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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고 속이는 (3) (111/200)

속고 속이는 (3)2022.02.19.

“입에는 맞으십니까?” “예. 갈비찜이 상당히 맛있네요.” “다행입니다.” “각하께서 처음 청와대에 입성하신 이후로 제가 20년 가까이 이곳에서 근무했는데 처음 와 보는 맛집입니다.” “하하, 엊그저께 새로 오픈했거든요.” “아, 그렇습니까?” 형제 중에서도 나는 고태욱 비서실장과의 사이가 가장 좋은 편에 속한다. 다 성장한 뒤에 고태욱을 접한 다른 이들과 달리. 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고태욱을 만나 청와대에서 자랐으니까. 가까운 삼촌 같은 느낌이지. 물론, 그렇다고 쉬운 건 아니고 굉장히 어려운 상대긴 하다. “다름이 아니고, 제가 실장님과 관련된 소식을 하나 들어서요.” 숟가락을 들고 있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물론, 외부에 말하진 않았습니다. 다만, 실장님께 직접 말씀드리고 진위 여부를 물어봐야 할 것 같아 연락드렸습니다.” 고태욱 비서실장은 살포시 수저를 내려놓고 날 바라봤다. “어떤 일인지 알려 주시겠습니까?” “셋째 쌍둥이들과 관련된 일입니다.” 무슨 일인지 직감했다는 듯 그는 살포시 눈을 감았고. 나는 차분하게 내가 아는 걸 설명했다. “그 둘이 실장님의 막내따님을 치료하기 위한 연구에 투자를 했고, 그 외에…….” 신혜지의 통화 녹음본을 통해 알아낸 정보들. 내 이야기가 끝나기를 기다린 뒤에야 고태욱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혹시 어디서 들었는지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죄송합니다.” 물론, 그 출처는 말할 수 없었다. 불법적인 건 둘째 치고, 밑천을 드러낼 수는 없었으니까. “이해합니다.” 그럴 수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의 고민을 한 뒤에 고태욱 비서실장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우선, 막내도련님한테는 솔직하게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까놓고 말해서, 굳이 숨겨야 할 필요도 없는 내용이고요.” 그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보며 말했다. “제안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구체화된 것도 없고요. 그저 말뿐이고 실질적인 성과를 내진 못했습니다.” “예. 그건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궁금한 건.” 나는 고태욱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실장님의 의중이 어떤지입니다.” “제 뜻이라…….” “솔직히 말해서 만약에 된다면, 실장님의 입장에서 나쁠 게 없잖습니까?” “도련님.” 내 대답이 끝남과 동시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저는 각하를 모시기 위해, 한때 가족을 버린 적도 있습니다.” 기억났다. 아마 내가 태어나기도 전이라고 들었다. 당시 고태욱은 아버지께 충성하기 위해 자신이 죽었다는 흔적을 남긴 채 가족을 버리고 그림자 속에서 아버지를 도왔었지. 그때 그의 가족들은 고태욱이 죽은 걸로 알고 장례까지 치렀다고 들었다. 심지어 당시에 고태욱은 사망을 가시화시키기 위해 ‘고중혁’이라는 본디 이름이 담긴 호적을 버리고 새로운 신분을 만들어 지금의 고태욱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이니까. “물론, 지금도 저에게 가족은 굉장히 중요한 존재입니다. 제 목숨을 바쳐도 될 만큼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존재들이고요.” 그는 결연한 태도로 말을 덧붙였다. “허나, 제게는 그 가족들보다도 각하가 더 중요합니다. 제가 어떻게 되든. 아니, 제 가족에 대한 살해 협박을 받는다고 한들, 제 1순위는 대통령 각하시니까요.” “…….” “그렇기에 늘 각하의 의견을 따를 겁니다.” 그의 목소리에선 사뭇 비장함까지 느껴졌다. 마치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눈앞에 칼이 들어와도 충심을 저버리지 않는 모습이 겹쳐 보일 정도. 고태욱의 아버지를 향한 단심은 결코 꺾을 수 없다는 것이 느껴졌다. 다시 말해, 최은실과 최지곤의 비루한 제안 따위가 그를 흔들 수 없다는 뜻이겠지. 