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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고 속이는 (5) (113/200)
  • 속고 속이는 (5)2022.02.21.

    “밥 먹자.” 아버지는 담백한 말과 함께 밥을 한 술 뜨셨다. 사람은 많았지만, 달그락거리는 수저 소리 외에는 고요하게 느껴질 정도. 조카들은 넷째 지성이 형과 함께 근처에 갈비를 먹는다고 외식을 나갔다. 다른 형제들이 아니라, 최지성이었기에 가능한 일. 물론, 덕분에 식사 준비의 일손도 줄었고 시끌벅적하지 않아서 좋긴 했다. 밥공기를 절반쯤 비웠을까. 문득 아버지가 입을 여셨다. “지만아.” “예, 아버지.” 첫째 형은 즉각 수저를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서울시장 일은 어때.” “잘 맞습니다. 아무래도 국정 운영과 잘 맞는 것 같아요.” “도지사를 몇 년 했는데 당연히 잘 맞아야지.” “하하, 그렇긴 하죠.” “어려운 건 없고?” “괜찮습니다. 어지간한 문제는 제가 직접 케어할 수 있습니다.” “그래.” 아버지는 말을 할까 말까 망설이시다가 다시금 입을 여셨다. “현수는 왜 신촌대를 간 거야?” “그게…….” “선거 준비하느라 애들 교육에 신경 못 쓴 거니?” 최지만이 곤란해 하자, 첫째 형수가 대신 바통을 이어받았다. “제가 부족했습니다. 조금 더 잘했어야 했는데.” “과외비가 부족하면 말을 하지.” “아닙니다.” 첫째 형수는 애써 입꼬리를 휘며 말했다. “그래도 현수가 한국대가 가고 싶은지 올해 반수를 한다고는 하네요.” “반수는 무슨.” 아버지는 얼굴을 찌푸리며 숟가락을 놓았다. “둘째나 공부 잘 시켜.” “네, 아버님.” “그리고 지원이.” “예.” “요즘 전상국 당 대표랑 사이 안 좋다며.” “……이게 갑자기 오해가 생기다 보니, 제가 손을 쓸 수가 없어서요.” “당 내부가 소란스러우면 쓰나.” “죄송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집어삼키려고?” 최지원은 다른 형제들이 듣고 있어 망설이나 싶더니만. “예. 그럴 생각입니다.” 결연하게 입을 열었다. 잠깐만. 이 말은 최지원이 전상국 의원을 상대로 전면승부를 하겠다는 뜻인가? 이거 내가 쏘아올린 공이 아무래도 스노우볼링이 된 것 같다. 단순히 견제만 하고 신경 쓰도록 만들 생각이었는데, 최지원이 전상국을 상대로 당 대표 자리를 두고 경쟁까지 할 줄이야. 아버지는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전상국 대표 대한당에서만 30년 가까이 있던 사람이야.” “예. 그래서 저도 쉽지 않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처리하려면 제대로 처리해. 발목 잡히면 너뿐만이 아니라, 당 전체가 휘청거린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곤이.” “네, 네?” 최지곤은 입에 넣었던 전을 그대로 젓가락째 빼내었다. “넌 이 상황에 밥이 꿀떡꿀떡 넘어가?” “죄송합니다.” “제대로 준비는 하고 있는 거야?” “……총선 말씀이십니까?” “네가 총선 말고 준비할 게 뭐가 있어?” “아, 네. 뭐 나름대로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해서 당선될 수 있겠냐고.” “…….” “경쟁상대 성문종이야. 정신 똑바로 차려.” 만세당 성문종의 도봉구 출마는 이미 기정사실화 및 공론화까지 된 상태. 최지곤은 물론이고 성문종 또한 더 이상 발을 뺄 수가 없게 된 것이지. 선거에서 공동 승리라는 건 불가능하다. 결국 둘 중 한 놈은 패배해야 한다는 뜻이지. 둘에게 이번 선거에서의 패배는 단순한 낙선이 아니다. 성문종은 만세당의 대선 후보로 꼽힌 것도 모자라.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야당이 단일화까지 하며 밀어주었던 후보. 그러한 후보가 일개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에서 패배한다? 말도 안 되는 그림이지. 그렇게 되면 성문종이 다시 서울시장 선거나 대선에 출마할 수는 없을 확률이 크다. 지역구에서도 패배한 놈. 그것도 최준석 대통령의 삼남에게 패배한 인물이라는 꼬리표가 평생 따라다닐 테니까. 