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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도 (2) (145/200)
  • 보이지 않는 것도 (2)2022.03.25.

    마당에 들어서자, 한예린은 부끄럽다는 듯 어색하게 웃었다. “생각보다 그렇게 안 크지?” “아니, 엄청 큰데.” “오빠네는 숲이 있다며.” “거긴 청와대고. 여긴 일반 주택이잖아.” 청담동에서도 가장 커다란 단독주택 중 하나. TV 드라마에서 나오는 연못이나 정원사는 없었지만, 꽤나 널찍한 마당이었다. 한예린은 내 손에 들려있는 커다란 쇼핑백을 보고 물었다. “그나저나 그건 뭐야?” “그림. 얼마 전에 해외 국가에서 선물 받은 건가 봐.” “오, 대박이다. 누가 그린 건데?” “모네였나. 미공개작이랬어.” “헐, 대박.” 한예린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렇게 소중한 걸 우리한테 줘도 돼?” “그만큼 소중한 사람들이니까.” 정원을 반쯤 지났을 무렵. 지잉지잉-. 휴대폰에 진동음이 울렸다. -보낸 이: 신혜지. -사진 8장. 발신인을 확인한 한예린은 걸음을 멈추었다. “업무 관련된 거면 확인하고 들어가도 돼.” “중요한 거라 금방 체크 좀 할게.” FTA와 관련된 사안이기에 곧장 문자함을 열어 사진을 확인했다. 정무수석이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만나 나누었던 대화 내용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한창 뉴스에서 보도되고 있는 이번 한중 FTA에서 언론에 드러나지 않은 사안들. 청와대가 어떤 태도로 이번 협상을 준비하는지. 또 어떠한 논안을 가장 중요시 여기는지에 대해 알 수 있는 내용들. 서류 곳곳에 지한그룹의 이름도 적지 않게 등장했다. 지한전자의 사업의 중심인 반도체에서 가장 중요한 희토류 또한 이번 한중 FTA에서 논의되는 만큼, 꽤나 중요한 사안이었으니까. 사진에 나온 자료들을 전부 확인한 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다 됐어?” “응. 들어가자.” * * * “많이 먹게.” 한예린의 어머니. 즉 예비 장모님은 찜갈비를 내 앞접시에 올려주었다. 나는 활짝 웃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감사합니다.” 그걸 한 입 베어 물기 무섭게. “여보, 뭐해? 최 서방 밥그릇 비었잖아.” “아, 괜찮…….” 내가 채 말을 끝내기도 전에. “밥 많이 했으니 더 먹어요.” 장모님은 부담 갖지 말라는 투로 웃으며 내 밥그릇을 가져가 한 그릇을 더 떠다 주셨다. 어……. 굉장히 부담스럽다. 편한 자리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불편하다. 밥을 이미 두 그릇이나 먹어서 배가 터질 것 같은데 또 한 그릇이 리필되고 있다. “너무 많이 펐나?” 예. 고봉으로 퍼 주셨어요. “……아닙니다.” “먹고 남겨요.” 한예린의 아버지는 점잖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젊었던 시절에 각하를 뵌 적이 있는데, 지금 자네랑 아주 똑 닮았어.” “그렇습니까?” “그래. 아주 빼다 박았다니까. 하하하!” 식사 분위기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양가 집안에서 주선해서 한예린과 내가 만난 것이기에 서로 마음에 들 수밖에 없었으니까. “오빠. 배부르면 남겨도 된다니까.” “아니야, 먹을 수 있어. 어머님 손맛이 좋아서 반찬이 끊이지 않고 들어가네. “어머, 고마워요.” 장모님은 활짝 웃으며 물었다. “정말 복스럽게 잘 먹네. 한 그릇 더 줄까요?” 나는 화들짝 놀라 밥그릇을 붙잡아 당겼다. “아닙니다, 어머님.” “반찬 더 있는데.” “정말 괜찮습니다.” 다행히 장인어른이 지원해 주셨다. “최 서방은 나랑 술 한잔해야 돼. 그만 먹여.” “아, 그럴까요?” 안도하며 숨을 돌렸다. 한 그릇이 더 왔다면 진짜 먹다가 응급실 실려 갔을지도 모른다. 꾸역꾸역 세 그릇을 다 먹고 나서야 겨우 숟가락을 내려두었다. “잘 먹었습니다.” 예비 장모님은 흐뭇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셨다. “잘 먹어줘서 내가 다 뿌듯하네. 오랜만에 요리한 보람이 있어.” “흠흠.” 장인어른은 헛기침을 하며 나를 불렀다. “최 서방. 자네 장기 둘 줄 아나?” “예, 어렸을 적에 아버지께 몇 번 배웠습니다.” “나랑 장기 한 수 두자고.” “알겠습니다.” 나는 한 회장을 따라 서재로 들어갔다. “술은 좀 하나?” “못 마십니다.” 멈칫한 그를 향해 농담조로 덧붙였다. “없어서 못 마십니다.” 그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요즘 젊은이들 유머코드는 못 따라가겠다니까.” 