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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전벽해 (3) (119/200)
  • 상전벽해 (3)2022.02.27.

    추적추적 여름비가 축축하게 젖어드는 밤. 도봉구의 한 공원의 한 곳에서 신혜지는 홀로 서 있었다. 밤을 밝히고 있는 적지 않은 불빛들 중 고장이 나서 긴 간격으로 점멸하는 가로등에 기대어 흘긋 시계를 바라봤다. 10시 58분. 약속시간까지 남은 건 2분. “후우.” 심호흡으로 긴장되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오늘 만나는 게 처음은 아니었다. 그녀는 최지훈이 큰 그림을 그린 이후부터 꾸준하게 접촉을 해 왔으니까. 물론, 모든 건 최지훈의 설계 하에 이뤄졌다. 단순히 청와대의 정보를 빼가는 것뿐만 아니라, 최 씨 일가에 대한 자료도 넘겨왔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최지훈에게 타격이 갈 만한 사안은 최대한 배제하였다. 성문종이 만세당의 중심으로 우뚝 서는데 그 덕을 보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었다. 최지훈이 어쩔 수 없이 도왔다기보다는. 어차피 성문종이 성장하는 흐름이었기에 그 시류에 편승해서 신혜지에 대한 믿음을 키웠던 것이지. 실제로 성문종은 신혜지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가 쌓여 있긴 했다. 지속적으로 효과 있는 정보를 넘겨주고 있었고. 반대로 성문종이 알려준 정보들에 대해 신혜지는 비밀을 엄수해 주는 느낌을 주고 있었으니까. 일부러 최지훈이 알면서 당해주며 성문종이 신혜지를 확고하게 믿을 수 있는 판을 형성하고 있었으니까. 최지훈 또한 본인이 치명상을 입지 않는 선에서 신혜지에게 정보를 흘리며 성문종이 그녀를 믿을 만한 여지를 만들어 두었다. 정석적인 방법이었다. 스파이를 심기 위해서는 하루이틀만으로 되는 게 아니라, 꾸준한 노력을 통해 아주 천천히 경계심을 낮춰야 상대방을 방심하게 만들 수 있는 법이니까. 반짝-. 저 멀리서 헤드라이트가 신혜지의 얼굴을 비췄다. 그녀는 차분하게 표정을 관리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성적인 설렘은 아니었다. 스파이라는 행위 때문일까, 성문종을 만날 때마다 늘 떨리는 감정은 지울 수 없었기 때문. 10m 정도 거리에 차가 멈춘 뒤, 뒷좌석이 열리며 성문종이 내렸다. 그는 특유의 히쭉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신혜지에게 다가왔다. “오랜만이네.” “그러네요.” “혜지 씨는 계속 청와대에 남아 있는 거 아니었나?” “그렇죠.” 성문종은 빤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물었다. “그쪽 버려진 거 아니었나?” 신혜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최지훈이 선거 캠프에 데려가지 않았길래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거야.” “아직도 정치를 모르시네.” 신혜지는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내통하려면 여기 남아있는 게 더 좋다는 생각은 못 하셨나 보네.” “아, 그런가?” 성문종은 코를 찡긋했다. “나는 혜지 씨가 다른 인재들에게 밀린 줄 알고 걱정했잖아.” “그랬으면 내가 만나자고 했겠어요?” “혹시나 그러면 내가 받아 줘야 되는 게 아닌가, 고민했거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신혜지는 주머니에서 USB 하나를 꺼내 던지듯 건넸다. “이건 무슨 자료인데?” “이번 선거에 도움이 될 만한 자료.” 최지훈이 직접 설계한 내용이었다. 성문종을 엿 먹이기 위한 자료가 아니라. 신혜지가 말한 대로 성문종에게 도움이 되는 자료. 다시 말해 최지곤을 쓰러뜨릴 수 있는 재료였다. “이게 뭔데?” “그쪽 아버지랑 관련된 거예요.” 순식간에 성문종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그에게 아버지인 前 대통령 성태현은 금기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쓸모없는 거면 너부터 날릴 수 있어.” “같은 동료끼리 얼굴이나 풀고 말하죠?” 신혜지는 기 죽을 생각이 없다는 듯 턱을 치켜들고 말을 이었다. “아버지가 그쪽의 아킬레스건이라면, 최지곤 또한 마찬가지예요.” “그게 무슨 소린데?” “한 번 봐 봐요.” 