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략과 괴락 (3)2022.02.14.
“조카!” 미국에 다녀온 오성복 검사의 얼굴은 눈에 띄게 혈색이 좋아져 있었다. “잘 다녀오셨습니까?” “덕분에 잘 다녀왔지.” 그는 흡족스러운 듯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 내가 평소에 일 핑계 대면서 바쁘다고 가지도 못했는데 조카 덕분에 효도하고 왔네.” “아닙니다. 저도 업무 때문에 부탁드린 건데요.” “참.” 오성복 검사는 들고 온 쇼핑백을 내게 건넸다. “이거 받아.” “뭡니까?” “어머니가 주신 거야.” “고모할머니가요?” 의외였다. 나를 싫어할 줄 알았는데 선물을 주다니. “네 아버지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종손까지 미워할 필요는 없으니까. 당신께서 고맙다는 말씀과 함께 전해 달라고 하셨어.” “감사합니다. 안부 꼭 좀 전해 주세요.” “그래.” 나는 쇼핑백을 받아들며 물었다. “지금 확인해 봐도 됩니까?” “당연하지.” 내부에선 묵직한 병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 안에는 술이 담겨 있었는데, 그 중심부에 영롱하면서도 굵직하니 커다란 뿌리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혹시 이거…….” “맞아.” 오성복 검사는 흐뭇한 눈빛으로 말했다. “산삼주야.” “미국에도 산삼이 있습니까?” “나도 몰랐는데 있다더라고. 미국 산삼으로 담근 거라고 하셨으니까 좋은 날에 뜯어 봐.”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그래.” 나는 산삼주를 소중하게 진열장에 넣어 두었다. “그건 그렇고, 조카가 부탁한 일 조사는 조금 해 봤는데, 간단한 건은 아니던데?” “그렇습니까?” “응. 조금 알아봤는데 확실한 건 돈세탁을 하려는 건 아니었어. 오히려 이미 세탁이 된 검은 돈을 가지고 어딘가에 투자를 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운용을 하려는 것 같기도 하고. 아직 정확하게는 감이 안 오더라.” 오성복 검사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일단 알아본 건 여기 정리했어.” 3장짜리 문건을 내게 건넸다. “시간만 주면 한 번 자세히 알아볼게.” “천천히 확인해 주세요. 아직 급한 건 아니니까.” “그래. 알아내는 대로 연락할게.” “산삼주 잘 마실게요.” “그 말은 어머니한테 전해 드릴게.” 그는 코를 찡긋하며 오피스텔을 떠나갔다. 오성복 검사가 남기고 간 문건을 보며 최지곤의 행적에 대해 다시금 머릿속을 정리했다. 확실한 건 그가 미국에서 거액을 들고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 허나, 국내도 아니고 미국인 데다가 최지곤도 가족과 차명을 이용해서 돈을 운용하는 만큼, 추적이 쉽지는 않을 터. 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쉽게 가늠이 가질 않았다. 미국까지 가서 돈놀이를 할 리는 없고……. 최지곤 이 인간은 대체 무엇을 하고 다니는 걸까. 요즘 움직이는 걸 보면, 분명 최은실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은데. 어떤 생각을 품고 있고, 또 무엇을 하고 다니는지 모르니 더욱 위험하다. 아무래도 빠르게 후계 구도에서 제거하는 게 신상에 이로울 테지. * * * 똑똑. “각하, 고태욱입니다.” “어, 들어와.” 최준석 대통령은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놓으며 그를 반겼다. “왔나?” “예, 부르셨습니까?” 최준석 대통령은 내선 전화를 들어. “여기 커피 두 잔만 가져다 줘.” 짧은 말을 남기고는. “일단 앉지.”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잠시만 기다리게.” 커피를 기다리는 동안, 고태욱 비서실장은 천천히 가슴을 가라앉혔다. 최준석 대통령은 업무와 관련된 대화라면, 어지간해선 테이블로 내려오지 않고, 대부분 집무 책상 앞에 앉은 채 처리한다. 소파로 온다는 건 정말 길어지는 주제라거나, 사적인 일이라는 뜻. 잠시 후, 비서진이 커피 두 잔을 가져온 뒤에야 최준석 대통령이 입을 열었다. “고 실장.” “예, 각하.” “자네 아들이 몇 살이나 됐지?” “첫째는 서른, 둘째는 스물다섯입니다.” “첫째는 결혼할 때 됐네.” “안 그래도 조만간 여자친구 데려온다고 하더라고요.” “허허…… 좋겠네.” “좋기도 한데, 은근히 긴장되기도 합니다. 