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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고 속이는 (2) (110/200)

속고 속이는 (2)2022.02.18.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최지곤이 대체 왜 미원제약 같은 괴짜스러운 곳에 투자를 하는 걸까. 아니, 괴짜스럽다는 단어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우악하고 위험한 연구소. 최지곤이 아무리 다혈질 섞인 괴팍한 성격이라고는 해도 생물학적 테러를 할 만한 인재는 아니다. 그렇다고 불로장생을 꿈꾸는 것도 아니고. ‘왜?’라는 질문에 도저히 그럴 듯한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 문제는 단순히 최지곤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일에는 분명 최은실도 연관이 되어 있다. 최지곤과 최은실이 함께 움직이는 정황은 이미 충분하게 포착이 되었으니까. 쌍둥이들이 대관절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지 전혀 가늠이 가질 않았다. 똑똑. 그때 노크소리와 함께 신혜지가 문을 빼꼼 열며 물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네, 들어오세요.” 늘 입던 오피스룩에 그녀의 트레이드마크 포니테일을 질끈 묶은 채인 신혜지다. 다만, 클립보드를 들고 다니던 평소와 달리, 그녀의 손에는 작은 USB가 하나 쥐어져 있었다. “비서관님께 하나 보고드릴 게 있어서요.” “뭔가요?” “도련님께서 아주 좋아하실 만한 내용입니다.” 그녀의 입가엔 자신만만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임지현 비서관님을 통해서 최지곤 의원님과 그 쌍둥이 누님의 최근 행적에 대해 조사 중이시라고 들었습니다.” 워낙 보통 건이 아닌 데다가 조사하는 데 꽤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리다 보니, 마돈나가 직접 공유를 해 준 모양. “그리고 비서관님께서 정말 반가워하실 만한 자료를 구했습니다.” 내 책상 위에 USB를 살포시 내려놓았다. “이게 뭡니까?” “최은실과 고태욱 비서실장이 접촉한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순간, 내 동공이 확장되었다. “대화 내용입니까?” “예, 맞습니다.” 신혜지의 입가엔 기세등등한 미소가 걸렸다. “둘의 대화 녹취록입니다.” “도청한 건가요?” “아니요. 통화 녹음본입니다. 최은실의 휴대폰으로 직접 녹음이 된 거고요.” 나는 USB를 들다가 멈칫하며 물었다. “어떻게 확보한 겁니까?” “운이 좋았습니다.” 신혜지는 겸손하게 대답했다. “제 고등학교 친구 중에 하나가 휴대폰 수리점을 하는데, 얼마 전에 최은실이 휴대폰 수리 접수를 했다고 하는데요. 파일을 복원하던 중에 이 녹음본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녀는 코를 찡긋하며 덧붙였다. “물론, 입수 과정이 적법한 건 아니기에 법원에서 쓸 수는 없겠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래도 쓸모는 있을 겁니다.” 고태욱 비서실장이 끼어 있는 이상, 언론에 공개되는 것도 최대한 지양해야 하니까. “잠깐만요.” 순간, 머릿속에 생각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통화 녹음 파일이면 설마 자동 녹음된 겁니까?” “예, 맞습니다. 실제 녹음본도 있고, 제가 직접 통화 내용을 문서화한 녹취록도 들어있습니다.” 순간, 내 눈에 광채가 일었다. “혹시 그러면 다른 파일도 같이 구할 수 없습니까? 최은실이 통화한 내역 전부 있으면 좋겠는데.” “저도 그럴 거라 생각해서 그 친구한테 다시 요청해 봤는데.” 그녀는 아쉽게 고개를 저었다. “확인해 보니, 휴대폰을 바꾼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아서 정치인들과의 통화 내역은 이게 전부였다고 합니다. 그 외에는 전부 사적인 일에 대해서 담당 비서실에 지시한 내용뿐이었습니다.” “행여 모르니 그 녹음 파일도 전부 받을 수 있을까요?” “안 그래도 그 USB에 넣어 뒀습니다. ‘기타’ 폴더 보시면 돼요.” “고생하셨습니다.” “아닙니다.” 신혜지는 꾸벅 인사를 하고는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고태욱 비서실장과 최은실의 대화 녹취록이라……. 