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어뜯지 않으면 잡아먹히는 (2)2022.03.15.
“내가 청와대까지 보필하겠네.” 그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권에 한 번 도전해보지 않겠나?” 꿀꺽. 침이 목울대를 넘어갔다. 대권. 민국당 후보로서 대선에 참여해 권좌에 오르라는 소리다. 구미가 당기지 않을 수 없었다. 권좌에 오르는 것이야말로, 나의 최종 목표였으니까. 달콤한 제안이다. 허나 간단한 생각으로 받을 만한 제안은 아니었기에. 거절하는 대신. “우리 둘이서는 불가능합니다.”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민국당은 이미 백태성 의원님이 휘어잡고 계십니다. 단 둘이 반기를 든다고 해서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닌 건 아시잖습니까.” “우리 둘이 아닐세.” 구태양 의원은 눈을 번뜩이며 내게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나와 함께하는 20여 명의 의원들이 더 있네.” “…….” 눈빛을 보아하니, 거짓은 아닌 모양. 백태성 의원의 방식에 불만이 있다는 걸 모르진 않았지만, 벌써 이렇게 은밀하니 무리를 지었을 줄은 몰랐다. 다만, 여기서 가장 큰 핵심은 따로 있었다. 문제는 이게 함정인지, 아닌지 알 수 없다는 사실. 쉽게 그가 내민 손을 잡을 수 없었다. “전 이제 겨우 스물여섯입니다. 대권을 쥐기엔 너무 멀어요.” “1, 2년 뒤를 보자는 이야기가 아닐세. 어차피 개편으로 인해 만 35세 이상이면 대선에 출마할 수 있네.” “그래도 10년입니다.” “그쯤이면, 최준석 대통령도 슬슬 휴식기에 들어서시지 않겠나?” 말을 받아치는 걸 보면, 구태양 의원은 결코 가벼운 생각으로 내게 접근한 게 아니었다. 민국당의 방식과 현재로서 방향성을 지우기 위해서 오래도록 생각하고 정권 탈환을 목표로 최적화된 목표물인 내게 접촉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아무래도 오늘 회의에서 내게 맞장구를 친 것부터 이 자리를 위한 발판이라고 봐도 무방할 터. “각하께서 최소 몇 년은 더 하실 거야. 그리고 그 바통을 자네가 받는 거지.” “가능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대한민국 국민들의 심리를 기반으로 아주 객관적으로 판단한 근거야.” 틀린 말은 아니다. 정말 권력이 욕심났으면, 본인들이 직접 나섰을 테니까. 자고로 정치를 하는 사람 중 청와대를 욕심내지 않는 인물은 없다. 그러한 야망을 꾹 눌러둔 채 내게 접근해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건 보통 결정이 아니다. 현 상황에서 시민들은 새로운 대통령을 원하지 않는다. 최준석 대통령에게 만족했고. 또 그럴 만한 사람을 찾고 있으니까. “단기적으로 권좌를 탈환할 생각이었다면, 자네에게 접근하지 않았을 걸세.” 그러한 심리를 반영해 대선에서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을 꼽자면, 민국당에선 나뿐이라는 의미지. “천천히 준비하자는 뜻이네. 갑작스레 대통령으로 추대되는 게 아니라, 국민들에게 서서히 신뢰를 얻어 기반을 마련하여 기회가 왔을 때 치고 올라가자는 말이라네.” 이론은 나쁘지 않다. 충분히 설득력 있고. 이렇게 생각할 만한 근거도, 합리적인 이유도 있다. 다만, 문제는. 이들을 신뢰할 수 있냐는 것이다. 합리적인 것과 이들을 믿을 수 있는 건 별개의 영역이니까. 구태양 의원이 민국당 내에서도 굉장히 강직한 인물 중 하나로 손꼽힌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고. 이치현 前 의원과 가깝게 지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믿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게 그들과 손을 잡을 합리적인 이유가 되지는 못한다. 진짜 속내를 알아봐야 한다. “왜 하필 저입니까?” “아까도 말하지 않았나? 어차피 이대로는 다들 민국당이 영원히 집권하지 못한다는 건 개나 소나 다 아는 사실이야.” “…….” “종로에서 자네가 승리하는 걸 보고 느꼈네. 대선에서 민국당을 달고 승리할 수 있는 인물은 최지훈 한 명밖에 없다는 걸.” 맞는 말이다. 지난 대선에서는 성문종에게마저 밀렸으니, 더 말할 것도 없겠지. 나는 차분하게 심정을 가라앉히고 물었다. “함께한다는 의원들이 누군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그건 안 되지.” 구태양 의원은 단호하게 말했다. “첫 제안부터 밑천 다 까발릴 순 없잖나.” “…….” “이해해 주게. 