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고 속이는 (8)2022.02.24.
설날로부터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아 약속이 잡혔다. “왜 이렇게 막히냐…….” 그리고 첫 만남부터 지각해 버리고 말았다. 초조함에 발을 동동 구르며 겨우 도착한 고급 레스토랑. 서둘러 발레를 맡기고 약속 장소로 올라왔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죠?” “아니에요.” “최지훈입니다.” “한예린이에요.” 그녀는 다소곳하게 인사했다. “갑자기 업무가 늦게 끝나는 바람에…….” “괜찮아요.” 한예린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식사는 제가 주문했는데 괜찮으세요?” “예, 물론입니다. 제가 또 못 먹는 게 없거든요.” 미리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오래지 않아 곧바로 애피타이저가 나왔다. “그나저나 꽤 조용하네요.” 클래식 음악만 들려올 뿐, 굉장히 조용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 외에는 다른 손님이 없었다. 지한그룹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인 건 알고 있긴 하다만, 오늘 맞선 때문에 통째로 비우진 않았을 터. 아마 가격대 때문에 그렇겠지. 평일이기도 하고. “청와대에서 근무하신다고…….” “아, 네. 정무비서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어려운 일 하시네요.” 그녀는 코를 찡그리며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정치 그런 건 어려워서…….” “제가 보기엔 예술 하시는 분이 더 대단해요.” “제가 하는 건 그냥 음악이죠. 예술이라고 하기엔 너무 거창하고…….” 대화는 잔잔하면서도 자연스레 흘러갔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이야기해본 결과, 한예린은 교양 있고 기품 있는 여성이었다. 재벌가에서 자란 티가 나는 인물. 고 실장이 말했던 그대로였다. 조신하면서도 차분하고. 또 해외에서 예술을 전공했음에도 학식이 뛰어난 것은 물론, 국내 정세에 관해서도 어지간한 전문가보다 더 높은 수준의 지식을 갖고 있었다. 어렵고 불편한 맞선임에도 흐름은 나쁘지 않았다. 상대방도 마찬가지인 것 같고. “그러면 일어날까요?” “아, 네.” 식사를 마치고 짐을 챙기고 있는 찰나. “한예린 씨 맞으시죠?” 제복을 입은 경찰 두 명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아니, 정확히는 내 맞은편에 있는 여성을 향해 물었다. “네, 맞는데요.” “지금 서로 같이 가 주셔야겠습니다.” “그게 무슨…….” 내가 반박하려 했지만. “알았어요.” 한예린은 평이하게 수용했다. 그 탓에 얼떨결에 같이 경찰서로 향했다. 한예린은 경찰차로. 나는 내 차로.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다. 그러나 한예린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해 보였다. 무슨 일인지 알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아니,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한예린은 나는 상관이 없다며 보내려 했지만, 경찰들이 같이 있으니 보호자라고 함께 가기를 권유했으니까. 나 또한, 그 자리에서 홀로 떠나기도 이상했고. 서에 도착하자, 그곳에는 이상한 남성이 하나 앉아 있었다. 그는 적색 와이셔츠를 입은 채 한예린에게 마구 삿대질을 하며 화를 냈다. 옷이 젖은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물론, 그녀는 들은 체도 안하며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한예린 씨, 우선 이 CCTV부터 확인하시죠.” * * * 청담동의 한 고급 레스토랑. 어지간한 부자들도 한 끼 식사로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비싼 가격. 그렇기에 이 넓은 식당에는 단 두 테이블만이 차있었다. 그 중 한 곳에 여성이 홀로 앉아 시계를 바라봤다. 현재 시각은 오후 6시 55분. 7시 약속이기에 조금 일찍 나왔지만, 상대방은 아직이었다. 지이잉-.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모르는 발신인. 허나, 누군지는 알 것 같았다. 