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정리 (4)2022.03.11.
“혹시 한유라랑 잤습니까?” “……!” 순식간에 최칠현 의원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지금 그게 무슨…….” 이내 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나이도 어린 게 어디서 버르장머리 없는 소리냐는 뜻이지. “다른 의도가 있는 게 아니라, 순수한 의미로 여쭙는 겁니다.” 나는 그에게 화를 내지 말라는 의미로 한 발자국 더 다가가며 부드럽게 말했다. “한유라와 의원님이 함께 있는 걸 제 지인이 우연히 목격했다고 합니다.” “……아.” 최칠현 의원의 입에서 낮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당연한 말이지만, 진실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할 정도면 어느 정도 알고 온 게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는 반항하는 대신 얼굴을 쓸어 만지며 목소리를 낮췄다. “자네 말고 아는 사람이 더 있나?” “없습니다.” “그 친구는?” “정계 사람은 아닙니다. 입단속도 단단히 해뒀고요.” “비밀로 해줄 수 있나?” “당연합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는 신뢰감 짙은 눈으로 말했다. “다른 이에게 새어나가지 않도록 일부러 제가 직접 의원님께 왔잖습니까?” “고맙네, 조카.” “혈육 좋다는 게 뭡니까?” 코를 찡긋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래서 몇 가지 조금 더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 “말하게. 내가 아는 선에선 알려줌세.” “한유라 의원이 법사위에 가는 건 사실입니까?” 그의 눈썹이 들썩였다. “그건 또 어떻게 안 거야? 아직 대한당에서도 몇 명 모르는 사실인데.” 대답 대신 씨익 미소를 지었다. “허허…….” 최칠현 의원은 혀를 내둘렀다. “괜히 자네가 종로에서 당선된 게 아니네.” 본인이 알려줬다고 말할 필요는 없었다. 정치판에서는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수록 오히려 더 경외심을 가지게 되는 법이니까. “그래서 한유라는 어떻게 된 겁니까? 초선 의원 중에 법사위에 들어가는 이들이 적지는 않다지만, 한유라처럼 보좌관 출신으로 올라온 직후에 들어가는 경우는 굉장히 드물다고 알고 있어서요.” “그게 아무래도…….” 그는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내게 몸을 기울였다. “전 대표에게 예쁨을 받는 것 같아.” “전상국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인간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모르겠지만, 냉큼 한유라를 법사위로 올리자고 하더라고.” 최칠현 의원은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조카 덕분에 그 인간이 낙선해서 지금은 이빨이 몇 개 빠진 호랑이라지만, 아직 발톱은 건재하니까 대한당 내에서는 이견이 없었어.” 종로에서의 낙선으로 휘청거리긴 했지만, 최지원과 손을 잡기로 한 덕분에 아직 실권을 놓치지는 않은 모양. “전상국 대표가 쉽게 마음을 여는 양반이 아니니, 아마 무언가 있긴 있었던 모양이야.” 맞는 말이다. 최칠현 의원처럼 단순히 몸을 주는 것만으로는 꼬실 수 없는 인간이니까. “의원님.”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요즘도 중진의원 회의에는 꾸준히 참석하시죠?” “그래야지. 이 자리 쥐고 버티려면 아직은 전 대표 그 자식 말을 들어야하니까. 아직 당 대표 선거까지도 며칠 남긴 했고.” “저는 한유라와 의원님 사이의 관계,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는 내 말을 알아들었다는 듯 씨익 웃으며 답했다. “전상국이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면 연락해줌세.” “감사합니다.” 최칠현 의원은 시계를 보며 말했다. “그나저나 지금 쯤 전상국 대표랑 최지원이 만나고 있을 텐데.” “아, 오늘입니까?” “전 대표 지인한테 들었으니 아마 확실할 거야.” 전상국이 대한당 당 대표를 연임한다는 사실은 당 내외에서도 어느 정도 추측은 하고 있으나, 아직까지 확정된 건 아니었다. 그들의 협상이 완전히 타결된 게 아니었으니까. 