나는 USB를 들어 올려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통화 내용이 무엇이건 간에, 우선 입수 정황을 보면 한 치의 거짓 정보 없는 사실임에 분명했다. 누군가의 공작이 들어갔을 리도 없고. 게다가 고태욱 비서실장은 어지간하면 나의 형제들과는 접촉하지 않는다. 최은실과 통화를 했다는 건, 심상치 않은 주제라는 걸 뜻하는 바. 더 지체할 것 없이 USB를 노트북에 연결했다. ‘기타’ 폴더에 들어 있는 음성 파일은 총 16개. 그 외에 따로 나와 있는 파일은 하나. 이게 신혜지가 말한 녹음본이겠지. 사흘 간 통화를 많이 하기도 했다. 이 중 쓸모 있는 게 하나뿐이라는 게 아쉽지만, 혹시 모르니 전부 확인해 볼 생각이다. 다른 이들이 놓친 걸, 알아챌 수도 있으니까. 물론, 그전에 고태욱 비서실장과 최은실의 통화 녹취록을 확인하는 게 우선이다. “후우.” 나는 긴장된 숨결을 가다듬고 녹음 파일을 재생시켰다. -여보세요? 제일 먼저 들려온 건 하이톤의 목소리. 최은실이다. 다시 말하면, 고태욱 비서실장이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뜻. 이건 짚고 가야 할 만큼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다. 그가 먼저 전화를 했다는 건, 대통령이 관심 있어 할 만한. 혹은 청와대에서도 눈여겨볼 만한 건수가 있다는 뜻이라고 볼 수 있으니까. -고태욱입니다. 통화 괜찮으십니까? -네, 실장님.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예. -요즘 안 본 지 너무 오래 되어서 얼굴도 까먹을 지경이에요. 한 번 꼭 봐야 되는데 언제 한 번 또 시간을 내서……. 용건만 말하는 고태욱과 달리, 최은실은 친근한 척 넉살을 떨어댔다. 가족들만 있을 때 고태욱 비서실장에 대한 강한 경계심을 드러냈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 지경. 최은실은 한참 동안 신변잡기를 한 끝에야 서론을 끝냈다. -여하튼 제가 꼭 한 번 찾아뵐게요. 기왕이면 사모님도 같이 뵈었으면 좋겠네요. -알겠습니다. -그나저나 무슨 일이세요? -다른 건 아니고, 혹시 요즘 셋째 도련님과 아가씨가 함께 움직인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어와서요. 무슨 사안 때문인지 말씀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돌려 말하는 것도 아닌, 직구 중에도 직구였다. -아……. 단순 녹음본이었지만, 그녀가 당황했다는 사실은 목소리에서 고스란히 느껴져 왔다. -그게……. 잠깐 망설이던 그녀는 결심을 했는지 결연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그냥 고 실장님이니까 솔직히 말씀드릴게요. -네. -실장님의 따님 때문이에요. -……뭐라고요? 그토록 강경하던 고태욱 비서실장의 목소리에 떨림이 느껴졌다. 그럴 수밖에 없다. 고 실장에게는 총 세 명의 자식이 있다. 올해로 서른하나 되는 첫째 아들과 스물여섯이 된 둘째 아들. 그리고 이제 스물두 살이 되는 막내 딸. 그 중에서 고태욱 비서실장이 제일 아끼는 건 막내 딸. 3남매 중 막내이자 유일한 딸이라서가 아니었다. 가장 애틋했으니까. 막내딸은 어렸을 적부터 발레를 해 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아이가 원해서 발레를 시켰고, 대학 또한 발레 전공으로 입학을 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 하지만 작년 초. 막내딸은 불행하게도 학교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음주운전 뺑소니 사고를 당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하반신 마비가 왔고. 어쩔 수 없이 발레를 포기하고 현재는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있다. 해당 뺑소니 가해자는 어이없게도 도주 중, 전봇대를 들이받고 현장에서 사망해버렸다. 탓할 사람마저 세상을 떠나니, 고태욱 비서실장의 입장에서는 화를 풀 방법이 없는 것이지. 그 만큼 고태욱 비서실장에게 막내딸은 가장 사랑하는 존재이면서도 애틋한 존재. 다시 말해, 최은실이 그녀의 이야기를 꺼냈다는 건 승부수를 던졌다는 뜻. 