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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고 속이는 (4) (112/200)
  • 속고 속이는 (4)2022.02.20.

    “어, 나 다 왔어.” 핸들을 꺾어 건물 입구로 들어갔다. “지금 올라갈게.” 차를 주차하고 있는데 웬 10대 소녀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뭐야? 움찔하며 차에서 내리기 무섭게. “에이, 뭐야.” “우리 오빠들인 줄 알았네.” 소녀들은 외면하며 다시금 주차장 입구로 돌아갔다. 눈을 꿈뻑이며 로비에 들어가자, 나의 형 최지성이 먼저 내려와 기다리고 있었다. 당황한 내 모습을 보았는지 그는 클클거리며 배를 잡고 있었다. “형, 쟤네들 뭐야?” “우리 애들 팬.” ……아. 연예인 기다리는 애들이었구나. “누가 엔터테인먼트 회사 아니랄까 봐. 그래도 태는 좀 나네.” 그는 내 말은 들리지도 않는다는 듯 눈을 빛내며 설명했다. “너도 알지? ‘블랙다이아’라고 밴드 있잖아. 남성 5인조 밴드.” “몰라.” “네가 모르면 어떡해? 얼마 전에 데뷔한 애들인데 요즘 진짜 핫해. 우리 회사 먹여 살린다니까.” “그건 둘째 치고 쟤네들은 설 연휴인데 집에도 안 가?” “오늘 오후에 라디오 생방송 스케줄 하나 있거든. 걔네 보고 갈 것 같은데.” “……어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래도 고마운 애들이야. 블랙다이아 덕분에 요즘 우리 회사 처음으로 흑자 전환했다니까. 덕분에 송하연도 우리 HS엔터에서 영입했잖아.” “걔가 누군데?” “……너 송하연도 모르니?” “내가 연예인을 어떻게 알아.” 그는 탄식을 내뱉었다. “누가 널 20대 중반으로 보겠니.” 새삼스럽지만, 이 형이 엔터테인먼트 사업 하는 건 아직도 적응이 안 된다. “본가 들어가기 전에 커피나 한잔하려고 왔더니만, 별 잔소리를 다 듣네.” “네가 말 상대 좀 해줘. 회사에서는 대표라고 또 온갖 똥폼 잡고 있느라 말도 편하게 못 한다. 그놈의 품격이니 위엄이니 이딴 거 지켜야 돼서 말이야.” 그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꾹 눌렀다. “형수랑 놀아. 아직 결혼한 지 1년도 안 된 신혼이면서.” “어차피 동거하다가 혼인신고만 한 거라 별로 달라진 것도 없어.” 그나마 우리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정략결혼이 아닌, 연애결혼을 한 인물. 거창한 건 귀찮다며 결혼식도 올리지 않았으니, 진짜 대단할 지경이지. 속세에 한이 없는 것 같으면서도 또 엔터사업엔 열성이니 내 형이지만 알다가도 모르겠다. “그래서 형수는 어떻게 하려고?” “오늘 출근이어서 일 끝나고 바로 삼성동으로 온단다.” “바쁘네.” “직장인들이 다 그렇지, 뭐.” 띵-. 그때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열렸다. 바로 탑승하려다가 한 여성이 타고 있어서 한 발 물러났다. 그녀는 우리를 발견하고는. “안녕하세요, 대표님.” 노란색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차분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어, 하연이 스케줄 가니?” “네.” “오늘도 파이팅하고.” “들어가세요.” 그녀는 꾸벅 인사를 하며 당당한 걸음으로 나왔다.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로 쭉 시선이 끌려갔다. 문득 그녀는 나를 흘긋 되돌아보더니, 반달 눈웃음을 짓고는 고개를 꾸벅이며 로비로 빠져나갔다. “반했냐?” “무슨 소리야.” 나는 정색하며 고개를 저었다. “난 저런 스타일 안 좋아해.” “그렇다기엔 너무 빤히 보던데.” “아니,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분명 어디선가 봤는데. 혹시 미래 문자에서 보았던 인물인가? “쟤가 송하연이야?” “그래. 요즘 잘 나가는 톱 4 여배우 중 하나야. 한시아, 유나희, 임은혜랑 어깨를 나란히 한다니까?” ……같이 말한 3명 모두 모르겠다. 학창시절이나 군대에 있을 때만 해도, 주변 전우들이 떠드는 탓에 어느 정도 연예인에 대해서 알고는 있었지만, 최근엔 국회와 청와대에만 가다 보니 겹칠 만한 분모가 아예 없었다. 