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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것도 (1) (144/200)

보이지 않는 것도 (1)2022.03.24.

“축하해.” “이런 걸로 무슨 축하까지 해.” “당연히 축하할 일이지.” 한예린은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김 실장님한테 들었어. 초선 국회의원이 처음으로 낸 법안이 만장일치 되는 건 국회의원 당선되는 것보다도 더 힘든 일이라던데.” “그렇기야 하지만, 이번 주현이 법은 워낙 특수한 경우였으니까.” “어쨌든 잘한 거지. 게다가 이번 법은 내가 봐도 속이 다 시원하더라.” 그녀는 활짝 웃으며 샴페인 잔을 들었다. 나는 못 이긴 척 건배했다. 실제로 주현이 법을 통과시킨 덕분에 6월 임시 국회에서 내 입지가 꽤나 높아지긴 했다. 국민들이 주목하는 사건과 관련된 법안에서 대한당에서 나를 타깃으로 잡고 몰아붙였다는 건, 작정하고 나를 물 먹이려고 했다는 건데. 그 법안에서 만장일치 찬성을 받았다는 건 내 능력과 힘을 동시에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까. “그래서 새로 하는 일은 좀 어때?” “그럭저럭 재밌는 것 같아.” 그녀는 본디 음악 전공을 했기에 지한그룹에서 운영하는 교향악단을 맡고 있었는데. 이번에 추가적으로 지한 그룹에서 개관하는 박물관 관장까지 맡게 되었다. “미술 쪽은 완전히 달라서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는데 큐레이터들 통해서 듣다 보니까 금방 배우게 되더라. 은근히 적성에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잘됐네, 다행이야.” 청와대 남자와 재벌가 여자의 연애라고 해서 특별할 건 없었다. 그저 세상 사는 이야기와 업무와 관련된 사담. 그렇게 식사가 마무리될 즈음. “참, 오빠.” 한예린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꺼냈다. “우리 엄마가 한 번 보고 싶다고 하던데.” 멈칫하며 물었다. “어머님께서?” “응. 뭐 부담 가지라는 건 아니고, 가볍게 식사만. 불편하면 굳이 안 와도 돼.” “아니야. 한 번 가지, 뭐.” 한예린과 가볍게 만나는 것도 아니었고. 총선 과정에서 이미 지한그룹과 각별한 사이가 된 만큼 결혼은 굳이 미룰 필요가 없었으니까. “우리 부모님도 일찍 가시길 원하시거든.” “그래?” “응. 정치인은 자고로 가정이 안정되어야 일에 더 집중할 수 있으니까.” 연애도 모자라, 사랑 가지고 감정 소모까지 하며 살아남기에 이 바닥은 너무나도 살벌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든든한 지원군이 있으면 더 좋고.” 당연히 지한그룹이라는 뒷배경이 있으면 도움이 되는 건 맞기야 하지만. 단순히 금전적인 의미를 말하는 건 아니었다. 아내라는 사람이 있어 주면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한 명 생기는 것과 같으니까. “그러면 엄마한테 이야기해서 날짜 뽑아 볼게. 아마 아빠도 같이 볼 수 있을 거야.” “그래. 날짜 알려주면 내가 맞춰 볼게.”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아버님이 좋아하시는 술 같은 거 있어? 갈 때 사 가면 좋을 것 같은데.” “글쎄. 집에 어지간한 술은 다 있거든.” 하긴. 재벌 집안이니 술뿐만이 아니라, 세상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수집할 수 있을 테니까. “빈손으로 와.” “아니야. 내가 적당한 것 하나 찾아갈게.” “그래.” 한예린은 가방을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 먹었으니 옮기자.” 나는 카운터로 향하며 지갑을 꺼냈다. “내가 살게.” “됐어.” 하지만 그녀는 손을 들어 만류했다. “남자가 무슨 돈이 있다고.” 한예린은 장난기 짙은 목소리를 내며 지갑에서 카드 하나를 꺼냈다. 그것도 아주 새까만 블랙카드. “계산이요.” 음……. 왠지 한예린에게는 얻어먹어도 미안하지 않다. 물론, 고맙기는 하고. 당연하다고 여기는 파렴치한은 아니다. “잘 먹었어.” “대신 운전은 오빠가 해.” “당연하지.” * * * 청와대 관저. 