어떤 친구가 올지 감이 안 와서…….” “좋은 사람일 거야.”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최준석 대통령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지훈이도 슬슬 임자를 찾아야 할 것 같은데.” “장가 가기엔 아직 어리시지 않습니까?” 올해로 스물다섯. 일반적인 남자들은 군대를 다녀와서 막 대학 졸업을 준비할 시기다. “조금 빠르긴 한데…… 쿨럭.” 그는 잔기침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내가 더 나이 들기 전에 보내야 하지 않겠어?” “……아.” 최준석 대통령의 심정을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정계에서는 정략 결혼이라는 건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예전처럼 양측 부모가 상대를 짝지어 주고 무조건 결혼해라, 이런 식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이름 있는 집안의 자제들끼리 몇 번 만나 보고 그 중에 괜찮은 사람을 골라 결혼해서 서로 윈윈할 수 있도록 맺어 주는 것이지. 첫째 최지만부터 시작해서 둘째 최지원을 포함해 셋째 쌍둥이 최지곤과 최은실까지 네 명 모두 그런 식으로 혼사를 올렸다. 물론, 대통령에게 외면 받아 제 길을 가고 있는 최지성은 제외. 그렇기에 대통령의 자제들은 단순히 최준석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정재계에서 힘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대통령이 별세하고 나면, 최 씨 일가의 힘은 굉장히 약해진다. 다른 형제들이야 이미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 두기도 했고. 또 다른 집안과의 혼인을 통해 뒷심도 충분한 상황인 데 반해. 최지훈은 최준석 대통령이 사라지는 순간, 형제들 간의 싸움에서 힘을 쓰기가 굉장히 어려운 구도가 되고 만다. 최준석 대통령은 이를 방지하기 위해 미리 대비를 하는 것이었다. 특히나 자신이 살아 있을 때 막내의 결혼 상대를 정해야 제대로 된 집안과 맺어 줄 수 있을 테고. 또 그래야 후일을 겨뤄 볼 수 있을 테니까. “혹시 생각해 두신 집안은 있습니까?” “고 실장이 한 번 찾아 봐. 괜찮은 집안에 똑부러진 며느릿감으로.” “알겠습니다.” * * * 2023년 9월 1일. 매년 이맘때가 그렇듯, 정기 국회가 열리는 날이다. 의원실의 보좌진들은 8월부터 입안 준비로 바쁘고. 국회의원은 이제부터 본 회의실에서 치고받으며 싸우느라 바빠지겠지. 물론, 실제로 주먹이 휘두르는 일은 굉장히 드물고. 언성이 높아지며 삿대질을 하는 정도. 우리 청와대는 10월부터 바빠진다. 9월에 시작하는 정기국회는 총 100일간 열리는데, 국회에서 통과된 안건들을 10월부터 우리가 하나씩 처리해야 하니까. 다시 말하면, 지금은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시기라는 것. “굿모닝.” 김상진 비서관은 기분 좋은 목소리를 내며 휴게실로 입장했다. 양손에는 아메리카노 한 잔과 말아진 신문지가 들려 있는 걸 보니, 그 여유로움이 고스란히 전해져 왔다. “좋은 아침입니다, 선배님.” “어, 최 프로.” 그는 들고 온 신문을 내게 건넸다. “이거 한 번 봐 봐.” “뭐 있습니까?” “최 프로와 아주 눈곱만큼은 연관이 있을걸?” 뉴스에는 특이할 만한 게 없던데. “3면 보면 돼.” 그에게서 받은 신문의 세 번째 페이지를 펼쳐보았다. -최지곤 의원, 가족들과 사이좋게 야구장 관람…… 친근함이 물씬! 첫 줄만 보고도 한숨이 푹 새어나왔다. “어휴…….” 내 반응을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하하하핫!” 김상진 비서관은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자네 형인데.” “형은 형이죠. 근데 너무 노골적이니까요.” 기사는 최준석 대통령의 아들이 소박한 취미를 즐기고 있는 듯 서민들과 별반 다를 것 없이 가까운 듯한 느낌을 주도록 써 두었지만. 딱 보면 알 수 있었다. 기자가 몰래 찍어서 올린 게 아니라, 최지곤이 의도한 기사라는 걸. 내년 총선까지는 이제 막 반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성문종이 그의 지역구에 출마한다는 사실을 내가 처음 의한회에서 들은 지 꽤 된 만큼, 이제는 최지곤의 귀에도 들어갔을 터. 그걸 견제하기 위해 벌써부터 이미지 메이킹을 시작한 것이다. 