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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고 속이는 (7) (115/200)

속고 속이는 (7)2022.02.23.

“나 이 여자 아는 것 같은데?” “에이, 착각이겠지.” 최지성의 말에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형이 이 사람을 어떻게 알아? 정재계에 관심도 없으면서.” “미국에서 본 적 있어.” “미국?” “응. 작년인가 재작년이었나, 가물가물하긴 한데. 보스턴에 출장이 있어서 간 적이 있거든.” 보스턴이면 버클리 음대가 있는 곳인데. 뭔가 신빙성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직업이 직업인지라, 사람 볼 때 이목구비를 제대로 보거든.” 최지성은 엔터테인먼트 종사자라 확실히 직업병이 있긴 하다. 어지간하면 사람 얼굴은 잊지 않으니까. “그리고 이 여자는 눈코입이 완전 연예인상이라서 정확히 기억해. 내가 명함 건네려다가 말았다니까?” “예쁘다면서 왜 안 건넸어? 연예계는 얼굴이 최우선 아닌가?” “그렇긴 한데, 내가 감당이 안 될 것 같더라고.” “재벌이라서?” “아니, 그때 난 재벌인 것도 몰랐지.” “엄청 조신하고 단아하다던데?” “조신? 단아?” 최지성은 코웃음을 쳤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들으면 들을수록 더 궁금하다. “제대로 좀 설명해 봐.” “그러니까 어떻게 된 거냐면…….” * * * 2022년 보스턴의 한 스포츠 펍. 내부에 한 쪽에서는 다트 게임이. 다른 한쪽에는 커다란 스크린에 미식축구가 생중계되고 있었다. 그 펍으로 훤칠한 키를 가진 동양인 사내 하나가 들어와 바 자리에 앉았다. “뭐로 드릴까요?” “나초랑 시원한 맥주 한 잔 주세요.” “알겠습니다.” 대화는 모두 영어였다. 최지성의 발음은 능숙하기 그지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최지성뿐만 아니라, 최지훈을 포함해 6남매 모두 외국어엔 능통하다. 최지성은 해외 사업 때문에 자연스레 영어가 능숙해졌고. 나머지는 기본적으로 명문대 출신인 데다가 권좌에 오른 뒤에는 당연히 해외와의 소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최소한 영어는 필수였으니까. 그렇지 않고서야, G20 같은 국제 정상 회담에서 원활한 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 기본적인 회의 자리에서야 동시 통역사가 전부 대화를 중계해 준다지만. 공식석상이 아닌, 사담을 나누거나 농담을 주고받을 때 영어라도 되지 않는다면 소위 말하는 왕따가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막내 최지훈 같은 경우엔 단순히 영어뿐만 아니라, 독일어와 중국어 및 일본어까지도 충분히 회화가 가능한 수준이니까. “크으.” 최지성은 시원하게 맥주를 들이켜며 냅킨으로 입술을 닦았다. 스크린에선 룰도 모르는 스포츠에 사람들이 환호하고 야유를 퍼부었으며. 신나는 음악과 떠들썩한 분위기는 그의 기분을 홀리기에 충분했다. 출장 업무를 잘 마무리한 최지성은 그 여유를 즐기며 맥주를 한 잔 더 주문했다. 그렇게 한창 휴식을 즐기던 무렵. “아싸!” 어디선가 익숙한 감탄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다트 판 앞에서 한국인 여성 세 명이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최지성이 보기엔 한국 유학생으로만 보였다. 엔터테인먼트에서 10년 넘게 일한 덕분일까. 눈썰미 덕분에 슬쩍 손가락만 봐도 음악 하는 친구들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더욱 관심이 가서 맥주를 한 모금 마시며 지켜보는데. 문득 한 여성이 눈에 들어왔다. 셋 중에서도 단연 압도적인 미모. 단순히 예쁘다는 말로는 형용할 수 없었다. 아름다운 걸 넘어 어딘가 고귀하고 고결해 보이는 듯한 느낌. 일반적으로 길가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한 미인들과는 결이 달랐다. 최지성은 홀린 듯 지갑에서 명함을 꺼냈다. 직업 정신이었다. 저 정도 미모에 음악적 감각까지 있다면, 반드시 섭외해야만 하니까. ‘우리 소속사에서 데뷔시키면 무조건 대박이야!’ 명함 한 장을 쥐어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찰나. 