그녀는 조신하게 휴대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예린 씨. 안녕하세요. 오늘 뵙기로 한 최지훈입니다.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너무 낮지도, 높지도 않은. 적당한 중저음이었다. -제가 오늘 업무가 늦게 끝나는 바람에 한 15분 정도 늦을 것 같아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저녁은 제가 사겠습니다. “알겠어요. 천천히 오세요.” -감사합니다. 이따 뵙겠습니다. 전화를 끊자, 한예린의 입에선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귀엽네.’ 늦어서 저녁을 산다고 하다니. 무려 지한그룹의 외동딸인 자신에게 말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진 않네.’ 그러한 생각엔 이유가 있었다. 콧대가 높아서 그런지 15분은커녕, 30분이 넘게 늦어도 미리 연락 한 번 하지 않은 인물들이 태반이었으니까. 오늘 그녀의 맞선 상대는 대한민국 대통령 최준석의 막내아들 최지훈. 사실, 지한그룹 외동딸이나 되는 만큼, 높은 사람을 한두 번 만나본 건 아니었다. 유학 시절 중에도 간혹 한국에 들어올 일이 있으면 그때마다 한 번씩은 꼭 선을 봤을 정도니까. 그럼에도 그녀는 애프터 한 번 해 본 적도 없었다. 정재계에서 유명한 인사 혹은 그런 집안의 도련님들이었지만, 어지간해서는 그녀의 눈에 차지 않았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가족 몰래 만나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니었다. 유학생활 중에도 가정에서의 엄격한 관리 탓에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해 본 적도 없었고. 애초에 워낙 우월한 유전자를 가진 탓에 그닥 연애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으니까. 그렇기에 이번 맞선도 한예린이 느끼기엔 그저. ‘따분해.’ 지루하고 귀찮은 일 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해도 서로 거슬리는 행동을 하는 건, 단순히 개인이 아니라, 가정에 대한 모욕이었기에 최대한 예의는 지키는 편이었다. 적당히 웃고. 또 적당히 대화하며. 적당한 선에서 끊고. 집에 가서 ‘괜찮은 사람이었지만, 나랑 잘 안 맞더라.’라는 식의 답변을 하는 것 정도. 늘 그렇듯 오늘도 그러리라는 생각에 한예린은 팔짱을 낀 채 눈을 감았다. 익숙한 클래식 음악을 감상하며 맞선 상대가 오기를 기다린 지 몇 분쯤 지났을까. 덜그럭. 턱! “으앗!” 뒤편의 한 테이블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살포시 눈을 떠 확인하자. “……아이고.” 짧은 탄식이 새어나왔다. 앉아 있던 손님의 새하얀 와이셔츠의 팔부분에 와인 몇 방울이 튀어 있었다. 아무래도 와인을 오픈하다가 직원이 실수한 모양. “지금 뭐 하는 거야?!” “죄송합니다!” 직원이 허리를 숙였고. 한예린은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적당하게 해결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외면하려는 찰나. “정신 안 차려?!” 윽박지르는 소리가 다시금 그녀의 귀에 꽂혔다. “내가 내는 돈이 얼만데 서빙을 이따위로 해?”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너 이 옷이 얼마짜린 줄 알아?” 한예린은 이마를 꾹 눌렀다. ‘우리 식당의 물이 이렇게 안 좋아졌나.’ 원래 성격 같아서는 나서서 무마하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은 중요한 맞선이다. 어머니만 보채던 평소와 달리, 아버지까지 꼭 잘 이야기하고 오라며 신신당부를 하셨을 정도니까. 그렇기에 그녀는 애써 외면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짝-! 살과 살이 세게 맞닿아 찢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하면 다야? 사장 불러와!” “……정말 죄송합니다.” “무슨 일이십니까?” 그제야 소란을 듣고 지배인이 화들짝 놀라 다가왔다. “이거 안 보여?” 와인이 세 방울 튄 소매를 내보이며 말했다. “이거 어떻게 보상할 거야?!” 뺨까지 맞은 직원이 얼굴이 세게 달아오른 볼을 감싸며 뒤로 물러섰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혀 있는 상태. 