식사를 마친 대통령 내외가 가볍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이따가 고 실장이 온다고요?” “어. 잠깐 보고할 게 있다고 하네.” “급한 건가 보네.” 최준석 대통령의 말에 영부인은 그러려니 생각했다. “언제 쯤 오는데요?” “조금 전에 광화문 진입했다고 했으니 곧 올 거야.” “안 좋은 일인가?” “글쎄.” 지이잉-. 그때, 영부인의 휴대폰이 울렸다. “지훈인데?” “막내?”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신 버튼을 눌렀다. “어, 아들. 무슨 일이야?” -늦은 시간에 죄송해요, 어머니. 주무시고 계셨던 건 아니죠? “아니야. 네 아버지랑 커피 한 잔 하고 있었다.” -다름이 아니고 물어볼 게 하나 있어서요. “뭔데?” -다음 주에 지한그룹에 잠깐 인사 좀 드리러 가려고 하는데, 어떤 게 좋을까 여쭤보려고요. 어머니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걸렸다. “너도 벌써 그럴 나이가 되었구나.” -아버지께서 주선해 주신 상대니까요. “언제 가기로 했는데?” -아직 날짜는 안 나왔는데 아마 보름 뒤나 그쯤 되지 않을까 하거든요. “그러면 주말에 잠깐 들러라. 이번에 좋은 그림 하나 선물 받았거든.” -아니요. 그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되는데. “처음 볼 땐 해도 돼. 주말에 와.” -알겠어요, 어머니. 쉬세요. “그래.” 조용히 경청하고 있던 최준석 대통령은 아내가 전화를 끊기 무섭게 물었다. “지훈이가 지한그룹에 인사 간다고?” “그렇다네요. 아무래도 둘이 잘 만나고 있나 봐요.” “흠흠.” 그는 헛기침을 하며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올라가는 입꼬리는 숨길 수 없었다. “잘됐네.” “거기 가면 조만간 여기도 데려오겠죠?” “그러겠지.” “조만간 새 며느리 들일 준비를…….” 한창 대화를 하던 도중. 똑똑. 노크소리를 듣고 최준석 대통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 실장 왔나 보네.” 그는 현관으로 직접 나가 고태욱 비서실장을 맞이했다. “왔나?” “예.” “서재로 가지.” 영부인은 자신을 향해 꾸벅 인사하는 고태욱 비서실장을 향해 물었다. “커피라도 가져다 드릴까요?” “괜찮습니다.” 서재의 문을 닫고 들어온 고태욱 비서실장은 진중한 얼굴로 대통령 앞에 섰다. “각하, 아무래도 조사했던 내용이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 사적 모임 말인가?” “예. 정확한 이름은 ‘의한회’라고 하며, 대한당과 민국당 및 만세당원을 포함해 각 부서의 장차관들도 다수 포함이 된 걸로 확인되었습니다.” “정치인들뿐인가?” “아닙니다. 재계 인사들도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최준석 대통령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규모는?” “직접 확인된 명단은 50여 명 정도이나, 총원은 100명을 조금 넘을 것으로 보입니다.” “생각보다 꽤 큰데.” “예. 알아본 바에 의하면, 창설된 지 한두 해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렇겠지.” 그의 얼굴엔 불편한 심기가 드러났다. 본인이 권좌에 오른 후에는 정재계 인사가 함께 모이는 모든 사적 모임을 제재하고 있었으니까. 국민을 위한 정치가 아니라, 자신들의 뱃속을 채우기 위한 정치가 될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더 줄이기 위함이었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로 명단 정리해서 올려. 전부 숙청해야지.” “다만, 각하.” 고태욱 비서실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나 문제되는 점이 있습니다.” “뭔데? 청와대 인사라도 포함되어 있어?” “청와대 시민사회수석도 명단에 있긴 하나…….” 말을 흐린다는 건 그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는 뜻. “대체 누군데?” “막내 도련님이 포함되어 계십니다.” “……뭐?” 순간, 최준석 대통령의 동공이 흔들렸다. “지훈이 놈이 거기 있다고?” “예. 