그는 작은 냉장고에서 얼음 몇 개를 꺼내 온더락 잔에 넣고는 위스키를 채워 내게 건넸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회장님은 무슨. 장인어른이라 부르게. 편하게 아버님도 좋고.” “알겠습니다, 장인어른.” 장인어른은 장기판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자네가 선 하게나.” “예.” 그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고는 장기말을 움직였다. “예린이가 참 좋아하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보면 볼수록 더 좋은 사람이란 걸 알겠더라고요.” “그 아이에게 몇 번이고 선을 보게 했는데, 두 번 이상 만난 사람이 없었거든. 근데 자네랑은 처음 만난 뒤로도 제 엄마랑 이야기를 많이 했나 봐. 인상 깊었다나 뭐라나.” 문득 첫 만남이 떠올랐다. 그날 경찰서도 가고 임팩트가 있긴 했지. “그래서 참 다행이야. 내가 주선을 하긴 했어도 정략결혼이 아니라, 정말 서로 좋아하는 것 같아서.” “제가 더 감사하죠. 부족한데도 좋아해줘서.” “우리 딸은 어디가 좋았나?” “성격이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나는 웃으며 덧붙였다. “얼굴도 참 예쁘고요.” “하하하, 예린이가 어렸을 때부터 인기가 많긴 했어. 내가 지한그룹 총수만 아니었어도 연예인 시켰을 거야.” 여느 재벌 회장답지 않게 딸 바보 같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 말은 반박할 수 없었다. 실제로 한예린 외모는 어지간한 연예인들보다 훨씬 더 나으니까. 넷째 형 최지성이 미국에서 길거리 캐스팅을 하려고 했으면 말 다했지. “우리 예린이가 위에 오빠만 두 명이고 혼자 딸이라…….” 평범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사실, 그가 서재로 날 데려오기에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하거나, 정책에 대해 물어볼 줄 알았으니까. 지금 내 앞에 있는 한 회장에게선 그저 딸을 가진 아버지의 심정이 느껴졌다. 그래서 더 좋았다. 나를 청와대의 막내아들이나 정치적으로 봐주는 게 아니라, 순수하게 자신의 사위로 대한다는 게 느껴졌으니까. 단순한 기분 탓은 아니었다. 재벌가 회장이라 감각을 숨기는 건 아니었다. 나 또한 태어날 때부터 정치판에서 자라 왔기에 만약 그가 일부러 감정을 숨기려 했다면 알아봤을 테니까. 좋은 분위기 속에서 한참이나 이야기를 하며 장기를 이어갔고. 나는 조심스럽게 장기말을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장군.” “허허…….” 한 회장은 감탄하며 몸을 뒤로 기댔다. “여기서 포로 넘어올 거라고는 생각 못 했네.” 지잉지잉-.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내가 못 들은 척하려 했지만, 그는 웃으며 손짓했다. “확인하게. 바깥일하는 사람이 일보다 중요한 게 있나?” “죄송합니다.” 조금 전에 보내지 못한 자료가 더 있나? 당연히 신혜지일 거라 생각하고 휴대폰을 열었다. -보낸 이: 27 -사진. “……어.”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육성이 튀어나왔다. 미래 문자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나는 표정 관리를 하며 되물었다. “잠깐 손 좀 씻고 와도 되겠습니까?” “그렇게 하게.” 그는 살짝 입꼬리를 휘고는 장기판을 바라봤다. “나는 빠져나갈 수가 있나 생각해 보겠네.” “감사합니다.” 나는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미래 문자엔 사진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정확히는 신문의 한 면. 대문짝만 한 글귀부터 차례로 읽어 내려갔다. -속보! 한중 FTA 결렬…… 국내 전자 기업들 발등에 불 떨어져! -며칠 전부터 난항을 빚어 오던 중국과의 FTA가 결국 결렬이 되고 말았다. 중국 측은 FTA에서 가장 중요한 종목으로 논의되던 희토류 품목의 수출을 전면 금지한다고 밝혔다. 희토류는 반도체 산업에서 가장 중요한 원소로 국내 수입량의 90% 이상을 중국에서 가져오는데, 지한전자와 최일전자 등 주요 전자 기업에서는 희토류 물량 확보를 위해 다른 국가에 웃돈을 주고 사 와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는……. (중략.) 이번 한중 FTA 결렬의 가장 큰 이유는 ‘쿼드 플러스’라고 추정된다. 