 가늠할 수 있는 인물로서. 차기 권력을 잡을 수 있도록 움직이는 것뿐. 그녀는 비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남편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여보. 짧으면 2년에서 길어야 3, 4년이야. 응. 아마 다음 대선에서는 변경될 거야. 고 실장도 그때 물러날 거고. 그렇게 될 테니…….” * * * “그러니까 이걸 보면 최일그룹이 대한당에 10년에 걸쳐 100억 원이 넘는 정치 자금을 조달해준 거네?” “예, 맞습니다. 그래서 최일 건설이 부산 해상시티를 포함해 온갖 노른자위 사업들을 차지한 걸로 보입니다. 전자산업에서 만년 2위였던 태무전자를 꺾고 1위인 지한전자를 추격하게 된 것도 대한당에서 정책을 유출해주고 밀어준 덕분인 걸로 확인됩니다.” 차명건의 자료를 통해 대한당이 받은 자금과 지난 최일그룹이 걸어온 길을 살펴보자, 답이 뻔하게 보였다. 그만큼 장부는 확실했다. “이 정도면 대한당뿐만 아니라, 최일그룹까지도 휘청이겠는데?” “예. 전상국이 당 대표인 탓에 그 인간 한 명이 아니라, 대한당 자체에 대한 자료가 되어버려서…….” 대한당의 근간이 흔들릴 만한 자료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상국이 당 대표로 있었던 것만 무려 7년 가까이 된다. 그간 그가 저지를 부패를 보면, 대한당의 다른 의원들도 함께 잇속을 채우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규모였으니까.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건 최일건설과 최일전자. 최일그룹이 국내 굴지의 대기업이라고는 하나, 이번 건이 터지면 재계 서열 10위 밖은 물론이고 총수가 바뀔 가능성도 없지 않았다. “이러한 자료를 넘긴 걸 보면, 차명건 의원도 독하게 마음을 먹은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십수 년 동안 충성해왔던 당에 배신당했으니 오죽하겠어? 게다가 돌아갈 곳도 생겼고 말이야.” 마음 같아서는 이 자료를 전부 공개해 전상국은 물론이고, 그간의 부패를 만천하에 공개하고 싶었다. 허나, 그럴 수는 없었다. 대한당을 엿 먹이게 되면, 단순히 국회의원들뿐만 아니라, 대한당 출신인 아버지마저도 영향을 받게 되니까. “이걸 전부 터뜨릴 수는 없어.” “맞습니다. 그래서 가장 최근 것부터 하나씩 터뜨리면서 전상국 대표를 압박해보는 게 어떨까 생각했거든요.” “말해 봐.” “한중 FTA 관련한 사안입니다.” 요새 한창 핫한 논제였기에 귀를 기울였다. “2년 전, 한중 FTA에서 합의된 것 중에서 최일그룹이 가장 주시하는 게 희토류 수입과 관련된 건데, 내역을 살펴보면 최일그룹에서 희토류를 독점하려고 했던 흔적이 보이는데…….” 나는 고개를 들고 물었다. “희토류?” “예.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원소인데…….” “아니, 희토류가 뭔지는 알아.” 그녀에게 확인 차 다시금 물었다. “희토류 무역에서 최일그룹이 독점을 하려했다고?” “예, 맞습니다.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원소다보니, 수입을 독점하면 지한전자를 꺾고 국내 1위를 차지하는 것도 가능해질 테니까요.” 이거 아무래도 재미있는 그림이 펼쳐질 것 같기도 하고. 미래 문자대로 흘러간다면, 한중 FTA는 재논의가 되지 않을 것이다. 아마 완전히 결렬되겠지. 허나, 정부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그 사안을 일개 대기업에서 예상하지는 못할 터. “그런데 이번 대한당의 움직임을 보면, 아마 최일그룹이 독점할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것 같습니다.” “지한전자에서는?” “보아하니, 최일전자가 발 빠르게 움직여 단순히 대한당뿐만 아니라, 중국 기업 측과 먼저 접촉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 조만간 독점 협의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조금 이상한 게 있다면, 지한전자에서는 따로 움직임이 포착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일각에서는 한중 FTA를 맹신하는 게 아닐까 추정하고 있습니다만, 제가 보기엔 무언가 다른 게 있는 것 같으니 한 번 알아볼까요?” “아니, 그건 내버려 둬.” 지한그룹에서 이러한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내 이야기를 듣고 예비 장인어른이 슬쩍 발을 뺀 것이겠지. 최일전자에게 밀려 희토류 산업 낙찰에 실패한 것처럼 보이면서 몰래 다른 활로를 찾고 있는 것일 터. 역시 지한그룹이다. 오히려 대놓고 움직이지 않아서 최일전자가 헛수고하게 만드는 것이니까. 미래 문자대로 흘러간다면, 지한전자는 반도체 산업에서 최일전자를 따돌리고 압도적인 1위 자리를 굳힐 수 있을 터. “희토류 산업은 내버려두고 다른 건으로 진행해 봐.” “그러면 지한건설로 갈까요? 몇 년 전, 엎어지긴 했으나 해상시티 건은 한남타운 건설보다도 훨씬 더 규모가 커서 전상국 대표는 무조건 엮일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그건 너무 커. 국가 사업이어서 청와대도 엮일 테고…….” 나는 자료들을 살피다가 한 항목에서 시선을 멈췄다. “이걸로 가자고.” “공기업 특별 채용 비리 말씀이십니까?” “이게 가장 잘 먹힐 거야. 국민들이 보기에도 가장 민감한 주제고.” 전상국의 아들. 노량진에서 몇 년 간 공시를 준비하던 인물은 낙방에 낙방을 거듭한 끝에 종로구청에 7급 공무원으로 특채된다. 물론, 이 사실은 청문회를 통해 논란이 되었으나. 전상국 의원의 시선 돌리기와 언론 찍어 누르기로 유야무야 묻혀버렸다. 허나, 내가 당선이 되며 구청을 조사하고 압박할까 봐 부담스러웠는지 총선이 끝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구청에 사표를 낸 뒤 다른 공기업으로 옮겨갔다. 문제는 그곳이 한국철도공사, 코레일이라는 점이었다. 평사원도 아니고 무려 팀장급으로 영전한 것. 전상국이 국회의원으로서 마지막으로 있던 상임위원회가 바로 국토교통위원회라는 걸 생각하면 그림이 뻔히 그려진다. 실제로 한국철도공사 사장은 전상국과 굉장히 밀접하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 게다가 차명건 의원이 건넨 자료를 보면, 코레일 사장을 전상국이 꽂아줬다는 게 확실시되는 데다가 아들까지 엮여 있으니 전상국은 발을 뺄 수 없을 터. “이 정도면 전상국 대표 그 양반도 절대 빠져나가지 못할 거야.” 나는 입꼬리를 거칠게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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