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정리 (6)2022.03.13.
“정확히는 제가 아니라, 저희 아버지가 의원님한테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아버님이요?” “예.” 천천히 기억을 되짚었다. 송하연의 아버지라……. 송 씨. 이 여자의 아버지뻘 되는 나이의 송 씨 남성. 내가 도움을 준 사람이 적지 않았으나, 딱히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내 표정을 보고 송하연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4년 전, 당고개역 기억나세요?” “……아!” 뇌리에 한 남자가 스쳐지나갔다. “혹시 그 기관사님?” “네. 그분이 제 아버지세요.” 기억났다. 강성철 의원의 계략에 의해 돈을 받고 지하철 선로에 떨어져 자살을 시도했던 인물. 내가 아슬아슬하게 몸을 던져 살렸었지. 이제 보니, 눈매가 조금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그런데 제 기억에는 송 씨가 아니셨던 것 같은데.” 박호선이었나. 정확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박 씨였던 걸로 아는데. “저 연예인이잖아요.” 송하연은 부드럽게 눈꼬리를 휘었다. “가명이에요.” “……아!” “본명은 박하연인데, 연예계에 겹치는 이름이 몇 분 계셔서 성만 바꿨어요.” 예상치도 못했다. 과거의 일이 이렇게 이어질 줄이야. 새삼스럽지만, 세상 참 좁다니까. 그녀는 수줍게 입을 열었다. “실은, 의원님 덕분에 제가 연예인이 된 거거든요.” “……저 때문에요?” “네.” 송하연은 허심탄회하게 설명했다. “아버지가 다치시기 전까지는 저희 집이 가난하다는 것만 알았지, 얼마나 심각한지는 몰랐거든요. 그런데 그 사건 덕분에 대충 상황을 알게 되면서 아버지한테 빚이 많다는 것도 알았어요.” 그때 빚만 3억이 넘었지, 아마. 강성철 의원은 처음에 5억을 제시했지만, 기관사가 죽지 않았다는 명목으로 돈을 훨씬 줄여서 넘겼던 걸로 기억한다. 결국 또 빚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지. “그래서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고등학교에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길거리 캐스팅을 받았거든요. 그래서 한 푼이라도 벌어서 집안에 도움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데뷔를 했는데, 운이 좋았는지 반응이 나쁘지 않아서 계속 배우 일을 하고 있는 거고요.” 단순히 운이 좋은 수준이 아니었다. 넷째 형 최지성에게 듣기로는 현재 대한민국 대세 Top 4 여배우 중 하나니까. “잘됐네요.” “의원님 아니었으면 애초에 돈 벌고 싶다는 생각도 안 했을 테고, 배우가 되려고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래서 언젠간 보답하고 싶었어요.” “그러면 그때 그 상황에서 도망가지 않은 이유가…….” “네. 맞아요. 의원님도 목숨 걸고 저희 아버지를 지켜주셨잖아요.” 그녀는 생긋 미소를 지었다. 나는 미온수를 한 모금 마시며 조심스레 물었다. “아버님은 잘 지내시죠?” “네. 이제는 기관사 일도 은퇴하시라고 했는데, 일하는 게 좋다고 계속 남아 계세요. 대신 야근이나 추가 근무는 안 하시고요.” “잘됐네요. 안부 좀 꼭 전해 주세요.” “그럴게요.” 송하연은 테이블을 바라보며 말했다. “얼른 드세요. 음식 식겠다.” “네.” 그녀는 크림 새우 한 마리를 집어 내 앞접시에 올려주었다. “많이 드세요. 오늘은 제가 쏘는 자리니까.” “감사합니다.” 나는 코를 찡긋하며 말했다. “밥은 제가 살게요. 김영란 법 때문에 어디서 얻어먹으면 안 되거든요.” 오히려 사는 게 민폐가 될 수 있다는 걸 깨달은 그녀는 탄식을 내뱉었다. “……아. 죄송해요.” “아닙니다.”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식사를 시작한 뒤, 송하연은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그…… 의원님.” “네?” “다음에 또 연락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녀는 오해하지 말라는 듯 덧붙였다. “사심이 있는 건 아니고요. 제가 의원님에 대해 알아보다 보니 정책이나 법안 쪽에 관심이 생겨서…….” 