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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고 속이는 (6) (114/200)

속고 속이는 (6)2022.02.22.

“뭐?” 아버지는 살벌하게 눈살을 찌푸리셨다. “민국당이라니……. 내가 잘못 들은 게냐?” “아닙니다. 제대로 들으셨습니다.” 나는 강단 있게. 그러나 건방지지 않으면서도 지조 있는 목소리로 다시금 말했다. “저는 민국당의 공천을 받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할 겁니다.” 아버지는 설명이 필요하다는 듯 미간에 힘을 주고 지그시 내 눈을 바라보았다. “당연히 놀라실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제 선택엔 이유가 있습니다.” “내가 납득하지 못한다면, 넌 출마할 수 없을게다.” 단순히 언성만 높은 게 아니라, 그의 목소리엔 노여움까지도 미세하게나마 느껴져 왔다. 그럴 수밖에. 아버지에게 대한당은 인생을 바친 정당이고. 민국당은 그 대한당에게 사사건건 태클을 거는 것도 모자라, 아버지의 정치 행보까지 방해를 하는 곳이었으니까. 나에게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가 이런 반응을 보일 것이라고는 예상했다. 그렇기에 더욱 완벽하게 준비해왔다. “아버지.” 천천히 호흡을 두 번 내뱉었다. 그의 눈을 똑바로 마주보고서 확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제가 출마할 지역구는 종로입니다.” 순간, 아버지의 동공이 확장되었다. “백태성 의원과 이미 이야기가 끝났습니다. 민국당 내부에서도 협의가 된 사안이고요.” 일순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크하하하하하핫!”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서재에 울렸다. “종로. 종로라…….” 그의 입꼬리는 거칠게 휘어졌다. “전상국 의원의 지역구에 출사표를 내던진 것이냐?” “예, 맞습니다.” “민국당의 바람에 따라 움직인 것이냐, 아니면 네 의지에 따른 것이냐.” “제 의지입니다.” 아버지가 원하는 대답이었을 터. 물론, 그게 사실이기도 하다. “제가 직접 민국당 백태성 의원을 만나서 제안했습니다. 작년 보궐 선거 직후부터 백태성 의원과 긴밀하게 접촉하였습니다.” “이유는?” “저는 이번에 당선되어도 초선입니다.” 내가 생각해 온 근거들을 일목요연하게 말했다. “대한당의 공천을 받아 그 텃밭인 전라도에서 당선된다고 한들, 그저 거수기에 불과할 겁니다. 서울이라고 한들, 아버지의 후광을 받았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을 거라 판단했습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셨다. “허나, 종로라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아버지의 후광을 기대할 수도 없는 곳이며, 대한민국 정치의 상징이라고 불리는 곳입니다.” “그렇지.” “당선만 된다면, 아무리 제가 초선 의원이라고 한들, 일개 국회의원 이상의 힘을 가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위험하고 어렵다는 건 인지하고 선택한 거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나는 눈을 빛내며 말했다. “허나, 지금 상황에서 아버지께 저를 증명하기 위해선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첫째 최지만은 서울시장에 당선되었고. 둘째 최지원은 대한당 당 대표 자리를 노리고 있다. 아무리 아버지께서 나를 밀어준다고 약속하셨다지만. 내가 활약하지 못한다면, 얼마든지 외면할 수 있는 게 이 정치판이니까. 아무리 혈육이고, 아버지라고 한들 믿고 손을 놓고 있다간 낭패 보기 일쑤다. 그는 내 결정이 합리적이라는 듯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만에 하나 실패했을 경우의 리스크는 알고 있겠지?” 민국당의 공천을 받은 이상, 이번 총선에서 패배한다면, 앞으로 대한당과 손잡는 건 꿈꿀 수가 없다. 나와 격돌했던 전상국 의원이 떡하니 버티고 있을 테고, 당연히 자신의 자리를 위협했던 인물을 반길 리 없으니까. 게다가 민국당에서도 위험성을 안고 투자했지만, 종로에서 패배한다면 나를 다음 보궐선거에서 공천해 줄 리 만무할 터. 