만에 하나 자네가 거절한다면, 최소한 나 혼자 죽어야 되니까.” 오히려 의원들의 목록에 대해 말했으면 의심했을 것이다. 그래서 더욱 결정하기가 어려웠다. “생각할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얼마나?” 구태양 의원은 걱정하는 내 심정을 이해한다는 듯하면서도 단호하게 말했다. “오래 기다릴 순 없네.” “만에 하나 거절하더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외부엔 절대 새어나가지 않게 하겠습니다.” “부탁하겠네.” “일주일 내로 답변 드리겠습니다.” “고맙네.”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럼 또 보자고.” 구태양 의원은 담배를 툭 던져 꽁초더미에 버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시야에서 사라졌다. 나쁘지 않은 기회다. 백태성 의원을 밀어버리고 민국당을 장악한다면, 순식간에 대권 후보로 치고 나갈 수 있는 기회니까. “후우우.” 나는 담배를 하나 더 꺼내 입에 물었다. 머리가 복잡해졌다. 애초에 내가 민국당을 택한 이유가 바로 지금 상황과 이어졌으니까. 민국당에 입당한 건 단순히 종로에서 공천받기 위해서도, 이치현 의원을 통해 정치에 입성해서도 아니다. ‘권좌’에 오르기 위해서다. 사실, 당연한 선택이었다. 이미 경쟁 구도에서 제외된 최지곤을 제외하고도. 첫째와 둘째 형은 오래 전부터 대한당을 장악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대한당 사람들과 가까워지고. 야당을 탄압하기에 바빴으니까. 그러면 결국 둘은 대한당에서 승부를 봐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두 형제가 정춘식에게 패배했던 서울시장 선거에서 보면 알 수 있지만, 둘은 융화하기는커녕, 화합도 불가능하다. 평생 물어뜯을 사이라는 뜻이지. 그나마 아버지가 살아계시는 지금은 ‘하나의 대한당’이라는 명목 하에 분열되지 않고 버티고 있으나. 분명한 건 첫째 형을 따르는 계파와 둘째 형을 따르는 이들로 쪼개져 있다는 사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필시 지금과는 상황이 달라질 것이다. 첫째와 둘째가 손잡고 대통령직을 나눠먹을 리는 없으니. 분열되는 건 시간문제라는 뜻이지. 한 쪽으로 기울어질 순 있겠으나, 결코 흡수되지는 않을 터. 그러면 결국 어부지리로 민국당이 제1당으로 올라설 수 있는 환경이 된다. 의석 수 1위. 이는 정치에서 어마어마한 힘을 갖게 된다. 대선에서도 마찬가지. 오래도록 집권해온 대한당이 분열된 상황에서. 아버지의 정통성만 유지할 수 있다면, 민국당을 달고도 내가 충분히 대권을 거머쥘 수 있을 터. 다만, 이 모든 건 민국당을 내 손에 넣을 수 있을 때의 이야기다. 그렇기에 구태양 의원의 제안은 마치……. 벌침. 그래, 벌침과 같다. 가장 큰 문제는 이게 꿀벌의 벌침인지, 말벌의 벌침인지 모른다는 것이지. 전자라면 잠깐 흔들리더라도 후일 좋아지겠지만. 후자의 경우엔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구태양 의원과 손을 잡는 건, 이제부터 목숨 걸고 덤비겠다는 뜻이다. 미래문자는 아직까지 내게 아무런 정보를 주지 않고 있다. 구태양의 제안이 진심인지, 아니면 나를 함정에 빠뜨리려는 건지는 직접 알아봐야 한다는 소리다.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어, 지현 씨. 나야.” 수신인은 마돈나. “구태양 의원에 대해 알아 봐. 주변 인물 중심으로 최대한 빠르게.” * * * 일주일이 지나고 구태양 의원과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 당일. 여전히 새로운 미래 문자는 없었다. “따로 일을 꾸미거나 계획 중인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돈나를 통해 알아본 정보는 ‘의심되는 바는 없다.’였다. 허나, 의심되는 게 없다는 게 믿을 수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건 아니었다. 조사 기간이 긴 것도 아니고, 고작 일주일밖에 되지 않았으니까. “손잡으실 생각입니까?” “우선은 잡아야지.” 지금은 그 제안을 걷어찰 이유가 없으니까.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만에 하나 함정이라면, 백태성 의원에게 제대로 찍히게 될 텐데요.” 그렇게 되면 권좌는커녕, 다음 총선도 보장할 수 없다. “그러니 보험을 들어야지.” 구태양 의원과 손을 잡는다고 해서 100% 믿을 생각은 없었다. 