송하연은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저도 주소지가 종로구거든요. 이번에 의원님 뽑았어요.” “하하하, 감사한 유권자셨네요. 편하게 연락주세요.” 나는 명함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제 직통 전화입니다.” “저는 명함이 없어서…… 이따가 문자 하나 넣어둘게요.” “그래요. 식사 하시죠.” * * * 똑똑. “들어오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문이 벌컥 열렸다. 하얀 가운을 입고 앉아 있던 대통령 주치의는 움찔하며 고개를 들었다. “……고 실장님?” 고태욱 비서실장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바쁘신데 연락도 없이 불쑥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오늘은 따로 일정도 없어서…….” 그는 어정쩡한 자세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앉으시죠.” “예.” 고태욱의 얼굴은 잿빛이 되어 있었다. 어지간해서는 표정을 드러내지 않는 인물이었기에 주치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있습니까?” “얼마 전에 각하 건강검진 결과에서 이상 없었던 게 맞습니까?” 주치의의 등어리엔 식은땀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그러나 말투를 보아하면, 무언가 알고 있는 게 아니라, 걱정되어서 묻는 건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그는 태연한 척 연기하며 차트를 꺼내 펼쳤다. “예. 일단 검사에서는 큰 문제가 없었습니다. 여기 보시면…….” 허나, 고태욱 비서실장이 의학 용어를 쉽게 알아볼 수 있지는 않았기에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일단 건강상에 문제는 없습니다. 이 부분처럼 간혹 수치가 평균보다 살짝 높거나 낮은 것도 있지만, 노화에 의한 자연스러운 일이다보니 걱정하실 부분은 아니고요.” “하지만 요즘 따라 각하 안색이 너무 좋지 않습니다.” “그렇습니까?” “예. 기침이 훨씬 심해지셨어요.” “그건 담배 때문일 겁니다. 폐가 조금 안 좋으시긴 한데, 약물 복용하면 충분히 나아질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잔기침 수준이 아닙니다. 꽤 심각해 보여서요.” 고태욱 비서실장은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원래 애연가셨는데, 이 정도로 기침을 오래 달고 계신 적이 없었거든요.” “이번 처방해 드린 약이 열흘치 정도 남았으니 복용 기간이 끝나고 한 번 더 체크해보겠습니다만…… 각하께서 병동에 오시는 걸 안 좋아하셔서요.” “제가 책임지고 모셔 오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주치의는 차트를 덮으며 물었다. “그게 전부인가요?” “기침만이 문제는 아닙니다.” 고태욱 비서실장은 심각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요즘 상당히 안색이 안 좋으세요. 살짝 누런빛이 나시는 게 황달기가 있으신 것 같기도 하고 살도 꽤 빠지셨고요.” “아마 감기에 시달리셔서 그럴 겁니다.” 주치의는 아무렇지 않은 듯 침을 꿀꺽 삼켰다. “기침을 달고 다니면 원래 전체적으로 건강이 안 좋아지거든요.” “황달기도 그렇습니까?” 그는 잠깐 고민하더니 안경을 올려 쓰며 되물었다. “최근 들어 각하께서 산책을 자주 하시지 않습니까?” “예전에 비해서는 더 많이 청와대 주변을 거니시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아마 황달이라기보다는 햇빛에 조금 탄 거라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아, 그런가요?” “예. 원체 햇빛을 잘 안 보시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피부가 예민해져서 그렇게 반응하는 걸 수도 있습니다.” “하긴…… 워낙 국민들을 위해서 일만 하시느라 집무실에서 거의 나가시지 않으시니까요.” 고태욱 비서실장은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여하튼 다음 주에 제가 꼭 모셔 올 테니 모쪼록 잘 좀 부탁드립니다. 