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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정리 (2) (129/200)

뒷정리 (2)2022.03.09.

“해냈구나.” 아버지는 천천히 내 등을 쓸어내렸다. 짜릿했다. 아버지께 이렇게 제대로 된 칭찬을 받아 본 적이 얼마만일까. 아니, 형제들 중에서 아버지께 이토록 뿌듯한 시선을 받아 본 적이 있는 인물이 있을까 싶을 정도. “감사합니다, 아버지.” 주먹을 불끈 쥐며 답했다. “아버지께서 믿어 주신 덕분입니다.” “잘했다.” 그는 나를 떼어내고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내 아들은 한다면 하는 놈이야.” 조용히 지켜보시던 어머니는 옅은 웃음소리를 내시며 말했다.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예요? 국 다 식겠네.” 아버지는 어깨를 활짝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저녁 먹자고.” 식사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그럴 수밖에. 집안의 분위기는 아버지로 인해 좌지우지되는데. 당신의 입가에서 미소가 가시질 않았으니까. 저녁을 먹은 뒤, 어머니는 가볍게 커피 한 잔을 내오셨다. 아버지는 각설탕 하나를 넣으며 물었다. “가슴은 좀 괜찮고?” “예. 다 나았습니다.” 어머니는 걱정스런 얼굴로 물으셨다. “깁스는?” 나는 팔을 붕붕 돌려 보였다. 그 모습에 아버지는 껄껄 웃음을 터뜨리셨다. “우리 막내도 정치인 다 됐구나.” “제가 좋은 걸 배웠죠.” “상처는 완전히 아문 거고?” “아니요. 아직 드레싱은 하고 있습니다. 워낙 상처가 넓어서요.” “다 나은 건 아니네.” “그래도 일상생활 하는 덴 지장 없습니다.” “다행이야.” 우리는 간단히 커피를 마신 뒤, 서재로 향했다. 아버지는 담배를 하나 입에 무시며 입을 열었다. “그 녀석은 아마 무기징역이 뜰 거야.”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김치호 비서관이겠지. “중간에 가석방 없는 무기징역이니 앞으로 걱정할 일은 없을 게다.” “감사합니다.” “감사하고 말 것도 없지. 애초에 국정원 녀석들이 잘못한 걸 바로잡은 거니까.” “그래도 그 덕분에 제가 당선된 것 같습니다.” 아버지는 잠시 생각하나 싶더니. 담뱃재를 떨며 나를 바라보셨다. “전상국 의원은 어떻게 된 게냐?” 저 눈빛을 보면, 아마 진실을 답하라는 뜻이겠지. 당연한 일이다. 만에 하나, 전상국 의원이 나에 대한 암살을 지시했다면 아무리 대한당 당 대표라고는 해도, 아버지가 결코 용서치 않을 테니까. 아무리 현대 사회라고 해도 대통령의 힘이라면 사람 하나 없었던 것처럼 만드는 건 어렵지 않다. 전상국 의원이 뒤통수를 친 건 괘씸하긴 하나, 그의 정치 인생을 끝낼 정도는 아니었다. 과거에 그는 아버지가 권력을 다질 때부터 오래도록 한편에 서 왔으니까. “제가 꾸민 일입니다.” “역시 그런 게냐?” 아버지는 예상했다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다행이네.” 그 말에는 복합적인 심경이 담겨 있었다. “전상국 의원이 간혹 돌발 행동을 하긴 하더라도, 선을 넘은 적은 없었거든.” “사실, 예비 후보로 등록하기 전에 만나 긴히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일련의 과정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전상국 의원과 네거티브를 하지 않기로 했던 사실부터 시작해서. 그가 먼저 협정을 깨고 공격한 점. 그에 대한 대처로 내가 김치호 카드를 꺼냈다는 것까지. “잘했다.” 아버지는 그에 대해 질책하거나 염려하지 않았다. “아들아.” 그 대신 내게 한 마디를 해주었다. “누군가와 잡은 손을 뿌리칠 땐, 반드시 그를 쓰러뜨릴 준비를 한 뒤여야만 한다.” 그의 눈빛은 불같이 이글거렸다. “반대로 네 손을 놓은 이에게는 본때를 보여 주어야 하고.” 이는 단순히 이번과 같은 협정에만 해당되지는 않는다. 나와 함께하는 사람. 혹은 내가 먼저 배신을 해야 되는 경우. 그 모든 걸 통틀어서 통용되는 것이니까. “명심하겠습니다.” “그래.” 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셨다. “지훈이 너는 똑똑하니 잘 알겠지.” 그는 담배꽁초를 짓이기며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좀 걷자. 많이 먹었더니 더부룩하구나.” “예.” 아버지와 함께 청와대 관저 밖으로 산책을 나왔다. 경호원이 따라붙거나 경호차가 붙는 건 아니었다. 이 넓은 청와대를 둘러서 101경비단이 지키고 있으니까. 경호원이나 경호차가 붙는 건 청와대 밖으로 나갈 경우에만 한하는 것이지, 이렇게 청와대 내를 거닐 때는 프라이버시가 지켜진다. 물론, 옆에 내가 있으니 가능하지, 아예 홀로는 있을 수 없는 게 원칙이다. 청와대에는 긴 산책로가 있다. 