진실이든 아니든, 상관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고태욱 비서실장에게 거슬렸다가는 적으로 돌리는 건 한순간이 될 수도 있는 상황. -제가 이런 생각을 하면 조금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최은실은 차분하게 말을 시작했다. -지곤이와 함께 생체 의학 연구 쪽에 투자를 하고 있습니다. 미원제약과 관련된 이야기다. -그곳에서 줄기세포를 연구하고 있는데, 잘하면 사람 척수에도 적용을 할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만약에 그렇게 되면 따님도 다시 발레를 하실 수 있을 테고…….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주제넘으신 게 맞습니다. 고태욱 비서실장은 일말의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제 가족 일입니다. 아가씨가 관여할 바가 아니에요. -하아. 그렇게 말씀하실 줄 알았어요. 그래서 제가 은밀하게 진행했던 건데……. -그런 건이라면 은밀하실 필요도 없고, 진행할 필요는 더더욱 없습니다. 그러한 목적이라면 그만두십시오. -알겠습니다. 괜히 걱정만 끼친 것 같네요. 죄송해요. -끊겠습니다. 뚝. 그 대화를 끝으로 녹음본은 종료되었다. 고태욱 비서실장의 심기가 적잖게 불편해졌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굉장히 불쾌하다는 것도 알 수 있었고. 또 그 심정을 알 수 있었다. 최준석 대통령이 직접 나섰다면 모를까. 최은실 따위가 자신의 딸을 생각해 준다는 건, ‘동정’이나 ‘연민’으로 느껴질 가능성이 높으니까. 물론, 그렇다고 한들 최은실의 해명을 100% 믿을 수는 없다. 당연한 말이지만, 최은실 그 여우가 사실대로 털어놓을 리 없으니까. 아마 속이기 쉽도록 사실과 거짓을 적당하게 섞어서 이야기했을 터. 고태욱 비서실장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겠지.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전부 사실이라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되긴 한다. 물론, 그것도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고 실장을 포섭하기 위함이겠지만. 어쨌든 막내딸을 통해 고태욱 비서실장을 설득해서 그들의 편으로 끌어들이게 된다면, 최은실 쌍둥이가 아버지의 마음을 훔치는 데 굉장히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게다가 고태욱 비서실장은 아버지의 힘을 업고 실무진들과 접촉하며 실질적인 정책을 운용하는 등 적지 않은 실권을 갖고 있기에 언제든 큰 도움이 될 수밖에 없기도 하고. 또한, 거짓이 섞여 있다면 굉장히 훌륭하게 둘러댄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고태욱 비서실장이 기분이 나쁠 수 있다고 한들, 자식을 도와주는 것이기에 최은실에게 대놓고 화를 낼 수는 없었으니까. 잘 선택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아마 거짓일 가능성이 크긴 했다. 해외에서만 100억이 넘는 규모의 차명 자산을 운용하는 게 확인된 상황. 최지만과 최은실이 들고 있는 추정 자산을 합치면 최소 500억 원은 넘을 가능성이 높았다. 미원제약은 그 투자금을 소화할 만한 여력이 되지도 않으니까. 만에 하나 그걸 전부 투자했다고 쳐도 너무나도 과투자이기도 하고. 분명 다른 무언가가 더 있다. 그걸 빨리 알아내든가. 아니면 최지곤과 최은실 둘 중 하나를 조져서 그 계략을 쓰지 못하게 하든가. 둘 중 하나를 해야만 한다. 이렇게 된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예, 정무수석실 최지훈 정무비서관입니다. 고태욱 비서실장님 부탁드립니다.” -전화 바꿨습니다. “실장님. 접니다, 최지훈.” -아, 도련님. 무슨 일이십니까? “괜찮으시면 오늘 점심 같이 먹었으면 하는데…… 혹시 선약 있으십니까?” -오후 1시 미팅이 있는데, 조금 일찍이 한 11시쯤에 같이 식사하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때 같이 점심 드시죠. 제가 비서실로 가겠습니다. -아닙니다. 주차장에서 뵈시죠. “알겠습니다.” 고태욱 비서실장. 그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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