띵-. 다시금 엘리베이터의 소리가 들리며 멈춘 곳은 사장실 앞. “녹차 두 잔만 가져다주세요.” “알겠습니다.” 여직원에게 짧은 말은 남긴 후, 우리는 사장실로 들어갔다. 현재 시각은 오후 1시. 적당히 잡담이나 떨다가 2시에 삼성동 본가로 출발할 예정이었기에 여유가 꽤 있었다. “참, 지훈아.” “응?” “그래서 이번에는 다른 형제들도 다 오는 거야?” “그럴 걸. 아마 손주들까지 다 부른 것 같던데.” “엄청 북적거리겠네.” “그렇지. 우리 조카만 10명이니까.” 새삼스럽지만, 많기도 하다. “그러고 보니까 올해 민수가 20살 아닌가?” 최민수. 나의 첫 조카이자, 최지만의 첫째 아들로 우리 아버지의 첫 손자 되는 녀석. “맞아. 수능도 봤을걸? 얼마 전에 시험 잘 보라고 초콜릿도 보냈거든.” “넌 지만이 형네랑 친한가 보네. 조카 수능도 챙겨주고.” “어쩌다 보니까.” 가까워지려 했던 건 아니지만, 작년의 서울시장 보궐선거 이후로는 최지만이 부쩍 내게 친근감을 느꼈는지 먼저 연락하고 찾아올 지경이기에 자연스레 조카들 소식까지 전해 들었다. “그나마 둘째 형보다는 첫째 형이 더 낫긴 하다.” “형도 그래?” “인간미는 있잖아.” 음흉하고 의뭉스러워 속내를 모르는 최지원보다는. 그나마 확고한 가치관을 갖고 있어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최지만이 낫지. 최지성은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손가락을 퉁겼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왜?” “작년 초까지만 해도 계속 너와 관련된 정보 달라고 하다가 2분기쯤부터 연락이 뚝 끊겼더라고.” 보궐 선거 직후다. 그때부터 내 뒷조사를 하고 견제할 생각을 접을 만큼, 호감이 커졌을 테니까. “그건 그렇고 넌 계속 청와대에 있을 생각이야?” “아니, 나도 이제 배지 달아야지.” “총선 나가려고?” “응. 딴 사람한텐 비밀이야.” “애초에 연락하는 정치인 자체가 없다. 내가 집안사람들이랑 절연한 걸 아나 봐.” “절연한 건 아니지.” “어쨌든 정치에 관심 없는 건 유명한가 봐.” “당연하지. 정재계에서 형 모르는 사람은 없을걸?” 무려 최준석 대통령의 아들 중에 정치를 하지 않으려고 결심한다는 건 어지간한 일이 아니니까. 무슨 무소유, 안빈낙도 정신의 스님이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돌았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 “형은 2세 계획 없어?” “글쎄. 요즘 노력은 하는데 아직 소식이 없네.” “이따가 내가 비타민 하나 줄게. 얼마 전에 명절 선물로 들어온 건데 어차피 난 안 먹거든. 이게 정력에 그렇게 좋다는 건데…….” * * * 삼성동 본가. “엄마, 저 왔어요.” 어머니를 향해 ‘엄마’라고 호칭하는 건 우리 형제 중 유일하게 최지성뿐이었다. 그만큼 다른 형제들과 달리 그는 격이 없고 허물없는 사이. “막내도 같이 왔어요.” “어, 아들 왔니?” “네. 어머니 오랜만이에요.” “그래. 잘 지냈지?” 어머니는 반갑게 우리를 맞이하셨다. “얼른 들어오렴. 안 그래도 간식 준비 중이었어.” 거실에 발을 딛기 무섭게. “막내 왔어?” “삼촌한테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삼똔 안뇽!” 다 큰 조카들부터 이제 막 말을 시작하는 막내조카까지. 실내는 아주 북적북적했다. 어찌나 사람이 많은지, 오늘은 가정부까지 전부 내보내고 경호원들만 저택 주변을 경계하도록 만들어두었을 정도니까. 조카만 열 명에. 형제들은 나 포함 여섯. 미혼인 나를 제외하고 며느리와 사위까지 다섯. 총 21명에 부모님까지 23명이다. “지훈이 왔네!” 늘 그렇듯 최은실은 친근한 척 나를 불렀다. “얼른 와서 과일 먹어.” “응.” 적당하게 대답하며 외투를 벗고 거실로 향했다. 다른 형제들은 이미 딸기를 하나씩 찍어 먹고 있었다. “늦었네.” 역시나 첫째 최지만이 친근하게 먼저 내게 포크를 건네며 말을 걸었다. “지성이 형이랑 같이 오느라고.” “어쩐지.” 최은실이 슬쩍 내게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막내야. 오늘 고 실장님도 오신대?” “아니, 안 오실 거야.” “그래?” 최은실은 눈에 띄게 반색하며 물었다. “응. 오늘은 안 그래도 가족도 많아서 오지 말라고 하셨거든.” “하긴, 오늘 같은 날 오면 정신없지.” 