그에 대한 신뢰감이 커지기 전까지는 최대한 안정지향적으로 갈 생각이었으니까. “지현 씨.” “네, 의원님.” “성능 좋은 녹음기 하나 구해 줘. 눈에 띄지 않는 걸로.” “넥타이핀 형식이면 괜찮겠습니까?” “오늘 내로 가능하겠어?” “예. 충분합니다. 2시간이면 퀵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빠르게 구해 줘. 그리고 오늘 저녁부터 내가 파일 하나 전해 줄 거야. 전부 일지로 작성해 둬.” “알겠습니다.” 오늘부터 그들과 나누는 모든 대화는 녹음하고 기록으로 남겨둘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정치에서 기록을 남기는 건, 내 발목에 족쇄를 채우는 일이다. 허나, 구태양 의원과 그 일행들에 대한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그렇게 해야만 한다. 만에 하나 그들이 뒤통수를 쳤을 때를 대비해야만 하니까. 누군가의 배신으로 인하여 계획이 새어나가서 백태성 의원에게 들통이 나면, 당에 반역하는 이들에 대한 증거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변명이라도 할 수 있을 테지. 물론, 구태양 의원과 그들의 일행에 대한 신뢰가 생기면 모두 파기할 생각이다. 마돈나와 단둘이서 작업한 건, 얼마든 증거가 남지 않게 소멸시킬 수 있으니까. * * * 한강변의 이적이 드문 주차장. 내 차의 조수석엔 구태양 의원이 타고 있었다. “생각해 봤나?” 그의 물음에 나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한 번 같이 가 보시죠.” 구태양 의원은 씨익 입꼬리를 비틀었다. “잘 생각했네. 쉽지 않을 테지만, 미래를 보면 충분히 뒤집을 만한 판이야.” “단.” 나는 정면을 보며 딱딱하게 입을 열었다. “조건이 있습니다.” 그는 흠칫하며 말했다. “말하게.” “절 컨트롤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가 불쾌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뜻인가? 우리가 가스라이팅이라도 할 것 같단 말인가?” “그런 뜻은 아닙니다.” 나는 그의 얼굴을 마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모든 계획을 제가 짜겠다는 말입니다.” “…….” “제가 짜고, 함께 움직이는 겁니다. 그렇다고 의원님을 포함한 다른 분들을 수족으로 쓸 생각은 아닙니다. 그저 최소한의 안전장치를 걸고 움직이자는 거죠.” 그는 이해한다는 듯 턱을 쓸어 만졌다. 허나, 내키지는 않는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해서 100% 들어줄 수는 없네.” “알고 있습니다. 다만, 큰 틀은 제 선에서 짜겠습니다.” “꼭 그렇게 해야겠나?” 구태양 의원은 걱정된다는 듯 되물었다. “어차피 우리 쪽과 합치면 함께 머리를 모아서 움직여야 할 텐데.” “최대한 반영은 해드리죠.”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내 그렇게 노력해보도록 하지.” “노력이 아니라, 확답을 해 주셔야 합니다.” “……알겠네.” 초장에 확실히 서열 정리를 해두어야 한다. “우선, 하나는 확고히 해두고 가야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이미 모인 집단에 내가 참가하는 것이라고 한들. 나는 수장이 될 조건으로 손을 잡는 것이었으니까. “그저 저를 꼭두각시로 내세울 것이라면, 미리 그만두십시오.” 사납게 눈을 치켜뜨며 말했다. “만약 그럴 기미가 보인다면, 싹 다 불질러버리고 대한당으로 넘어갈 테니까.” 숨이 막힐 듯 무겁게 공기가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하하하하!” 구태양 의원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자네의 그 살벌한 눈빛, 정말 마음에 드네.” 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종로에서 공천까지 해준 민국당까지 저버릴 각오라니, 결단력은 각하 못지않아.” 그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가슴을 탕탕 쳤다. “그럴 리는 없으니 마음 놓게. 어차피 모인 우리 24명 전부 민국당의 본모습을 되찾기 위해서. 그리고 야당으로서의 진짜 정치를 위해서 모인 것이니까.” 구태양 의원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한 번 끝까지 가보자고.” 나는 그의 손을 맞잡았다. “높은 곳으로 가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