기존의 ‘쿼드’는 미국, 인도, 일본, 호주 4개국이 참여하는 비공식 안보회의체였으나, 최근 들어 쿼드를 국제기구로 확대하며 한국과 뉴질랜드, 베트남까지 3개국이 추가로 포함될 것으로 보이는데. 중국에서는 쿼드 플러스를 극도로 꺼려하기에 한국이 이 안보회의체에 참여하지 않길 바랐으나, 최준석 대통령은 대북 방어를 대비하여 쿼드 플러스 참가를 강행하며 이해관계가 상충된 걸로 보인다. 이번 결과는 과거 한반도에 사드(THAAD)라고 불리는 탄도미사일 대공방어시스템을 설치하려했던 때와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정치권의 결정에 따라 중국과의 무역으로 주요 품목을 들여오던 많은 기업들의 산업 발전에 적신호가 켜졌고……. (후략.) “허어…….” 전혀 예상치 못한 내용이었다. 신문에 나온 내용은 이번 한중 FTA 결과였다. 정확히는 결렬된 사유와 그 후폭풍. 국내에 있는 수많은 기업이 타격을 받겠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타격을 입은 건 반도체 산업에 중점을 두고 있는 기업들. 문제는 지한그룹의 주요 산업이 바로 반도체라는 것이다. 신문 내용을 보아하니, 다른 대기업 또한 휘청거린다기에 국내에서의 반도체 경쟁 서열은 변하지 않겠으나, 지한전자는 글로벌에서 선두 경쟁을 하는 만큼, 이건 국가적 타격으로도 이어질 가능성이 있을 터. 아무래도 문제가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자리가 자리인 만큼 더 고민할 시간이 없기에 서둘러 서재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장인어른.” “괜찮네. 앉게.” 그는 웃으며 왕 말을 우하단으로 옮겼다. “멍군일세.” “그런 수가 있었군요.” “자네 덕분일세. 내 오래 생각하지 않았으면 백기를 들었을 거야.” 그렇게 말해주는 게 감사할 따름이었다. 자리를 비운 것 때문에 미안해하지 않도록 배려해주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면 저는…….” 장기말을 옮기며 다시 게임을 이어갔으나. 아까처럼 집중은 되지 않았다. 그게 한 회장에게도 느껴졌는지. “최 서방.” 그는 위스키를 한 모금 마시며 날 바라봤다. “혹시 급한 일이 생긴 거면 말하게.” “그런 건 아닙니다만…….” “괜찮네. 나도 사업하는 사람이라 이해할 수 있어.”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장인어른.” 장기판에서 시선을 떼고 넌지시 물었다. “혹시 희토류 수입은 어디서 하십니까?” “희토류?” 한 회장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시며 답했다. “전량 중국에서 수입하지. 거리도 가깝고 가격도 싸고. 우리 지한전자뿐만 아니라, 국내 기업들은 아마 전부 중국에서 할 걸세.” 그는 흥미로운 듯 물었다. “최 서방이 반도체 산업에도 관심이 있나?” “이번 한중 FTA 때문에 말입니다.” “아, 들었네. 희토류에 관세를 많이 올린다고 하던데…… 그래도 중국에서 수입하는 게 낫다고 보는데. 우리 전략실에서도 그렇게 판단했고.” 말을 해야 할까, 말아야 할까. 이야기를 하는 와중에도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지한그룹이 타격을 받으면 앞으로의 내 정치에도 영향이 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아무리 재계 서열 1위라고 한들, 주요 사업에 지장이 생기면 내게도 바라는 게 생길 테니까. 나 또한 그들에게 도움 받은 게 있으니 외면할 수 없을 테고. 지한그룹이 단순히 내 처가라서 도와주려는 게 아니다. 국내 산업을 이끌고 있는 만큼, 지한그룹이 휘청거리면 내수경제도 꽤나 큰 타격을 입을 터. 그러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가는 건 부정할 수 없으니까.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조만간 희토류 수입과 관련해 새로운 활로를 하나 뚫어 두십시오.” 그는 흠칫 놀라며 물었다. “중국 외에?” “예. 빠르면 빠를수록 좋을 겁니다.” 순간, 그의 미간에 주름이 파였다. “이미 중국의 희토류 판매 기업과 이야기가 된 와중일 텐데…….” “자세한 건 묻지 마시고, 조금 비싸도 좋으니 아프리카나 남미 쪽으로 한 번 구해 보십시오. 중국에는 너무 연연치 않으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한 회장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겠네. 최 서방 말이니 내 빠른 시일 내로 준비해두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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