휘이익-!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서양인 무리 중 하나가 휘파람을 불며 그녀들에게 다가갔다. “헤이, 프리티. 시간 있어? 나랑 놀래?” 캣콜링(Catcalling.) 대놓고 치근덕대는 모습에 당황할 법도 하지만. 여성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흥.” 아니, 오히려 코웃음을 치며 외면했다. 그러나 남자는 쉽게 포기할 생각이 없는지. “우리도 딱 세 명이야. 중국에서 왔어? 아니면 일본? 한국인가?” 끈질기게 들러붙었다. “너무 핫하다. 바디 라인이…….” 성희롱까지 이어지자, 여성은 살벌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얼굴도 길거리 시멘트 바닥에 갈린 것 같은 게 어디서 함부로 말을 지껄여?” 말로 끝이 아니었다. 그녀는 테이블에 있던 맥주를 그대로 남자의 머리 위에서 뒤집어 부어 버렸다. 순식간에 남자는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고. 여성은 눈을 똑바로 뜨며 말했다. “꺼져.” “이런 미친년이……!” 남자가 정색하며 손을 뻗기에. 최지성도 같은 한국인이기에 나서서 제지하려는 찰나. 휘익-. 쿵! “꺼지라고 했지!” 삽시에 거구의 남성이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그의 손목은 허리춤에서 이미 꺾여 있었다. ‘……뭐야?’ 최지성은 멍하니 그 모습을 지켜봤다.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남성의 동료들도 주춤했고. 그사이, 여성은 동료 두 명과 함께. “흥이 다 죽었네. 가자.” 자신의 가방을 들고 펍을 떠났다. * * * “그랬다니까?” “에이, 말도 안 돼.” “진짜야. 내가 사람 얼굴은 절대 안 까먹잖아. 확실하다니까.” “그러면 명함은 왜 안 줬는데?” “어떻게 주냐?” 최지성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상황에서 괜히 줬다가 오해받을 수도 있고, 또 그런 애들은 데뷔시켜도 문제야. 콧대가 높아서 한국 연예계 적응 못 해.” 그는 말해놓고 웃긴지 피식 코웃음을 쳤다. “하긴…… 지한그룹 외동딸이면 명함 줘도 의미는 없었겠다.” “그렇긴 하네.” “그나저나 너 왜 멀쩡하냐?” 그는 눈을 꿈뻑이며 물었다. “머리 아프거나 당황해야 되는 거 아니야?” “왜?” 나는 태연하게 되물었다. “매력 있는데?” 최지성은 진심으로 당황했는지 진지하게 되물었다. “너 그쪽이냐? 매 맞는 거 좋아하는…….” “에이, 무슨 소리야?” 질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일반 재벌들이랑 다르잖아. 화끈하고 독특하기도 하고.” “아서라. 그런 애들이랑 결혼하면 가정에서 혼나고 산다.” “그럴 리가.” 나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애초에 그럴 리가 없어. 형이 비슷한 사람 착각한 거겠지.” “아닌데…….” “맞다니까. 게다가 고 실장님이 굉장히 차분한 성격이라고 말씀하셨어.” “여하튼 조심해.” “알았어, 알았다니까.” * * * 여의도의 한 곱창전골집. “어, 최 비서관. 여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차가 밀려서요.” “괜찮아. 우리가 다 같은 일하는 사람들인데 이해하지.” 오늘 함께 저녁을 먹는 인물은 강선우 보좌관. 이치현 의원을 모셨던 보좌진 중 하나. “술 마실 거지? 소주 시켰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전골 위로 곱창이 살포시 얼굴을 드러내며 진한 향을 풍겨왔다. “그럼요. 곱창전골에 술이 빠지면 숟가락 드는 게 죄악이에요.” “그렇지?” 그는 끌끌거리며 내게 소주잔을 건넸다. “요즘 바쁘지?” “2월 중순에 들어서니 정신이 없네요.” “그래. 이제 슬슬 총선 준비 중이니 청와대도 정신없을 거야.” 강선우 보좌관은 내가 총선을 준비 중이란 걸 모르고 있다. 실제로 아직 나는 예비 후보자로 등록도 하지 않았기도 하고. 외부에는 여전히 보안을 유지하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선배님은 뭐하고 지내세요?” “나야 일자리 찾고 있지.” 그는 씁쓸하게 술잔을 채웠다. 이치현 의원이 실형을 벗으며 보좌진도 모두 백수 신세가 되었으니까. 그나마 9급 공채였던 김한나 비서만 홀로 국회에 남아 있을 터. 