최지만은 심상찮은 말투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은실이 너는 요즘 뭐하고 다니는 거야?” “내가 뭘?” “지곤이랑 작당하고…… 지곤이 얘는 또 어디 갔어? 담배 피우러 갔나 보네. 어쨌든 지곤이랑 손잡고 무슨 작당 모의라도 한다며.” “그런 소문이 났어?” 그녀는 자연스럽게 시치미를 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난 모르겠네.” 그렇게 사담을 위장한 서로 떠보기와 변명하기를 이어 갈 무렵. 벌컥. 문이 열리며 아버지가 등장하셨다. 우리 형제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조카들 또한, 아버지를 향해 기립했다. 며느리들과 최은실은 자신들의 아이에게 인사하라는 눈치를 줬다. “할아버지께 인사해야지.” “안녕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배꼽 인사를 하는 꼬맹이들과 다 큰 조카들의 짧은 인사가 끝난 뒤, 어머니는 자연스레 아이들을 2층으로 올려보냈다. “아이들은 위에 가서 놀까?” 2층에도 방이 한두 개가 아니니, 알아서들 찢어져서 잘 놀겠지. 그런데 그때. “민수야.” 아버지께서 계단을 오르던 첫 손자를 부르셨다. 최지만의 장남. “예, 할아버지.” 아버지는 다가오라는 손짓을 했다. 최민수는 화들짝 놀라 후다닥 계단에서 내려왔다. “올해 20살이지?” “네.” “대학은 정했느냐?” “아, 네!” 그는 자신감에 가득 찬 얼굴로 대답했다. “신촌대학교 문화인류학과 붙었습니다.” 신촌. 대한민국에서 두 번째로 손꼽히는 대학교. 그러나 아버지의 입에서 나온 대답은. “못난 놈.” 역시나였다. “썩 올라가라.” 예상외로 질타를 받은 최민수는 영문도 모르고 기가 죽은 채 도망치듯 2층으로 사라졌다. “쯧쯧. 제 아비 닮아서 똑같이 이류 대학이나 따라갈 줄이야.” 아버지는 혀를 끌끌 차며 서재로 향하셨다. 그것도 잠시. 문득 발걸음을 멈추며 둘째 형을 향해 돌아섰다. “최지원.” “예, 아버지.” “현수가 올해 고3이지?” 둘째 최지원의 장남 최현수. “현수 공부 잘 시켜.”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아버지는 서재로 들어가신 뒤 문을 굳세게 닫으셨다. 아마 저녁때가 되어야 나오실 터. “어휴.” 최지만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들이 질타를 받았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을 터. “아버지께서는 언제까지 학벌주의로 사실는지 모르겠어.” “평생 가실 걸.” 최지원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벌써 일흔넷이셔. 바뀌겠어?” 최지만 또한 인정하는 사실이긴 하나, 그걸 한국대 출신인 둘째가 말하는 게 불쾌해 보였다. “맞다, 오빠.” 최은실은 눈을 반짝이며 최지만을 바라보았다. “왜?” “서울시장 하면, 원래 경기도지사랑 같이 한 팀이어야 편하지 않나? 일처리하고 협동하기도 편하고.” 바로 속내를 알아챈 최지만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박 서방 수원시장 잘하고 있잖아.” “아, 그게…….” 최은실의 남편, 박홍성이 무언가 말하려했지만, 그의 허벅지를 잡은 아내로 인해 입을 꾹 닫았다. 대답은 최은실이 대신했다. “다음 지방 선거까지 꽤 남았잖아. 기왕이면 수원시장보다는 경기도지사가 더 낫지 않겠나 해서. 게다가 오빠가 서울시장이니까 팁이라도 전수받으려고 했지.” 최지만은 말도 말라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너 아버지께서 뭐라 하실지 그림이 빤히 보이는데 또 욕심을 내려고 해?” 그는 박홍성을 바라보며 따지듯 물었다. “박 서방 아이디어야, 은실이 아이디어야?” “오빠, 당연히 내 아이디어지.” 최은실은 말도 말라는 듯 빠르게 덧붙였다. “게다가 이번엔 아버지도 괜찮다고 하실 걸?” “왜, 뭐 있어?” 그녀는 눈을 반짝이며 씨익 입꼬리를 휘었다. “아버지가 좋아하실 만한 걸 하나 구해 왔거든.” 순간, 그녀의 얼굴에 요사스러운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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