각하가 건강하셔야 또 나라가 바로서지 않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주치의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수건으로 이마에 땀을 닦았다. “그나저나 선생님은 어디 안 좋으십니까? 아까부터 땀을 조금 흘리시는 것 같은데.” “슬슬 날이 풀려서 그런지 조금 더운 것 같기도 하네요. 제가 몸에 열이 많아서.” “에어컨 편하게 트십시오. 선생님 컨디션이 좋아야 각하 건강을 더 잘 살피실 거 아닙니까?” “아, 네. 감사합니다.” “예. 그러면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쉬십시오.” * * * -피고인 차명건을 선거법 위반 혐의로 벌금형 400만 원에 처하고 공직 선거에서 4년 간 피선거권을 박탈한다. 21대 국회에서 대한당의 원내대표였던 차명건 의원은 22대 총선과정에서 법정 선거 비용을 훨씬 넘어서는 정치 자금의 과한 운용으로 인해 결국 유죄 선고를 받고 말았다. 선거법 위반에서 벌금형으로 100만 원 이상을 받을 경우, 직위상실형이라고 보는데. 즉 이번 판결은 차명건이 국회의원에 당선된 걸 무효로 돌리고 그가 일반인 신분으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게다가 그는 단순히 벌금형을 받은 걸 넘어서 4년간 피선거권까지 박탈되고 말았다. 국회 임기가 4년이지만, 차명건의 경우 집행은 선거가 이미 끝난 지금부터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 23대 총선에서도 그는 출마할 수 없다는 것이지. 그보다 1년이 더 지난 후에야 보궐선거에서나 출마할 수 있겠지만, 정치판에서 5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다. 그때가 되면 차명건이 설 자리는 없어지겠지. 결국 그의 정치 생명은 끝난 것과 다름없었다. 이 상황을 제일 기뻐하는 건 전상국 당 대표와 둘째 형 최지원. 그들이 작당했던 대로 결국 원내대표 자리는 최지원에게 돌아가겠지. 이를 다시 말하면. 전상국 당 대표가 다시 한 번 대한당 내에서 큰 권한을 가지게 되고. 한유라가 법사위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상국이 밀어주면, 대한당 내에서는 묵인할 테고. 게다가 한유라의 움직임을 보아하면, 민국당에서 거세게 반발할지라도 몇몇 의원들을 회유해서 어떻게든 올라가려고 할 테니까. “이대로 지켜보실 겁니까?” 마돈나의 물음에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글쎄.” 나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또 내버려둘 생각은 없었다. 그들의 뜻대로 상황이 돌아가는 걸 지켜보고 싶진 않았으니까. 특히 한유라.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나의 정치적 스승이자, 정치판에서 몇 없는 깨끗한 이치현 의원의 뒤통수를 쳐놓고 승승장구하는 걸 기치할 생각은 없었다. 이치현 의원 같은 사람들이 살아남아야 대한민국 정치판이 깨끗해지는 법이지만. 한유라는 나서서 그의 목을 치고 더러운 방법으로 그 자리를 채웠으니까. “한 번 천천히 목 죄어보자고.” 나는 비장한 심정으로 말했다. “6월 임시 국회에서 한 번 제대로 붙어봐야 하지 않겠어?” 지이잉-. 2G 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발신인은 신혜지. “지현 씨는 우선 강선우 보좌관이랑 대한당에서 넘어온 법안 좀 살펴 봐. 조금이라도 허점 보이면 파고들어야지.” “알겠습니다.” 마돈나를 뒤로하고 집무실로 향했다. “어, 나야.” -신혜지입니다. 휴대폰 너머에선 약간이나마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언가 알아낸 모양. -의원님, 오늘밤에 성문종이 전상국 의원과 접촉할 것 같습니다. 주먹을 불끈 쥐었다. 큰 건이다! “어디서?” -장소는 확실치 않습니다만, 이번 ‘주현이 법’ 관련해서 정무수석실의 의견을 물어본 걸 보면, 해당 법안과 관련된 건 확실해 보입니다. “둘만 만나는 거야?” -아니요. 대한당 의원이 하나 더 나온다고 했는데, 누군지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알겠어.” -추가 정보 나오는 대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 전화를 끊자, 자연스레 입꼬리가 휘어졌다. 이 자식들, 드디어 움직이는구나. 그래. 판도 깔아졌겠다. 누구 칼이 더 날카로운지 어디 한 번 맞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