당연히 그녀도 다른 의원실로 옮겨졌다는 소식은 들었다. “선배님 정도면 좋은 곳에서 러브콜 많이 들어올 것 같은데. 아닌가요?” “여기저기 제안은 많이 들어오는데…… 영 당기는 곳은 없네.” 강선우 보좌관 정도면 나름대로 능력 있고 실력도 있는 인물이기에 가려면 얼마든지 거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그의 정치관이 맞는 의원을 찾고자 하기에 시간이 걸리고 있는 것이겠지. “다른 애들 근황도 궁금하지?” 그는 내 심리를 다 안다는 듯 말해 주었다. “광석현 비서는 대한당으로 갔고, 오태용 비서도 나처럼 구직 중. 한유라 보좌관은…… 말 안 해도 알지?” “네. 안 그래도 오늘 예비 후보자로 등록했더라고요.” “참 세상일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그는 아직 모르고 있을 것이다. 한유라 보좌관이 이치현 의원을 배신했다는 사실을. 실제로 알고 있는 인물도 많지는 않다. 기껏해야 대한당의 핵심 인물들 정도? “물론, 이해는 해. 근데 우리 이치현 의원님 지역구에 출마했다는 게 영 꺼림칙하긴 하더라고.”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술을 한두 잔 걸친 뒤에야 슬쩍 본론을 꺼냈다. 애초에 내가 오늘 강선우 보좌관과 약속을 잡은 이유. “선배님.” “응?” “저랑 같이 한 번 일해 보실 생각 없으십니까?” 그를 영입하기 위해서다. 이치현 의원의 부탁 때문이 아니다. 적지 않은 보좌진 중에서도 내가 눈여겨 본 인물은 강선우 보좌관과 김한나 비서 두 명뿐이었으니까. 다른 이들의 말에도 흔들리거나 유혹당하지 않고. 입이 무거우며 눈앞의 이익 때문에 흔들리지 않을 만큼 한 번 충성하면 계속해서 함께 갈 만한 충직한 사람이면서도. 업무 능력 또한 출중한 인물. 김한나 비서는 국회에 간 뒤에 데려와도 늦지 않다. 지금 데려올 인물은 강선우 보좌관. 한 명뿐이었다. “같이 일하자는 건…….” 그는 아직까지 상황 파악이 덜 되었는지. “청와대로?” 흠칫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거긴 힘들어. 나를 반기지도 않을 거고, 내 적성은 국회에 맞더라고. 무엇보다…….” 강선우 보좌관은 눈을 빛냈다. “언젠간 배지 한 번 달고 싶기도 하고.” “그러니까 저랑 같이 일하셔야죠.” 나는 씨익 입꼬리를 휘었다. “저 이번 총선에 출마할 겁니다.” 그는 툭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진심이야?” “예.” 나는 눈을 빛내며 대답했다. “종로에 출마할 겁니다. 민국당의 공천을 받기로 약속도 되었고요.” “허어…….” 예상치도 못했는지 그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그리고 이내 튀어나온 말은. “……미친놈.” 그는 잠시 고민하나 싶더니. “안 그래도 엊그제 이치현 의원님을 뵙고 왔거든.”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의미심장한 말씀을 하시더라고. 당신 같은 사람 말고 제대로 힘을 갖출 수 있고. 또 높이 올라갈 만한 사람의 손을 잡으라고.” 강선우 보좌관은 내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내가 만난 사람 중에 너보다 확실한 놈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문제는 따로 있지.” 무슨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종로라…….” 그는 헛웃음을 흘리더니. “까짓 거 한 번 가 봐야지. 안 될 거 있어?” 강선우 보좌관은 들고 있던 술잔을 단번에 비워냈다. “이제 최 비서관이라고 부르면 안 되겠네. 의원님이라고 부르면 되나?” “말 편하게 하세요. 어색해요.” “아니지.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직급이 있고 서열이 있는데.”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내게 깍듯하게 허리를 접었다. “앞으로 열심히 모시겠습니다, 의원님.” 굳이 내가 거절할 필요는 없다. 그저 나 또한 그에 대한 존중을 지키면 되니까. “저도 잘 부탁드릴게요, 보좌관님.” 강선우에게 손을 내밀었고. 그는 두 팔을 뻗어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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