고 실장의 눈빛만 봐도 진심이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충분히 걱정하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고태욱 비서실장과 아버지가 가깝다는 걸 알고만 있을 뿐이지, 그 정도가 어느 수준인지는 가늠하지 못했다. 나는 물론이고, 우리 형제들 또한 마찬가지. 허나, 이 짧은 대화만을 통해서 그가 아버지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피부에 와 닿을 정도. 결국 한 마디로 정리하면, 고 실장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다. “일어날까요?” “예.” 우리는 식사를 마무리하고 주차장으로 나왔다. “타시죠. 여민관까지 태워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걸어갈게요. 소화도 시킬 겸 이 정도 거리는 걷는 게 낫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고태욱 비서실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문을 열었다. “저는 외부 미팅이 있어서 바로 가 보겠습니다.” “예. 조심히 들어가세요.” “또 뵙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꾸벅이며 먼저 청와대로 향했다. 돌아가는 길. 천천히 머릿속으론 이번 사건을 되짚었다. 최은실과 최지곤과 고태욱 비서실장이 엮인 건은 여기서 마무리. 고 실장은 걱정할 게 전혀 없다고는 하나. 그 쌍둥이들이 문제였다. 여전히 찜찜한 마음은 가시질 않았다. 혹여나 미래 문자가 왔을까 싶어서 휴대폰을 바라봤지만, 깜깜무소식이었다. 나한테 알려주지 않으려는 건지. 아니면 몰라도 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그렇다고 문자에만 의지할 수는 없었다. 조금 더 알아봐야만 한다. 나는 다시 휴대폰을 꺼내 마돈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도련님. “최은실과 최지곤의 공통분모를 중심으로 추가적인 조사 좀 해 줘. 아마 차명계좌로 움직인 걸 거라, 추적은 쉽지 않을 거야.” 다 세탁되었으니 존재를 알아내는 것조차 쉽지 않을 터. “강원랜드랑 미원제약 자금 흐름 참고해서 한 번 알아 봐.” -알겠습니다. * * * “안녕하십니까.” “어, 최 비서관. 오랜만이야. 잘 지냈지?” “그럼요. 의원님은 잘 지내셨습니까?” “당연하지.” 백태성 의원은 가볍게 내 손을 맞잡아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착석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나는 들고 온 쇼핑백을 슬쩍 그에게 건넸다. “에헤이, 최 비서관. 이런 걸 주면 어떡하나.” 그는 곤란하다는 듯 손을 저었다. “나는 빈손으로 왔단 말이네.” “뭘 바라고 드리는 게 아닙니다. 곧 설이니 명절 선물로 드리는 겁니다.” “에이,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백태성 의원은 못 이기는 척 쇼핑백을 받아들었다. 물론 내부를 들여다보지는 않았다. 프로 정치인다운 면모. 물론, 집에 가서는 무엇을 줬고, 어떤 가격대인지까지 꼼꼼히 살피겠지. 그게 또 정치니까. “다음엔 내가 선물함세. 오늘 식사는 내가 사지.” “하하,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일단 들게. 여기 문어숙회가 그렇게 쫄깃하고 맛있어.” “그렇습니까?” 나는 젓가락을 들며 자연스레 식사를 시작했다. “그나저나 이번 설에는 따로 가족끼리 모이는 건가?” “아무래도 삼성동 저택에서 모일 것 같습니다.” “역시 거기구먼.”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한창 때는 정치인들이나 기업가도 부르곤 하셨는데, 요새는 통 가족들 위주로 모이시는 것 같아. 게다가…….” 그는 한참 동안 옛날 일부터 시작해서 최근 국내 정치의 흐름 및 국제 정세 등 다양한 주제로 신변잡기를 한 뒤에야. “흠흠.” 헛기침을 하며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건 그렇고 총선 준비는 하고 있었나? “나름대로 하고는 있습니다.” “그래?” 그는 조심스레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진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했던 제안 말일세.” 언제 그 이야기를 꺼내나 했다. 애초에 오늘 식사 자리를 마련한 이유도 그 때문일 터. “예,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 민국당 간부진들이랑 깊이 토론해 봤네. 