커다란 나무가 심어져 있고, 작은 인공 개울까지 있기에 언뜻 보면 숲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곳을 따라 아버지와 천천히 걸었다. 이렇게 오붓이 산책하는 게 얼마만일까. “우리 둘이 걷는 게 몇 년 만이지?” 아버지도 같은 생각을 하셨나 보다. “10년은 넘은 것 같습니다.” 내가 초등학생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아마 15년은 되었을 테지. “오래되었구나.” 아버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무를 바라보셨다. “정말 오래되었어…….” 개울을 지나자, 저 멀리 구본관 터 근처에 ‘주목(朱木)’ 한 그루가 눈에 들어왔다. 2025년 올해로 747살이 된 나무.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년을 산다고 한다. 어렸을 땐 저 근처에서도 많이 뛰어놀았는데……. 추억에 잠겨 있던 그때. “쿨럭!” 아버지가 크게 기침을 하셨다. “괜찮으십니까?” “그냥 잔기침이야.” 잔기침이라기엔 조금 느낌이 거셌다만, 아버지는 건강에 대해 조언하거나 언급하는 걸 싫어하시기에 더 말하진 않았다. “흐음…….” 아버지는 문득 멈춰 서더니, 발걸음을 돌렸다. “이쪽으로 가자.” 그는 나를 이끌고 집무실이 있는 본채로 향했다. 다만, 아버지가 가신 곳은 본관이 아니라, 본채 서편에 있는 세종실. 평소엔 국무회의가 진행되는 곳이나, 이곳엔 작은 비밀이 있다. 1층 복도엔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 초상화가 걸려 있고. 2층에서만 내려갈 수 있는 계단을 지나면, 지하 1층엔 해외 내‧외빈에게서 받은 선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청와대 박물관이나 해외 대사를 초청하는 영빈관에서 보관하지 않는 물건들. 선물을 받았다는 공식적인 기록이 있긴 하나, 소유권은 현 대통령에게 전해져 내려오는 물품들이다. 아버지는 그곳을 천천히 거니셨다. 그러다 문득 한 물건 앞에 멈춰 섰다. “이게 뭔지 아느냐?” “잘 모르겠습니다.” 화려한 장식을 가진 은쟁반과 은주전자 세트. “1977년에 최규하 대통령이 사우디아라비아로부터 받은 선물인데, 특별히 한국을 위해 저 뚜껑에 무궁화를 각인해 놨어.” “아…….” 아버지는 차근차근 물건을 설명해 주셨다. 김영삼 대통령이 북한으로부터 받은 먹과 붓. 노태우 대통령이 중국으로부터 받은 다기 세트. 김대중 대통령이 유공동포로부터 받은 볼펜. 그리고 한 물건의 앞에서 아버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조심스레 아크릴 박스를 열고 은제 담배합을 꺼냈다. “이게 뭔지 아느냐?” “담뱃갑 같습니다.” “박정일 대통령이 콜롬비아에서 받은 담배합이야.” 나직이 한 마디를 덧붙이셨다. “내가 검사 시절에 그분께 직접 받았다. 그리고 집권 초기까지 썼던 물건이지.” 손때가 느껴짐에도 고급스러운 건 여전했다. 아버지는 그것을 내 손에 살포시 올려주었다. “이젠 네가 사용하거라.” “……!”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다른 형제들에게 들키진 말고.” 그는 미세하게 눈꼬리를 휘었다. “나머진 몰라도 첫째나 둘째는 그걸 보면 어떤 건지 알 테니까.” “……알겠습니다.” “가자.” 아버지는 미련 없이 발을 돌리셨다. 은제 담배합을 소중히 안주머니에 넣은 뒤, 그를 뒤따랐다. 발걸음을 맞추고 나란히 걸었다. 관저까지는 10분쯤 더 걸어야 한다. 불편하지 않은 침묵 속에서 한 5분쯤 걸었을까.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아버지.” 시선은 정면으로 고정한 채 물었다. “하나만 여쭤 봐도 됩니까?” 그러라는 듯 아버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집무실 금고. 거기에 뭐가 들어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아주 오래 전. 내가 정치에 입문한 지 만으로 1년이 되었을 무렵, 고태욱 비서실장을 통해 전달받은 집무실 금고 열쇠.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으나, 한 번도 집무실에서 꽂아본 적은 없었다. 어차피 고태욱 실장이 들고 있는 열쇠와 동시에 꽂아야만 열리는 것이니까. “고 실장이 전하지 않았나?” 아버지는 뒷짐을 지며 걸음을 천천히 옮기셨다. “내가 눈감으면 열어 보라고.” “맞습니다.”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다.” 아버지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으셨다.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관저에 도착할 즈음엔 안방의 불이 꺼져있었다. 어머니께서 벌써 잠드신 모양. 굳이 인사드리기 위해 깨울 필요는 없을 터. “가 보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가거라.” 