그녀는 자신감에 찬 듯한 목소리를 내고는. “그러면 알게 될 테니까.” 휙 돌아서며 자리를 떴다. * * * “어떻게 생각해?” “나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문종의 물음에 오재욱 보좌관은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신혜지가 말한 그대로입니다. 후보님께서 불편해하시는 안건임은 사실이나, 최지곤 측에서도 분명 불편해할 겁니다.” “흐으음…….” 신혜지가 넘겨준 자료는 성문종과 최지곤의 아버지. 즉 성태현과 최준석 대통령 사이의 일이었다. 사실, 성문종은 이번 총선에서도 해당 안건을 꺼낼 생각이 없었다. 그러지 않아도 승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또 꺼내는 것 자체가 성문종에게 굉장히 불쾌한 일이었으니까. 허나, 신혜지가 자료의 마지막에 첨부해 둔 은 그의 머릿속에 각인되어버렸다. 아버지에 대한 주제를 꺼내서 싸우고, 또 최지곤에게 압도적으로 승리하면, 그건 최 씨 일가에 대한 승리로 포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짧은 글귀. ‘최 씨 일가에 대한 승리.’ 까놓고 말해서 최 씨 일가에게 성문종과 그의 아버지는 늘 당하기만 했을 뿐,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승리라고 말하긴 그렇고, 골탕을 먹인 것이라고는 단 한 번. 성태현 前 대통령이 검사였던 최준석의 뒤통수를 친 것 한 번이 전부였으니까. 성문종에게 그러한 콤플렉스가 있다는 걸 알기에 최지훈은 그것을 후벼 것이다. 그렇게 해야 자신이 원하는 그림이 그려질 테니까. 물론, 속내를 알 리 없는 성문종은 최지훈의 의도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오 보좌관.” 성문종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한 번 진행해보자고. 기사 띄우고 언플 시작해.” “알겠습니다. 후보님.” * * * “이 새끼는 대체 뭐 하자는 거야?” 최지곤은 보고 있던 신문을 구기며 짜증 가득한 목소리를 냈다. 성문종이 지속적으로 보도 자료를 내고 있었다. 前 대통령 성태현과 최준석 대통령의 과거 부딪쳤던 사실에 대해서. “이미 무덤까지 간 사람에 대해서 왜 자꾸 파헤치는 거야?” 그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까놓고 말해서 이런 식으로 나가면 둘 다 얻을 게 없었다. 정확히 따지면, 최지곤이 잃을 게 조금 더 많긴 했다. 성문종은 탄핵당한 대통령의 아들이었기에 아버지에 대한 평판은 이미 부정적으로 형성이 되어 있는 데 반해. 최지곤의 아버지는 현 대통령을 맡고 있는 최준석이었으니까. “며칠 전부터 집요하게 파고들어.” 그는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이 자식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저희 측에서도 도저히 가늠이 가질 않습니다.” 우원태 보좌관 또한 고개를 숙였다. “무슨 선거를 출혈 경쟁하듯 하는 건 처음이라…….” 특수한 목적이 있는 게 아니면, 이런 경우는 굉장히 드물었으니까. 그런데 그때. 똑똑. 다급한 노크소리와 함께 선거 캠프 직원 하나가 사무실로 들어왔다. “의원님!” “이야기 중인 거 안 보여?!” 최지곤이 화를 냈지만, 직원은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그래도 지금 확인하셔야 될 것 같아서요.” “뭔데?” 직원은 대답 대신 리모컨을 꺼내 TV를 틀었다. 그곳에선 성문종이 카메라를 노려보며 말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해당 안건에 대해 지속적인 의문이 제기되고 있고. 시민들 또한 전후 상황에 대해 진위 여부를 궁금해 하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마무리된 건입니다만, 저희 둘뿐만 아니라, 국민 모두가 찝찝해한다는 건 사실이잖습니까? -그래서 저는 정식으로 토론을 제의하는 바입니다. 최지곤 후보님. 정말 당당하시다면, 이번 주 목요일에 저와 함께 TV 토론에 출연해 이 논제에 대해 제대로 토의해 보시죠. 쾅! 최지곤은 책상을 내려치며 육성을 내뱉었다. “이런 제기랄…….” 그는 미간을 구기며 이를 꽉 물었다. “의문은 개뿔. 성문종 저 새끼가 직접 보도 자료 뿌리는 거 아니야?” 