위험 부담이 있다고 반대하는 의원들도 적지 않았네만, 오래도록 설득한 끝에.” 그는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를 종로에 공천하기로 했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감사합니다.” “아니야. 오래 기다리게 해서 내가 미안하지. 처음부터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는 생각했어. 그런데 아무래도 시민들의 시선이 있기도 하고 또…….” 백태성은 변명 아닌 변명을 천천히 내둘렀다. 사실, 민국당에서도 이게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과거에 전상국과 격돌하여 백태성이 한 번 깨진 뒤로 민국당에게 종로는 신포도와 마찬가지였던 지역구. 그렇기에 대한민국의 제2 정당이라는 꼬리표를 떼지 못하고 있는 것이기도 했고. 청와대가 위치한 종로를 먹어야 대통령이 있는 여당과 어느 정도 경쟁이 가능한 법이었으니까. 내가 나서서 이기면 더할 나위 없이 좋고. 또 대통령의 아들을 영입해서 화합을 이루어냈다는 거창한 명분까지 생긴다. 물론, 실패해도 민국당에선 손해 볼 게 없다. 어차피 대한당이 차지할 지역구였기에 새로운 루키 하나를 밀어 줄 만한 시점이 조금 늦어지는 것뿐이니까. “조만간 우리 민국당 최고 위원들과 자리 한 번 마련함세.”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최 비서관이야 당연히 잘할 거니 걱정하지도 않네.” 그는 방긋 웃으며 내 술잔을 채워주었다. “참, 최 비서관.” “예, 의원님.” “자네가 한동안 청와대에서 근무했잖나, 총선에서 쓸 만한 보좌진은 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어떻게 할 생각인가?” 그에 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은 게 아니다. 우선, 가장 중요한 보좌관 중 하나는 마돈나를 등용할 예정이다. 이제 그림자 속에서 나와 세상의 빛을 볼 때가 되었으니까. 나머지 보좌진 후보도 어느 정도 점쳐 놓은 후보는 있었다. 내가 언제든 연락해도 영입할 수 있는 인물들. 다만, 얼마 전에 만난 이치현 의원이 남겼던 말도 있고. 또 내가 그의 의원실에서 일하며 다른 보좌진들의 능력이 출중한 건 알고 있었기에 그들을 끌어오는 방향도 어느 정도는 고려하고 있다. “인재 문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이미 다 구해 두었나?” “어느 정도 윤곽은 나온 상태입니다.” “그래?” 그는 반색하며 말했다. “역시 최 비서관이야. 준비성이 꼼꼼하구먼. 혹시나 아는 사람이 모자라면 내가 소개해줘야 되나 했거든.” “말씀만으로도 든든합니다. 감사합니다.” “만에 하나 필요하게 되면 연락하게나.” “예, 의원님.” 우리는 낮게 잔을 부딪치며 소주를 마셨다. “최 비서관.” 그는 잠깐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건 중요한 건 아니고 내 순수한 궁금증인데…….” “말씀하십시오.” “요즘 전상국 의원이랑 자네 둘째 형, 최지원이랑 사이가 좋지 않나?” “들으신 게 있으십니까?” “확실한 건 아닌데, 요즘 충돌이 잦다고 하더군. 대한당 내부 일이라서 의한회 소속 의원들도 쉬쉬하는 분위기긴 한데…… 내가 정치 경력이 이 정도 되었으면 대충 공기 흐름만 봐도 알잖나.” 역시나 백태성 의원도 베테랑 정치인이다. 아직 총선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알고 있을 줄이야. “어느 정도 알력 다툼이 있다고는 들었습니다.” “그래?” 그의 눈썹이 들썩였다. “이유가 따로 있나?” “그건 제가 차차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확실히 당내 사정이라 민감한가 보구먼.” “예. 아무래도 대한당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니 외부로 유출되는 걸 꺼려하시는 분들이 많아서요.”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백태성 의원은 코를 찡긋하며 어깨를 으쓱했다. “때가 되면 자네가 알려주지 않겠나?” “예. 늦지 않게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 술이나 한잔하자고.” 내가 잔을 들자, 그는 내게 부딪치며 넉살을 떨었다. “최지훈 예비 국회의원의 종로에서 승리를 위하여.” 나는 크게 웃으며 후창했다.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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