결국 4년 간의 공백이 생기고 만다. 4년. 내 나이가 이제 겨우 26인 걸 생각하면, 큰 세월은 아니다. 허나, 아버지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야기가 다르다. 현재 74세. 4년 뒤에는 무려 78세다. 아버지가 오래 오래 사신다면 모르겠으나. 그의 흡연 상태나 음주 정도를 생각하면, 결코 90세, 100세까지 살 수는 없으실 터. 78세가 되고 나서야 내가 초선이 된다면,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자리 잡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지. 다시 말해 이번 총선에서는 반드시 당선되어야만 한다. 그래야 아버지의 후계 구도에 들 수 있을 터.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됐다.” 물론, 리스크가 큰 만큼 승리했을 때 얻는 것 또한 크다. 이번 선거에서 승리하게 된다면, 민국당에서 단번에 중진의원급으로 올라갈 수 있을뿐더러, 아버지의 신뢰도 얻을 수 있게 된다. 국회에서 발언권 또한 세지게 된다. 이는 단순히 민국당 내에서만 그치는 게 아니다. 정치에서 ‘종로’가 가지는 의미는 그만큼 크기 때문. 따라서 민국당과 불화가 생기면 얼마든지 대한당과 손을 잡을 수 있게 된다. 종로를 지역구로 갖고 있는 국회의원이라면, 그 어느 곳에서도 환대받을 수밖에 없는 구조니까. 이를 모를 리 없는 아버지였기에. “그래.” 어느 정도는 수긍하는 눈치셨다. “전상국 의원과 불화는 없고?” “예. 오히려 사이가 좋은 편입니다.” “아직까지는 그렇겠지.” 아버지는 일순 멈칫하며 내게 물으셨다. “혹시 둘째와 관련 있는 것이냐?” 당 대표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게 마음에 걸리신 모양. “아닙니다. 그 훨씬 이전부터 계획된 일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다.” “혹시나 오해가 생기지 않도록 조만간 직접 뵙고 말씀드리려 합니다.” “그래. 그게 나을 게다.” 정치라는 건 절대 단순한 구조가 아니다. 내가 쓰러뜨릴 상대긴 하나, 전상국 의원은 아버지와 굉장히 가까운 인물. 선거에서 승리하든, 패배하든 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차려야만 한다. 전상국 의원이 단순히 내게 꺾인다고 해서 정치판에서 물러날 위인이 아니니까. “잘 생각했다.” 아버지는 흡족스럽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리셨다. “감사합니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하고.” “예, 아버지.” 총선과 관련된 대화는 잘 마무리했다. 허나, 아직 남아 있는 게 하나 있었다. “그리고 아버지.”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말씀하신 선이라는 건…….” “그래, 맞선.” 아버지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젊은 친구들끼리 서로 소개해 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저 주선자가 어른들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지.” ……그게 불편한 건데요, 아버지. “내가 고 실장한테 받아 뒀는데, 어디있더라…….” 그는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사진 한 장을 꺼내 책상 위로 내밀었다. “지한그룹 딸내미야. 바이올린 전공하는 친구인데 정치나 경영에는 관심이 없어서 네 발목 잡을 일은 없을 게다.” “……일단 알겠습니다.” “자세한 건 고 실장이 알려 줄 게다.” “예.” 나는 사진을 확인도 않고 바로 주머니에 챙겨 서재에서 빠져나왔다. 나를 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최은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나왔니?” “어. 누나 들어오래.” “그래.” 최은실은 앞머리를 가다듬고 설레는 발걸음으로 서재로 향했다. 똑똑. “아버지~.” 간드러진 콧소리를 내는 최은실을 뒤로 하고 나는 홀로 2층 방으로 향했다. 맞선이라니. 정치에 신경 쓰기도 바빠 죽겠는데 연애할 시간이 어디 있다고. 머리를 쓸어 넘기며 휴대폰을 꺼냈다. 