확실해 보입니다.” 고태욱 비서실장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들어간 과정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시기 상 청와대에 들어오시기 전에 의한회에 합류하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정치 입문한 직후라는 건데…….” 최준석 대통령은 진지한 얼굴로 턱을 매만졌다. “처음 들어간 건 그 녀석 의도였겠지. 애초에 그런 모임에서 지훈이를 초대하진 않았을 테니까.” “맞을 겁니다.” 당시의 최지훈은 그저 청와대의 막내아들로만 취급되었다. 그런 인물을 의한회에서 초대하기는커녕, 오히려 존재가 알려지면 껄끄러워질 거라 생각했을 테니까. “의한회, 어떻게 처리할까요?” 고태욱 비서실장도 최준석 대통령이 어떤 명령을 내릴지 가늠이 가질 않았다. 그의 정치 철학 상, 의한회는 국내에서 허용될 수 없는 모임이다. 허나, 의한회를 건드리면 분명 최지훈의 발목도 잡힐 터. “쿨럭!” 입을 가리며 기침을 한 최준석 대통령은 거친 숨을 내뱉고는 고개를 들었다. “지금 의한회의 존재를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국정원 요원들 포함하여 총 10명 내외입니다.” “청와대로 보고한 걸 아는 사람은?” “국정원장 한 명뿐입니다. 그도 제게 직접 전달했고요.” “…….” 최준석 대통령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는 몇 번이고 주먹을 쥐었다 피길 반복했다. 그리고 한참이나 고민한 뒤에야 조심스레 운을 뗐다. “고 실장.” “예, 각하.” “모른 척할 수 있겠나?” “각하의 명령이라면, 물론입니다.” “고맙네.” “아닙니다.” 고태욱 비서실장은 대통령이 민망하지 않도록 자연스레 화제를 돌렸다. “이건 원래 내일 보고 드리려고 했던 사안입니다만, 온 김에 보고 드리겠습니다. FTA 관련해서 정무수석이 산업통상자원부 장관과 접촉했고 지시하신 대로 이행했다고 합니다.” “지훈이 귀에는 들어갔고?” “아직까진 정무비서관에게 전달되지 않았습니다.” “슬쩍 정보 흘려줘. 막내한테 들어가게.” 고태욱 비서실장의 조사를 통해 신혜지가 최지훈과 내통하고 있는 걸 최준석 대통령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최준석 대통령은 이런 식으로 알게 모르게 막내를 밀어주고 있었다. “그래. 늦은 시간에 고생 많았어.” “쉬십시오.” 고태욱 비서실장은 꾸벅 인사를 하며 돌아섰다. “나오지 마십시오.” 그는 일어나려는 대통령을 만류하며 관저를 빠져나왔다. “후우우.” 고태욱 비서실장은 숨을 깊게 내뱉으며 차에 올랐다. 7월. 어느 새 날씨는 부쩍 더워졌고, 밤에도 습도가 꽤나 높게 느껴졌다. ‘역시…….’ 오늘 대화로서 고태욱 비서실장도 확신할 수 있었다. 최준석 대통령은 머지않아 본격적으로 후계 구도 정리를 시작하리라는 것. 수십 년간 지켜온 정치 철학을 어겨가면서도 의한회를 정리하지 않는다는 건, 최지훈을 자신의 자리에 앉히려고 한다는 것, 그 외에는 설명되지 않으니까. 앞으로 고태욱 비서실장 자신의 역할이 굉장히 중요해지리라는 게 분명했다. ‘당신께서 물러날 의지가 확고하실 때까지 정정하시면 좋겠는데…….’ 대통령이 건강 혹은 타의로 권좌에서 내려오게 된다면, 후계 구도가 난잡해질 테니까. 그는 휴대폰을 들어 대통령 주치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선생님. 접니다. 드릴 말씀이 있어서 그러는데…….” * * * 보름 뒤. 청담동의 초호화 주택 입구. “어, 혜지 씨. 그러면 FTA 관련 문서도 체크할 수 있나?” -예. 방금 정무비서관 차 끌고 퇴근했습니다. 5분 내로 확인 가능할 것 같은데, 찍어서 문자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그래. 혹시 모르니 주변에 다른 사람 조심하고.” -알겠습니다. 통화를 마무리하고 옷매무새를 만지고 있을 때, 저 멀리서 한예린이 다가왔다. “오빠, 통화 멀었어?” “다 끝났어.” “얼른 들어가자.” “그래.” 나는 호흡을 가다듬고 거대한 대문을 열고 지한그룹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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