아마 오늘 최지원과의 담판으로 그 성사여부가 결정될 터. “아마 화해하는 모드로 가지 않겠습니까?” “그렇겠지. 안 그래도 대한당이 이번에 의석 과반을 놓친 마당에 당 분위기 안정시키려면 그래도 전상국 대표가 있는 게 나을 테니까.” * * * “고맙네, 최 의원.” “아닙니다. 저야말로 함께하기로 결정해 주셔서 감사하죠.” 전상국 대표는 먼저 팔을 뻗어 최지원의 손을 잡았다. “잘해보자고.” 모든 건 최지훈이 예상한 흐름대로 흘러갔다. 최지훈이 유발했던 오해로 인해 둘은 당대표를 두고 경쟁을 시작했지만. 결국 둘째 최지원이 한 발 물러나 원내대표를 맡고. 전상국은 당 대표 자리를 연임하기로 결정했다. 사실, 원내대표와 당 대표를 결정하는 데에는 당원들의 투표 과정이 필요하다지만, 말 그대로 명목상일 뿐, 실제로는 당에서 실권을 쥐고 있는 그들이 의도한 대로 결과가 나올 터. “저 또한 잘 부탁드립니다. 당 대표님.” 전상국 대표는 흡족스러운 듯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름도 잘 어울리네. 최지원내대표! 글자가 딱 이어지지 않나?” 최지원은 억지로 입술을 휘었다. 당 대표보다는 원내대표에 어울린다는 뜻처럼 들렸으니까. 다만, 지금은 말꼬리를 잡을 타이밍은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렇게 되면 차명건 의원은…….” 기존에 원내대표였던 인물. “그놈은 버려.” 전상국 대표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선거법 위반으로 나가리 될 게 뻔히 보이잖아. 정계 복귀도 힘들어 보이는데 굳이 우리가 붙잡아서 이득 볼 거 있어?” “그렇죠?” 둘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 중요한 건 이쯤에서 정리된 것 같고…….” 전상국 대표는 눈을 반짝이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자네도 그 친구에게 호감이 있는 건 아니지 않나?” ‘그 친구’라 함은 굳이 자세히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막내 동생 최지훈. 그를 칭하는 말이었다. “사실 사이가 나쁜 건 아닙니다.” 실제로 그랬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우애 좋은 형제는 아닐지라도 이번 선거에서 최지훈이 승리하는 데 도움을 준 건 사실이었으니까. 물론, 자신이 낙선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는 걸 전상국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다만.” 최지원은 음흉하게 눈을 빛냈다. “언젠간 밀어내야 할 동생이긴 하죠.” 이 또한 사실이었다. 결국 권좌에 오르는 인물은 한 명이다. 이번 총선을 통해 최지곤이 밀려난 이 상황에서 첫째 최지만 다음으로 위협이 되는 인물은 막내 최지훈. 이전까지는 똑똑하고 정치적으로 머리가 잘 굴러간다는 건 알았지만. 종로에서 막판 뒤집기로 전상국 의원을 꺾어내는 모습을 보며 최지원도 적지 않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만히 두면 언젠간 대성해 내 자리를 위협할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은 몰라도, 서둘러 싹을 짓밟아주지 않으면 첫째 형보다도 더 위험한 인물이 되리라는 예감은 불길하게 다가오고 있었으니까. “대표님께서 복수하신다면, 동참할 생각은 있습니다.” “그렇지?” 전상국 당 대표는 거칠게 입꼬리를 휘었다. “천천히 시나리오 한 번 써보자고.” “알겠습니다. 좋은 의견 나오면 알려주십시오.” “그래.” * * * 전라도 해남 바닷가의 한 별장. 똑똑. 노크소리에 셋째 최지곤은 담뱃불을 붙이려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야?” 짜증 섞인 목소리로 묻자, 현관문 너머에서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누나다.” “하…….” 최지곤은 한숨을 푹 내쉬며 문을 열었다. “여기까지 뭐 하러 왔어?” “어휴, 폐인 다 됐네.” 최은실은 질색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면도라도 좀 해.” “신경 써 주는 척하지 마.” “내가 신경 안 쓰면 누가 쓴다고 그래?” “가족들이 보면 어쩌려고?” “여기 올 리가 없잖아.” “올케는 네가 출장 간 줄 알고 있던데?” “그렇게 말했으니까.” 평소와 다름없이 아내와 자식들은 서울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러나 최지곤은 멘탈이 나간 채 지방에서 홀로 술과 담배에 절어 있었다. 