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물어뜯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4) (137/200)
  • 물어뜯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4)2022.03.17.

    똑똑. “의원님.” 강선우 보좌관이 들어왔다. “지금 출발하셔야 합니다.” “그래.” 나는 휴대폰을 넣어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약속시간까지는 이제 겨우 5분. 구태양을 비롯한 의원들과 준비했던 이야기를 권주혁 의원에게 그대로 전할 수는 없었다. 1년 뒤건, 어쨌건 간에 백태성 의원에게 새어나간다는 건, 계획의 실패를 뜻하니까. 그렇다고 더 생각할 만한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이제 와서 권주혁 의원과의 미팅을 취소하는 게 더 의심쩍어 보일 테니까.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권주혁 의원실로 향하면서 열심히 짱구를 굴렸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자꾸만 1년이라는 텀이 마음에 걸렸다. 보낸 이는 분명 27. 동영상 속 내용이 발생하는 시점은 올해가 아닌, 내년이다. 지금 당장은 내가 권주혁 의원에게 제안을 하면,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결국 오래지 않아 백태성 의원에게 일러바치고 우리의 뒤통수를 친다는 뜻이다. 애초에 권주혁 의원이 야망을 품지 않고 우리를 배신하려했다면, 이 제안을 받은 즉시 백태성에게 갔을 것이다. 제안을 받고 짧게 고민할 수는 있다고 하나, 그렇기에 1년은 너무 긴 세월이다. 시기를 보면, 아마도 처음엔 우리의 손을 잡았다가 시간이 흐르며 무언가 일이 꼬여서 권주혁이 위기감을 느끼고 판을 엎어버린 것이겠지. 분명 더 생각하면, 다른 대안이 나올 것 같았지만 생각할 시간이 부족했다. 이미 약속시간이 되었고 나는 약속 장소에 도착해버렸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권주혁 의원님 만나러왔습니다.” 똑똑. 비서는 집무실을 노크하며 말했다. “최지훈 의원님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문을 열고 들어가자, 권주혁 의원은 반가운 얼굴로 나를 반겼다. “최 의원, 왔나?” “안녕하십니까, 의원님.” “그래, 그래. 앉게.” “예.” 그는 반색하며 나를 응대했다. “밥은 먹었고?” “네. 의원님은 식사하셨습니까?” “오늘 의원회관에서 선짓국이 나왔더라고. 맛있더만. 다음에 나오면 꼭 먹어보게.” “알겠습니다.” 권주혁 의원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로 왔나?” “특별한 건 아닙니다.” 지금 확신할 수 있는 건, 권주혁 의원을 잘못 끌어들였다가는 전부 다 죽는다는 것뿐. 적당한 이야기로 둘러대야 한다. “얼마 전, 총 회의에서 있었던 건 때문에 말씀 좀 드리고 싶어서요.” 그는 무슨 말을 꺼내려는 줄 알았다는 듯 씨익 미소를 지었다. “한유라 때문인가?” “예, 맞습니다.” 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은 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법사위에 한유라만큼은 넣을 수가 없습니다.” “그럴 줄 알았네.” 권주혁 의원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자네 마음도 충분히 이해는 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치현 의원실에서 함께 일하던 사이였으니까.” “경쟁심이라거나 그에 대한 질투심도 아닙니다. 그저 제가 원하는 건.” 그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권선징악입니다. 이치현 의원을 지키진 못했지만, 적어도 우리 민국당에서 한유라가 초선부터 법사위 들어가서 떵떵거리는 걸 내버려두면 안 되는 거잖습니까?” “맞는 말이야. 다만, 백태성 대표님께서 좋게 넘어가고 싶어 하시니…….” “그래서 의원님을 찾아온 겁니다.” 나는 권주혁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의원님이 백태성 의원님과 친하시잖습니까?” “대표님과 친하긴 하지.” “잘 이야기 좀 해 주십시오.” “글쎄. 요즘은 또 잘 모르겠더라고. 내가 말한다고 들어주실지 모르겠어.” 그는 코를 찡그렸다. 예상치도 못하게 백태성 의원에 대한 생각을 슬쩍 떠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능청스레 권주혁에게 물었다. “혹시 백태성 의원님과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음…….” 