지배인은 먼저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손님.” “사과만 하지 말고 어떻게 할 건지 말을 하라고!” “우선…….” 지배인이 말을 채 시작하기도 전에 호통을 쳤다. “이거 이태리제라고! 이태리 장인이 직접 한 땀 한 땀 손수 뜬 거야.” 남자는 억하심정이라도 있는 듯 소리쳤다. “비싼 돈 내고 밥 먹으러 왔는데 이러면 좋겠어?!” “죄송합니다. 우선 저희가 오늘 식사비는 받지 않겠습니다. 또한, 세탁비도 전부 지급해 드리겠습니다.” “그깟 돈 몇 푼 때문에 이러는 줄 알아?” 거기서 멈추지 않고 남자는 선을 넘었다. “무릎 꿇고 사과해.” “……예?” “귓구멍 막혔어? 무릎 꿇으라고!” 직원이 실수한 건 맞다. 그리고 사과할 만한 상황인 것도 맞다. 허나, 이건 상식을 넘어선 행동이다. ‘이런 씨…….’ 한예린은 결국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소란스러운 테이블로 다가갔다. “넌 또 뭐야?” “사장 불러 오라며.” 그녀는 기품 있는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사장이나 다름없는 사람이거든.” 사실이었다. 이곳은 지한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지한푸드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 중 하나였으니까. 한예린의 정체를 알고 있는 지배인은 당황한 듯 그녀를 만류했다. “아가씨, 우선…….” “됐어. 가만있어요.” 그녀는 지배인에게 끼어들지 말라는 손짓을 하며 말을 이었다. “직원이 실수했고, 사과했고, 세탁비 내준다고 하고. 불쾌했으니 밥값까지 무료로 해준다는데 뭐가 문제야?” “이거 순 미친년 아니야? 네가 뭔데 갑자기 끼어들어?” “사장이라니까?” 한예린은 눈을 부릅뜨며 대답했다. “너 같은 진상들은 똑같이 당해 봐야 정신을 차리지.” 그녀는 일말의 망설임 없이 개봉된 와인 병을 통째로 들어 남자의 머리 위에 콸콸 퍼부었다. “으아악!” 한껏 왁스칠을 해 둔 남자의 머리는 그대로 숨이 죽었고. 새하얗던 와이셔츠는 적색으로 변했다. 와인의 남은 한 방울까지 다 털어내고 나서야 한예린은 툭 와인 병을 내려놓고는. “세탁비는 됐고.” 그녀는 지갑에서 수표 한 장을 꺼내 휙 던졌다. “이걸로 옷이나 사 입어. 그딴 싸구려 입고 이런데 오면 내가 쪽팔리니까.” 당황해서 벙 쪄 있는 남성을 뒤로하고 한예린은 뒤로 돌았다. “서 지배인님.” “네?” “시큐리티 불러서 저 진상들 쫓아내세요. 아니, 그냥 오늘 추가 예약 다 캔슬하세요. 조용히 식사하고 싶으니까.” “알겠습니다.” * * * “이거 본인 맞죠?” 한예린은 체념한 듯 한숨을 내뱉었다. “……네.” “우선, 신원도 확인되셨으니 보호자분이 여기 사인하시면 됩니다. 며칠 뒤에 다시 연락 갈 거예요. 그때 출석하시면 됩니다.” 음. 그 사인은 내가 했다. 경찰서에서 나오자, 그녀는 민망한 듯 이마를 감쌌다. 나는 조수석의 문을 열며 말했다. “타요. 집까지 태워 줄게요.” “……됐어요.” 한예린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가 어색하게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이런 말 하긴 미안한데, 어차피 파투난 김에 부탁 하나만 할게요. 주선자 측에 이야기만 잘해 줘요. 집안에서 오늘 일 알면 난리 나니까.” “누구 마음대로 파투예요?” “오늘 결혼 상대 찾으러 나온 거 아닌가요?” “그거야 맞죠.” “그러면 더 뻔하지.” 내 말에도 그녀는 다 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정치인들 다 똑같잖아요. 목소리 큰 여자 싫어하고, 집에서 조용히 있으면서 논란 만들지 않을 여자 찾는 거. 기왕이면 돈 많은 게 더 좋고.” “왜 그렇게 생각하지?” 미간을 찌푸리는 한예린을 향해 덧붙였다. “마냥 착한 것보단 할 말 다하는 게 낫지 않나?”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난 조금 아까 그거 보니까 속이 다 시원하던데……. 원래 정치란 것도 그렇게 해야 되거든요. 어중간하게 갑질하는 녀석의 콧대를 꺾어주고 제대로 찍어눌러 주는 일. 그게 표심을 사로잡는 방법이거든.” 순간, 한예린의 동공이 커다래졌다. 나는 조수석을 향해 턱짓했다. “와인 마시기엔 기분이 조금 그럴 것 같고…… 맥주나 한잔할래요?” “……네?” “여기 근처에 세계맥주 집 있거든요. 다트 게임도 가능하고. 왠지 좋아할 것 같은데.” 이내 그녀의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진 사람이 쏘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