고태욱 비서실장에게 바쁘냐고 문자를 하나 보내자, 곧장 그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도련님, 연락하셨습니까? “네. 다름이 아니고, 방금 아버지와 이야기를 했는데 선을 보라고 하셔서요. 자세한 건 실장님께 여쭤보라고 하셨거든요.” -아, 제가 중간에서 주선했거든요. 휴대폰 너머로는 옅은 웃음소리가 전해져왔다. -죄송합니다. 조금 놀라셨죠? “많이 놀랐습니다.” -하하, 아무래도 막내 도련님을 아끼시다보니까 얼른 장가를 보내고 싶으신 것 같습니다. “아버지 심정은 이해합니다만…… 너무 갑작스럽네요.” -별 수 있겠습니까? 각하의 의지인데. 맞는 말이다. 당신께서 원하시면 이루어지는 게 대한민국이니까. -참, 사진은 받으셨습니까? “아, 네.” 나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사진을 꺼냈다. -키는 165cm에 얼굴도 예쁘고 몸매도 좋습니다. 도련님 취향을 알지는 못하지만, 아마 만족하실 겁니다. “예쁘긴 하네요.” 미모는 훌륭했다. 우아하고 단아하면서도 기품 있는 모습이 양반집에서 자란 규수라는 게 단번에 느껴졌다. -성격도 차분하고 버클리 음대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해서 교양도 있고요. “정치나 경영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던데요.” -맞습니다. 세속적인 것엔 크게 관심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문외한은 아니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세상의 흐름을 읽는 면에서 굉장히 밝으며 똑똑하다고 들었습니다. 듣는 것만으로는 가늠이 가질 않았다. -나이는 스물넷이고, 도련님보다 두 살 어립니다. “나이는 잘 맞네요.” -예. 내조는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게다가 지한그룹의 유일한 딸이니 예쁨도 많이 받으실 거고요. 지한그룹. 태무그룹보다도 한 걸음 앞선 재벌그룹으로. 우리나라에서 재계 순위 1위를 절대 놓치지 않는 그룹. 솔직히 다른 형제들이 결혼한 상대보다 훨씬 더 우월하다는 건 확고한 사실. 아니, 압도적으로 높다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경영권은 아들들이 가져갈 테지만, 경영권 경쟁을 하는 그룹도 아니었기에 커다란 걱정도 없었다. 조건만 따지면 압도적이었다. “언제 만나 보면 되겠습니까?” -각하께서는 총선 전에 한 번 뵈었으면 하는 분위기셨습니다. 당장 교제를 시작할 필요는 없지만, 선거 시작하고 당선되면 바빠질 테니 그 전에 보면 좋을 것 같다고 하셔서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날짜 한 번 체크해 보고 연락드릴게요.” -네, 알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도련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종료되었다.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문 너머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훈아, 들어가도 돼?” 넷째 형 최지성이다. “어, 들어와.” 그는 장난기 넘치는 얼굴로 씨익 입꼬리를 휘며 방으로 들어왔다. 딱 보아하니, 뭔가 알고 온 모양. “너 선본다며?” “은실이 누나가 말했지?” “어떻게 알았어?” “뻔하지, 뭐.” “그래서 언제 만나는데?” “글쎄. 아무래도 빠른 시일 내에 한 번 봐야 될 것 같은데.” “어유, 우리 막내 벌써 장가가는 거야?” “됐어. 선 한 번 보는 걸로 장가는 무슨.” “네 형들 전부 처음 선 보고 세 번 안에 결혼 상대 정했다.” “……어휴.” 최지성은 책상 위에 올려 둔 사진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며 얼굴을 들이밀었다. “이분이야?” “응.” 그는 눈을 연신 꿈뻑이더니 놀란 소리를 냈다. “어?” “예쁘긴 하지?” “응. 그렇긴 한데…….” 최지성은 한참 동안 이마를 꾹 누르고 턱을 매만지길 반복하더니 이내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나 이 여자 아는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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