그는 말을 할까 말까 고민하다가 발을 빼고는. “뭐 특별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야.” 슬쩍 되물었다. “그것보다 최 의원은 백 대표님 어떻게 생각하나? 당연히 좋으려나? 자네 공천도 책임지고 밀어줬으니…….” 허나 말과 달리, 눈빛을 보면 무언가 입이 근질거리는 게 있는 모양. “종로에 공천해 주신 건 큰 결심이었을 테고, 그 사안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이럴 땐 오히려 내가 선수를 쳐야 한다. “다만.” 나는 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요즘은 왠지 저를 견제하시는 듯한 느낌이 들더라고요.” “자네도 그런가?” 순간, 권주혁 의원은 눈썹을 들썩였다. “제가 근본이 대한당 출신이라 그런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의원님도 그러십니까?” “흠흠.” 그는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적당하게 말을 숨겼다. “내가 느끼기엔 백태성 의원님이 예전과 조금 달라지신 것 같더라고. 나이가 드셔서 그런지 당 내에서 조금 위세가 커지려고 하면 자꾸 짓누르려고 하는 경향도 있으신 것 같고 말이야.” “당 운영에는 안 좋은 거 아닙니까?” 권주혁 의원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지그시 바라보며 말했다. “최 의원.” “예.” “이 대화는 자네와 나만의 비밀일세.” 됐다. 이 인간도 분명 말하고 싶은 게 산더미인데, 백태성 의원의 측근이라는 이미지 때문에 어디 가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하고 다닌 모양. 그나마 내가 지난 회의에서 백태성에게 날을 세운 덕분에 은연중에 동지애가 생긴 것 같았다. “그럼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요즘 들어 자꾸만 나에게 원내대표에 만족하냐고 물어보시더라고.” “그거 조금 위험한 거 아닙니까?” “그렇지. 혹시 당대표를 욕심내지 않느냐고 견제하는 거거든.” 그는 블라인드가 내려져 있는 걸 확인하고는 다시금 말을 이었다. “난 당연히 욕심 없다고 했지.” “실제로도 그러십니까?” 내 물음에 권주혁 의원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 바닥에 있는 의원들 중 권력을 욕심내지 않는 사람도 있나?” “없을 리가 없죠.” “그래. 당연히 욕심나지. 하지만 그걸 드러내면 당대표님이 뭐라고 생각하시겠나?” “하긴, 어쩔 수 없죠.” “백태성 그 노인네가 워낙 뿌려놓은 게 많으니 슬슬 걱정되는 게 많아지는가 봐.” 뱉고 나서 실수했다고 생각했는지 움찔하며 말을 주워 담았다. “말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감정이 격해졌구먼. 미안하네.” “아닙니다. 의원님 심정 충분히 이해합니다.” 임규민 의원의 촉은 맞았다. 권주혁은 백태성에 대한 억하심정을 품고 있고. 이는 분명 그를 밀어내기에 최적화된 카드라는 뜻. 구태양 의원 측에서 단순하게 결정한 인물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이 인간과 손을 잡으면, 후일 분명 뒤통수를 친다는 것. 그렇기에 지금 당장은 손익관계가 맞아떨어진다고 한들, 손을 잡을 수는 없었다. 언젠간 내 뒤통수를 칠 인물이니까. 하지만 이걸 이용할 수만 있다면 분명 좋은 기회가 올 수도 있을 텐데……. 잠깐만. 순간, 머릿속에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하나 스쳐지나갔다. 어차피 내 뒤통수를 칠 인물이라면……. 내가 치지 말라는 법은 없잖아? 나를 따르는 정직한 인물이라면 몰라도, 위험군을 쳐내는 건 오히려 나를 위한 일이니까. “의원님.” “응?” “진지하게 하나 여쭙겠습니다.” “말하게.” “당대표로 올라가시지 않겠습니까?” “……뭐?” 순간, 그의 동공이 흔들렸다. 야욕이 넘쳐나고 있다는 증거. “저와 함께 하는 의원들이 있습니다.” 스읍. 그는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몇 명이나 있는데?” “민국당 의석의 1/3 조금 못 됩니다.” “나를 따르는 이들과 중복되지 않지?” “예.” “정확히 몇 명인데?” “25명입니다.” “내가 직접 움직일 수 있는 게 15명 정도 되니…….” 그러면 총합이 40명. 87명 중 40명이다. 4명. “단 4명만 데려오면 판을 뒤집을 수 있어.” 당 대표 선거에선 과반수만 넘으면 되는 법이니까. “최 의원도 25명 전부 데려올 수 있나?” “가능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만나고 있으면 안 되네.” 그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백태성 의원의 눈에 띄면 오히려 위험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다시 연락드리죠.” “그래.”