위험한 건 셋째 최지곤 또한 마찬가지다. 성문종이 승리한다면, 그와 만세당은 분명 ‘최 씨 정권에 대한 승리’로 포장하며 온갖 언론으로 정의구현이라는 등 불쾌한 단어들로 도배해 떠들어댈 게 뻔하다. 당연히 아버지가 어떤 반응을 하실지는 안 봐도 뻔하다는 뜻이지. 후계구도에서 쫓겨나는 건 당연할뿐더러. 넷째 형과 같은 취급을 받을 게 뻔하다. 평생 정계 복귀는 물 건너간다고 봐도 무방하지. 기껏해야 최지곤의 인맥을 통해 지방의 교수직이나 달 수 있으면 다행일 터. 그렇기에 이번 총선에서 셋째 형은 사활을 걸어야만 했다. “잘해.” 아버지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만에 하나 성문종 그 자식한테 지기라도 하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최지곤은 눈을 부릅뜨며 확신에 찬 목소리를 냈다. “무조건 이기겠습니다. 단순히 이기는 게 아니라, 완전히 콧대를 찍어 누르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아버지의 시선은 내게로 향했다. 그는 넷째 형은 찾지도 않았다. 자리에 없긴 했지만, 애초에 있더라도 관심을 주지 않았으리라는 건 확고한 사실. 오히려 지성이 형이 조카들과 함께 저녁 식사 자리를 피한 게 혜안이 아니었나 싶다. “지훈이.” “예, 아버지.” 총선이 얼마 남지 않은 만큼, 나 또한 관련 이야기를 하실 줄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 입에서 나온 말은. “너는 조만간 맞선이나 볼 준비 해라.” “……네?” 상상도 못했던 말이었다. “자세한 건 조금 이따가 이야기해 주마.” 입에선 차마 대답도 나오지 않았다. 아니, 갑자기 맞선이라니. 허어. 굉장히 당황스럽다. 넷째 형을 제외한 다른 형제들도 내 나이쯤에 결혼했다는 건 알고 있다. 전부 정략결혼. 허나, 그건 20년 전이다. 설마 나까지 이 나이에 장가를 보내려고 하실 줄은 몰랐는데. 내가 멍하니 눈을 꿈뻑이는 사이, 아버지의 시선은 다음 타깃 최은실에게로 향했다. “마지막으로 딸.” “네, 아버지.” 최은실은 눈을 연신 깜빡이며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겼다. “박 서방이랑 둘은 큰 문제없지?” “예, 없어요.” “없습니다, 장인어른.” “그래. 됐다.” 그들에게는 딱히 할 말이 없었던 모양. 아버지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식사를 이어가려 하셨다. 그런데 그때. “참, 아버지.” 최은실이 다시금 아버지를 붙잡았다. “왜?” “이번에 화성시장이랑 연계하느라 박 서방이 고생 좀 했잖아요.” 말하고는 연신 눈썹을 들썩거렸다. “그래서.” “다음 지방 선거까지 한 3년 정도 남았는데, 아무래도 수원시장은 할 수 있는 일 자체가 굉장히 적잖아요. 게다가 이번에 지만이 오빠도 서울시장이 되었고.” “결론이 뭔데?” “이이가 다음에 경기지사에 출마하면 어떨까 해서요. 경기도지사가 되면 서울시장이랑 같이 연계해서 진행할 수 있는 사업도 많아지고…….” 그녀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아버지의 표정이 이미 살벌하게 변하셨으니까. 호통만 치지 않으셨지……. “정신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아니다. 호통을 치셨다. “하나, 두 개 주면 만족할 줄 모르고 야금야금 욕심을 내려고 해?” “아니요, 아버지. 그게 아니고…….” “그 아이디어는 네 머릿속에서 나온 거야? 아니면, 박 서방한테서 나온 거야?” “그러니까…….” “박 서방.” “네, 네?” “시 의원 나부랭이 하던 놈 수원시장 앉혀 놨더니, 언감생심 꿈도 못 꿀 걸 노리고 있어?” “……죄송합니다.” “정신 차리고 하던 거나 똑바로 해.” “죄송합니다. 제가…….”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젓가락을 들다가 다시금 내려놓으시고는. “박 서방.” “예, 장인어른.” 그는 번쩍 고개를 들며 말했다. “자네가 그렇게 경기도지사가 되고 싶으면.” 아버지는 차갑기 그지없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사돈 보고 고 실장한테 사과부터 하라고 해.” “…….” 