아버지는 담백한 인사말을 남기며 먼저 관저로 들어가셨다. * * * 국회의사당 의원실. “오랜만입니다, 의원님!” 9급 김한나 비서는 반가움 가득한 목소리로 깍듯하게 인사를 했다. “한나 씨, 오랜만이에요.” “말씀 낮추세요.” “그럴까요?” “네. 존댓말하시면 제가 더 불편해요.” 청와대 정무수석실에 있을 때와 달리, 국회의원이라는 직위는 보좌진을 이끄는 자리이기에 존댓말보다는 하대에 익숙해져야 한다. 오히려 내가 높임말을 쓰는 게 듣는 직원 입장에선 불편할 수 있으니까. 정치라는 곳이 원래 나이보다는 직위나 경력이 우선되는 바닥이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하대하는 건 나의 보좌진에 한정된 이야기. 외부에서는 모두에게 높임말을 쓰는 게 낫다. 안 그래도 최연소 국회의원인지라 간혹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라는 소리가 들려오는데 버릇없다는 소리까지 나오면 안 되니까. “앞으로 잘 부탁해요.” 악수를 청하자.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녀는 눈을 빛내며 두 팔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그때, 전화를 받던 마돈나가 내게 다가왔다. “의원님.” “응.” “한유라 의원이 잠깐 뵙자고 합니다.” “……한유라가?” 그 이름에 서류를 보던 강선우 보좌관이 흠칫했다. 그의 입장에서 느끼기에 한유라는 ‘배신자’였으니까. 아직도 강선우는 그녀가 모든 상황을 설계한 것까지는 모르고 있을 테지만. 그럼에도 대한당으로 들어가 이치현 의원의 지역구를 차지한 건 배신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행위였으니까. “내가 간다고 하세요.” “지금 이쪽으로 온다고 합니다. 이미 출발했을 겁니다.” “알았어. 바로 안으로 들여보내.” “예.” 집무실에 들어가 얼마쯤 기다렸을까. 오래지 않아,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한유라가 등장했다. “오셨어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를 반겼다. 검정색 오피스룩에 정갈하게 내린 머리. 이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단발이 되었다는 점 정도. 한유라는 싱긋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오랜만이네.” “그러게요.” “말은 편하게 해도 되나?” “그러시죠.” 이전에 선배였던 데다가 나이도 많으니까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면 안 돼.” 그러나 한유라는 고개를 저었다. “같은 초선끼리 무슨. 같이 반말하거나 서로 존댓말 써야지.” “그런가요?” “그래. 안 그러면 쉽게 본다니까.” 나를 위해 하는 조언이지만. 그녀의 실체를 알기 때문일까, 오히려 경계심부터 들었다. “참고할게요.” 그렇기에 적당하게 대답했다. “계속 존댓말 쓸 거야?” “전 이게 편합니다.” “뭐, 알아서 해.” 한유라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그렇고 무슨 일이세요?” “하나 부탁할 게 있어서.” 그녀는 슬쩍 내게 몸을 기울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6월 임시 국회 전에 상임위원회가 결정되잖아?” 상임위원회. 외통위, 정보위, 환노위 등 법안이 본 회의에 상정되기 전, 각 국회의원이 먼저 살피고 통과 여부를 결정하거나 전문적으로 법안을 다듬는 곳. “내가 거기서 법사위에 들어가려고 하거든?” “……법사위요?” 법제사법위원회. 간단하게 줄이면 법률과 사법부를 담당하는 상임위원회인데. 가장 큰 특징은 모든 상임위에서 가장 파워가 센 곳. 단원제인 대한민국에서 사실상 ‘상원’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 “대한당에서 안 받아 주지 않을까요?” “이미 허락받았어.” 벌써? 역시 보통 여자가 아니다. 그것도 초선에 법사위라니……. 수뇌부와 평범치 않은 거래를 한 것만은 분명했다. “그래도 민국당에서 반대를 할 텐데요.” 그녀는 이제 초선인데다가 이치현 의원 자리를 꿰고 들어간 사람이니까. “어, 그래서 부탁 하나만 하려고.” 한유라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민국당에서 회의하면 반대하는 의견들이 나올 거잖아. 그 중에서 강력하게 반대하는 인물을 제외하고 중립에 선 의원들이 누군지 알려줄 수 있어?” 그녀의 눈에 엉큼한 야욕이 차올랐다. 한유라 이 여자,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권력욕이 강하다. 원래 겉으로 드러내지 않는 녀석들이 진짜 무섭다더니만……. 아무래도 여우가 본격적으로 꼬리를 드러내기 시작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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