지금도 이미 반쯤은 알코올에 취해 있는 상태. 그도 그럴 것이 후계 구도에서 완전히 아웃된 것이나 다름없는 이 상황에서 맨정신으로 버티긴 힘들었으니까. 아예 머리가 회까닥 돌까 봐 싶어 마약을 하지 않는 게 그나마 다행일 따름. “정신 안 차릴 거야?” “정신 차린다고 뭐가 달라져?” 최지곤은 허탈하게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막내마저 종로에서 승리했는데, 아버지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어?” 성문종에게 패배한 자신을 아버지는 ‘낙오자’, ‘패배자’라고 지칭하기까지 했다. 재기할 여력도 없이 끝난 것이지. “난 끝이야.” “그렇다고 평생 이렇게 살 거야?” 최은실은 동생을 똑바로 앉혀놓고 입을 열었다. “정신 차리고 기회를 엿봐야지.” “하.” 최지곤은 가소롭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누나. 우리끼리는 솔직해지자. 내 생각해주는 척하지 마. 돈 때문에 그러잖아.” “왜 이렇게 삐뚤어졌어?” “저번에 계획했던 일, 이미 진행됐잖아. 내가 모를 것 같아?” “…….” “알아서 해. 난 손 뗄 거니까.” “그게 말이 돼?” 최은실은 눈을 부릅떴다. “여기서 네가 그만두면 어떻게 되는지 알잖아. 그런데도 손 떼겠다는 소리가 나와?” “뭔 상관이야?” 최지곤은 울분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남은 돈마저도 없으면 난 진짜 끝이야. 권력도 돈도 없는 거지꼴이 뻔한데 남은 비자금까지 내주라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하지 마. 적어도 자식들이 집안에서 버려져서 내쫓기는 꼴은 못 봐.” “너 진짜 이럴래?!” 최은실은 훈계하듯 소리쳤다. “네가 여기서 외면하면 아버지 죽는다니까?” “알아. 안다고!” 최지곤은 이를 악물었다. “근데 아버지도 날 버렸어.” 그는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나라고 버리지 말라는 법 있어?” “…….” “어차피 여기서 내가 아버지 살려봤자, 난 재기 못해. 기껏해야 형들 시다바리나 할 수 있겠지.” “최지곤!” “내가 그 꼴 보려고 지금까지 버틴 것 같아? 아니, 절대 아니거든. 나도 권좌 못 오르면 다 필요 없어.” 최지곤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 아쉬우면 누나가 투자하든가.” “내가 어떻게 투자해. 돈도 없거니와…….” “누나 비자금 있잖아. 그거 털면 내가 밀던 사업 진행할 수 있어.” 짧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최은실은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사업 진행해서 아버지 살리면 뭐해?” “…….” “그 돈 다 끌어다 쓰면 뒤가 없어. 그 수혜는 내가 못 봐. 첫째나 둘째가 가져가겠지. 결국 죽 쒀서 개 준 꼴이 된다고.” “몰라. 난 상관없어.” 최지곤은 더 관여하고 싶지 않다는 듯 돌아섰다. “이젠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싫어. 매일 같이 학벌, 권력만 바라보는 인간이잖아. 부성애라는 건 눈곱만큼도 없는 양반이라고.” 그는 말하면서도 이를 빠득 깨물었다. “이미 죽은 성태현 그 새끼 자식한테 한 번 졌다고, 살아있는 자식새끼 내치는 게 말이 돼?” “…….” “나도 아버지 버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줄 거야.” “지곤아.” 최은실은 사정하듯 말했다. “그래도 낳아주신 아버지잖아. 췌장암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네가 더 잘 알잖아. 걸리면 끝이야. 게다가 이번엔 보통 췌장암도 아니라고. 유전자가 개량된 거야. 대한민국 최고 의료진이 와도 못 살려.” 계속해서 듣지 않는 시늉에 그녀는 호소했다. “원래 계획대로 하자. 내가 췌장암 심어놓고 주치의 매수까지 다 끝났어. 네가 투자하던 그 치료법도 완성 직전단계잖아. 남은 돈 넣어서 아버지 완치시키면 분명히 마음 돌릴 수 있어. 애초에 그렇게 아버지 마음 사로잡는 게 애초 계획이었잖아. 그러면 다시 정계로 돌아갈 수 있다니까?” 그럼에도 최지곤은 더 이상 듣지 않았다. “난 안 해.” 그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누나도 이쯤하고 돌아가.” 그 말을 남기고 최지곤은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