그렇다는 게 노골적으로 보였다. 그러나 시민들이 이를 알 리 없었다. 오히려 최지곤과 성문종이 선거에서 격돌하며 억울하게 묻혔던 사건이 재조명되는 것처럼 보이겠지. “지 아버지는 이미 탄핵당했고, 내 아버지는 잘 당선되어서 대통령직 수행하고 있는데 정리된 건을 뭐 하러 다시 들춰내?” 허나, 이딴 식으로 들이대면 최지곤의 입장에선 뺄 수 없다. 아버지에게 흠이 있거나, 자신이 없어서 도망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으니까.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기세’라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렇기에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우 보좌관.” “예, 의원님.” “토론 출연한다고 응답해.” “네?” 우원태 보좌관은 진심으로 당황하며 되물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 “여기서 내가 빼면 우리 아버지가 날 어떻게 생각하겠어?” 최준석 대통령이 찝찝한 사건이다. 현재까지 스코어는 54 : 46로 최지곤이 밀리고 있는 상황. 안 그래도 선거에서 열세인 이 상황에서 자신에 대한 의혹까지 피어오르는 걸 알게 된다면, 아버지는 분명 자신을 가만두지 않을 게 뻔했다. “나가서 뒤집어야 돼.” 최지곤은 눈을 부라리며 쥐고 있던 펜을 부러뜨렸다. “성문종 저 새끼 모가지를 꺾어 버려야 내가 살아.” “…….” “토론 준비해.” “알겠습니다.” * * * TV토론회. 보통 각 당에서 최소 두세 명, 많으면 서너 명씩 출연해 의견을 내며 서로를 잡아먹고, 유권자들에게 자신을 어필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후보가 후보인지라, 도봉구 단독이었다. 토론자는 단 두 명. 대한당의 최지곤과 만세당의 성문종. 민국당이 빠져 있는 게 굉장히 의외였으나, 유권자들이 관심 있는 건 저 둘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의 사회자 박현정입니다. 오늘 토론은…….” 그녀는 간단한 룰을 설명하고서는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자유 토론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성문종 후보님 발언하시죠.” 성문종은 기다렸다는 듯이 최지곤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최지곤 의원님. 최준석 대통령이 간통죄를 폐지시킨 건 아시죠?” “예.” “맞습니다. 자명한 사실이고요.” 실제로 대한민국에서 간통제가 폐지된 건 최준석 대통령의 임기 중이었다. 역사 교과서에도 나오는 사실. “그런데 성태현 前 대통령. 즉 저희 아버지가 어떠한 이유로 탄핵되었는지 알고 계십니까?” “간통죄입니다.” “예, 맞습니다.” “성태현 前 대통령이 탄핵된 당시엔 유죄가 맞았습니다. 현재 그 법이 어떠하건 간에, 당시에는 위헌이 아니었고, 또 문제가 되었으니 처벌받는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자명한 사실이었다. 여기까지는 성문종 또한 예상했던 발언. “네. 저는 그게 문제가 있다는 게 아닙니다. 제 의문은.” 본 싸움은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일국의 대통령의 견해가 이렇게 쉽게 바뀌어도 되는 겁니까?”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생각이 바뀌는 건 당연한 거죠.” “대통령의 의견이 바뀌었다는 거죠?” “예, 맞습니다.” “잠깐만요. 간통죄 위헌 판결은 헌법재판소에서 내리는 겁니다. 방금 최지곤 의원님의 말씀에 따르면, 대통령의 의견에 따라 헌재 판결이 갈린다는 것 같은데, 그러면 삼권분립 민주주의 국가에서 문제가 되는 거 아닙니까?” 순간, 최지곤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말렸다. 시작부터 그가 실수하기 시작했다. 최지곤의 머릿속에도 아차 하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제야 그도 깨달았다. 첫 단추를 잘못 꿰었다는 걸. 이 모든 그림은 최지훈의 의도에 따라 흘러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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