아버지는 그 말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첫째, 너부터 순서대로 들어 와.” “예, 아버지.” 최지만은 의자를 밀며 벌떡 몸을 일으켜 서재로 들어가는 아버지의 뒤를 따랐다. 남겨진 매형은 답답함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의 아버지인 박태원 의원은 한때 고 실장과 가까웠지만, 그를 배신하고 아버지의 비서실장 직을 꿰차려다가 실패하고 밀려난 인물. 물론, 최은실은 밀려나기 전에 그 집안과 결혼을 했다. 그러니 이 모양 이 꼴이지. “매제.” 그때 둘째 형이 고갯짓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나랑 바람 좀 쐬고 올까?” “예.” 둘은 마당으로 자리를 옮겼고. 최지곤은 홀로 담배를 태우러 베란다로 향했다. 며느리들 또한,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부엌으로 향했고. 결국 남은 건 최은실과 나, 단 둘. 그녀는 나를 보더니 씁쓸하게 입을 열었다. “너는 담배 피우러 안 가?” “식사 중에 가긴 어딜 가.” “그래.” 최은실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밥이나 먹자, 밥이나.” 그녀는 우악스럽게 반찬을 입에 넣었다. “누나.” 나는 잠깐 망설이다가 그녀에게 물었다. “화성시장이랑 연계한 게 뭐야?” “그런 게 있어.” 화성. 화성시라면……. 한 가지 사건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혹시 이치현 의원님 관련된 거야?” 최은실은 찔렸는지 움찔거리다가 되레 성을 냈다. “왜. 예전에 잠깐 의원실에서 일 좀 했다고 뭐라 하게?” 식사 전부터 아버지께 도움을 드린 게 있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하더니만, 이치현 의원을 몰아내는데 도움을 줬던 모양. “아니, 됐어.” 담배가 당겼다. “누난 밥 먹어.” 나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지훈아, 들어오라신다.” 최지곤이 서재 쪽으로 손짓하며 나를 불렀다. 나는 피우고 있던 장초를 짓이기고는. 흐읍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휘휘 손을 저어 담배 연기를 떨어내고 나서야 서재로 향했다. “아버지.” “왔느냐.” 아까 말씀하셨던 단어가 계속해서 머릿속을 맴돌았다. ‘맞선.’ 분명 이 독대에서는 그 이야기를 하시겠지. 허나, 아버지가 먼저 꺼낸 이야기는 그 주제가 아니었다. “총선 준비는 잘하고 있느냐?”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알고 계셨습니까?” “만 25세인데도 출마하지 않는 게 이상한 법이지.” 하긴. 아버지께서 예상하지 못하셨을 리가 없지. “공천 이야기는 마무리됐고?” “예, 지역구는 확정되었습니다. 서울에서 나갈 예정입니다.” “잘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둘째 놈과 전상국 의원의 문제는 신경 쓰지 마라. 내가 잘 이야기해 놓을 테니, 그래도 네 공천은 기존에 협의했던 대로…….” “아닙니다, 아버지.” 나는 단호하게 그를 마주봤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왜지?” 아버지는 까탈스러운 목소리를 내셨다. “아무리 너라도 전상국 의원의 마음이 상하면 공천 받는 건 쉽지 않을 텐데.” “제 공천은 이미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아버지께 아직 말할 준비는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언젠가는 밝혀야 할 일. 게다가 지금 타이밍을 놓치면 더 위험하다. “저는 대한당에서 공천을 받지 않을 겁니다.” “……뭐?” 순간, 아버지의 동공이 크게 흔들리셨다. “저는.” 호흡을 가다듬고. 자신감이 과하지 않게. 그러나 진정성 있게 목소리에 힘을 주어 말했다. “민국당의 공천을 받고 출마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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