내가 보기엔 눈꼴시지만, 또 이런 걸 좋아하는 시민들이 있으니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선배님.” “응?” “이번 정기국회에서 다룰 첫 안건에 대해서 들으셨습니까?” “대충 보기는 봤어. 무슨 유전자 사업 관련이던데?” “예, 맞습니다.” “첫 안부터 굉장히 어려운 건을 들고 왔더라.”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실, 나는 이미 그 안건이 나올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의한회에서 먼저 이야기가 나왔다. 그쪽에서 꺼낸 이유는 정책을 통과시키기 위함이라기보다는 돈을 벌기 위함이라고 봐야지. 까놓고 말해서 정치인 한 명만이라도 가깝게 지내면 주머니를 불리는 건 순식간이다. 그도 그럴 것이 국회에서 어떤 업종과 관련해 규제하는 법안이 통과되면 주식은 똥값이 되고. 그걸 밀어주는 법안이 통과되면 주식이 오르는 법인데, 그걸 사전에 알 수 있으니까. 의한회에 소속된 인물들도 그걸 알기에 차명 계좌를 이용하여 관련 주들을 사전에 매수했을 것이다. 그저 국회에서 토의가 되는 것만으로 주가가 들썩이는 게 시장의 원칙이니까. 그러다가 최종안이 규제가 세지는 방안이라면 미리 매도, 그게 아니라면 다 오르고 판매하는 등 엄청나게 챙기는 시기라고 봐야지. 정말 악랄한 방법이다. 말이 주머니 불리기지, 결국 개미들이라 불리는 서민들의 돈을 빼앗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난 이런 건 진짜 너무 머리가 아파.” 김상진 비서관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단순 줄기세포도 아니고 유전자 복제 및 복제견 등의 윤리적인 문제는 우리 측에서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시민연대들이 들고 일어나니까.” “맞습니다. 또 자칫하면 기업들과 과학계에서는 규제가 세다고 반항하기도 하고요.” 그때 문이 열리며 박성민 비서관이 휴게실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선배님.” 그는 손짓으로 내 인사를 받아 주었다. 휴대폰을 귀에 댄 채 어색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보니, 불편한 곳이랑 통화라도 하는 모양. “네네, 일단 확인해 보겠습니다.” 다행히 전화가 마무리되던 찰나였는지. “또 연락드릴게요.” 그는 짧은 말을 끝으로 통화를 마무리하고는. “어휴.”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그에게 타 줄 커피 믹스를 하나 뜯으며 물었다. “어디랑 통화하신 거예요?” “최지곤 의원실.” “거기서 왜요?” “아니, 이번 안건에 대해서 묻네. 청와대에서 미리 합의가 된 거냐, 어떤 식으로 처리를 할 거냐, 정무수석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냐. 엄청 세세하게 묻네.” ……왜지? 혹시 최지곤도 관련 주식과 연관이 되어 있는 건가? 의한회 사람들 중 그와 가까운 인물이 있으니, 정보가 빠져나갈 수는 있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이렇게 따지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데. 박성민 비서관도 영 꺼림칙하다는 듯 턱을 매만졌다. “평소와 다르게 최 의원이 꽤나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양이야.” 잠깐만. 설마 기업 내부와 연결이 된 건가? 그 순간. 지잉지잉-. 짧게 두 번. 미래 문자 특유의 진동이 울렸다. 나는 서둘러 종이컵에 뜨거운 물을 채우고는 박성민 비서관에게 건넸다. “선배님, 여기 드십시오.” “어, 땡큐.” 나는 슬쩍 뒤로 물러났다. “저는 먼저 일 보러 가겠습니다.” “그래.” 문을 열고 휴게실을 나서려는 찰나. “맞다, 최 프로.” “예, 선배님.” “오늘 점심에 정책실이랑 같이 밥 먹기로 했으니까 잊지 마.” “그럼요. 알고 있습니다.” “그래, 이따 보자고.” 그들을 뒤로하고 서둘러 내 사무실로 돌아왔다. 커튼까지 내린 뒤, 휴대폰을 확인하자, 역시나 미래 문자가 하나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평소 보던 문자의 형태가 아니었다. -보낸 이: 24 -[Web 발신] 649-02-185***. 한왕은행. 07/04. 17:25. 500,000,000원 송금완료. 잔여한도 (일): 250,000,000원. ……이게 대체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