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 * * “어떻게 됐나?” 구태양 의원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잘 이야기가 됐나?” “의원님.” 나는 담배 하나를 꺼내 물며 말했다. “잘못하면 저희 모두 X될 뻔했습니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겐가?” 그는 사색이 되며 물었다. “혹시 백태성 의원에게 새어나간 건가?” “차근차근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담뱃불을 붙이며 말을 시작했다. “권주혁 의원이 백태성에게 불만을 품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허나, 그게 두텁지 못해요. 지금 당장은 그와 손을 잡을지 몰라도, 오래지 않아 그 연결고리가 흔들릴 겁니다.” “그게 보이던가?” “확실합니다.” “허어…….” 그는 답답한 듯 이마를 짚었다. “그러면 자네는 만나서 어떤 대화를 한 건가? 그쪽에서 괜히 의심을 살 수 있을 텐데.” “저는 준비했던 대로 이야기했습니다.” “……뭐?” 구태양 의원은 아연실색하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해 놓고 그대로 이행하면 우리 모두 엿 먹이겠다는 소리 아닌가?” “의원님.” 나는 냉정하게 입을 열었다. “처음 말했던 대로 계획은 제가 짜겠습니다.” 그는 내게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미간을 구겼다. “그러면 계획을 다시 짜야지. 이미 모두 들통 난 상황에서 뭐 어쩌겠다는 거야? 그보다 다 말했으면 바꿀 수도 없잖나.” “아니요. 얼마든지 수정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하려고?” 그는 답답하다는 듯, 한 걸음 다가왔다. “설명을 좀 해 보게.” “똑같이 가되, 상황을 뒤집으면 됩니다.” “무슨 말이야? 쉽게 말해주게.” 나는 거칠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뒤통수를 맞는 게 아니라, 치는 방향으로요.” 구태양 의원은 아직도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쉽게 말하면, 의원님을 포함해 다른 분들도 전부 초기 계획대로 진행하시면 됩니다.” “권주혁 의원을 포섭하고 그를 당 대표로 올리는 방향으로 말인가?” “예, 맞습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권주혁 의원은 본인을 따르는 이들에게 언질을 주겠죠. 본인이 곧 백태성을 꺾을 것이라는 신호를 말입니다.” “그렇겠지. 하지만 언젠간 그 인간은 뒤통수를 친다면서? 언제든 백태성 의원의 귀에 들어가면 말짱 도루묵 아닌가?” “그 전에 저희가 먼저 뒤통수를 치는 겁니다.” “……뭐?” “백태성에게 직접 찾아가는 겁니다. 권주혁 본인이 당대표로 올라가려는 야욕을 드러내고 우리에게 손을 뻗었다고.” “그건 우리가 제안한 것이잖나?” “백태성 의원이 그걸 알 수 있겠습니까?” “……!” 순간 그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결론적으로 당대표에 오르려는 사람은 권주혁 의원입니다. 저희가 올리려고 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구태양 의원은 차분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당연히 권주혁이 욕심을 냈다고 생각하겠지.” “맞습니다. 저희에게 이득이 될 일도 없는데 움직일 리가 없죠.” 이제야 이해한 그는 흥분되는 듯 홍조를 띠며 물었다. “내가 뭘 하면 되겠나?” “저희 측의 다른 이들에게 권주혁 의원에게 접근하라고 하십시오. 당대표로 출마하면 그를 밀겠다는 소리를 해서 은연중에 그의 어깨가 올라가게 만드는 겁니다.” “그리고 당대표 선거 직전에 터뜨리는 건가?” “맞습니다. 그러면 백태성 의원은 확실히 저희 편이 될 거고.” “원내대표 자리도 공석이 되는 거구먼.” “맞습니다.” 나는 담배 연기를 깊게 내뱉으며 말했다. “그 보상으로 저희가 그 원내대표 자리를 차지할 겁니다.” 그게 민국당을 장악하는 첫 걸음이 될 터. 이렇게 한 걸음 한 걸음 권좌로 다가가는 것이다. 구태양 의원은 흡족스럽다는 듯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역시 최 의원이야. 보통내기가 아니구먼.” “감사합니다.” “그러면 자네가 말한 대로 진행하겠네.” “예. 이번 일은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속전속결로 부탁드릴게요.” “그래. 걱정 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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