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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략과 괴락 (2) (105/200)
  • 계략과 괴락 (2)2022.02.13.

    오후 7시. 청와대의 불이 하나씩 꺼지기 시작할 무렵.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신혜지가 들어왔다. “비서관님 바쁘십니까?” “아니에요. 마침 끝났습니다. 들어와요.” 보아하니, 퇴근 준비를 끝내고 기다리고 있던 모양. “부탁하실 일이 있다고 하셔서요.” “조금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우선 앉으실래요?” “아, 그러면 차라도 준비할까요?” “전 괜찮습니다. 혜지 씨 필요하시면 가져오셔도 되고.” “아닙니다.” 그녀는 부드럽게 눈웃음을 지으며 소파 맞은편에 앉았다. “편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우선 저는 혜지 씨를 100% 믿고 있다는 것부터 먼저 말씀 드리겠습니다.” 신혜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이젠 자신이 내게 완전한 신뢰를 얻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져 왔다. “감사합니다.” 나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 본론을 시작했다. “혜지 씨. 지금 당장 이직하거나 다른 부서로 전출 갈 계획은 없죠?” “네, 없습니다.” 그녀는 걱정스레 물었다. “혹시 제가 다른 곳으로 옮겨 가야 하나요?” 목소리에서 약간이나마 애태우고 있다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그렇지 않은 일로 굳이 불안에 떨게 할 필요는 없을 터. “아닙니다.” 나는 빠르게 부정했다. “혜지 씨는 계속 이곳에 남을 겁니다. 제가 정무수석실에 남는 한은 쭈욱.” “……아, 감사합니다.” 그녀의 입가에선 안도의 숨결이 새어나왔다. “다만, 제가 부탁드리고 싶은 건.” 나는 신혜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혜지 씨께서 성문종에게 접근했으면 합니다.” 그녀는 흠칫하며 되물었다. “접근하라 함은…….” “외설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성문종에게 접근해서 제 자료를 매개로 하여 그쪽 정보를 빼와 주셨으면 합니다.” 신혜지는 신중한 얼굴로 물었다. “이중 스파이를 하라는 말씀이신 가요?” “맞습니다.” 간단하게 정리하면. 성문종에게 신혜지를 스파이로 보낼 생각이다. 처음엔 꽤 가벼운 자료를 넘기며 서로 간 보는 척을 하다가. 점점 정보의 중요도를 올리고. 꽤 중요한 자료를 넘기며 성문종의 신뢰를 얻게 만들 생각. 그 후 성문종과 손을 잡은 척하면서 자료를 이쪽으로 빼돌리다가 핵심적일 때 뒤통수를 치는 게 최종 목적이다. 성문종이 어디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미래를 위한 보험을 들어 둘 필요는 있으니까. 물론, 그 보험을 쓰지 않는 상황이 오는 게 베스트 시나리오겠지만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성문종에게 넘기는 자료들은 그쪽에서 입수하더라도 우리 측에서 미리 대책을 세운 뒤에 유출할 생각이다. 괜히 잘못 유출했다가 오히려 내 발에 내가 걸려 넘어지는 건 스파이를 심어놓지 않느니만 못하니까. “흐으음…….” 신혜지는 진지하게 고민에 잠겼다. 그녀에게 강요하거나 압박을 할 생각은 없었다.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준 끝에야 신혜지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만에 하나 일이 잘못되면…….” 그녀의 입장에선 불안할 수밖에 없다. 충분히 그 심정은 이해가 되었다. 그렇기에 목소리에 확신을 담아 대답했다. “그땐 제가 모든 걸 책임지겠습니다. 혜지 씨 신상에 문제가 생기는 일은 없도록 하겠습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나를 위해 충성한 사람을 버리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안 된다. 단순히 신혜지를 생각해서만이 아니라. 내 사람을 버릴 수 있다는 걸 다른 이들이 알게 되면. 나의 수하들에게서 100% 충성을 가져올 수는 없는 법이니까. 신혜지의 신상에 이상이 생긴다면, 내 온 힘을 다해서라도 살려낼 것이다. 내 말에 믿음이 생겼는지. “알겠습니다.” 그녀는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들었다. “비서관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신혜지는 주먹을 꽉 쥔 채 결연한 말투를 냈다. “어차피 비서관님께 충성하기로 다짐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가볍게 입꼬리를 휘며 자세를 고쳐 잡았다. “우선 계획부터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처음엔…….” * * * “후우…….” 신혜지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떨리는 감정을 감출 순 없었다. 한국대학교 입학 및 졸업, 행정고시 수석 패스를 하며 오로지 꽃길만 걸어온 그녀에게 이러한 정치적 움직임은 처음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녀에겐 야망이 있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 싶은 꿈.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최지훈 비서관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정치권에 발을 들이면, 이러한 일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 첫 걸음이 바로 오늘일 터. ‘할 수 있다.’ 그녀는 룸미러를 통해 얼굴을 정돈했다. ‘최대한 태연하게.’ 신혜지는 심호흡을 하고는 운전석 문을 열었다. 차에 기대어 한 5분쯤 기다렸을까. 끼익-. 브레이크 소리와 함께 바로 옆에서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멈추더니 뒷좌석의 문이 열리며 성문종이 등장했다. “그쪽이셨구나, 날 여기로 부른 게.” “네.” 신혜지는 태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반가워요.” “얼굴이 꽤나 익숙한데, 우리 구면인가요?” “구면은 아니지만, 아실 겁니다.” 그녀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서 정무비서관의 사무관으로 일하고 있거든요.” 순간, 성문종의 눈썹이 들썩였다. 그러더니 이내 입꼬리가 거칠게 비틀어졌다. “왜 익숙한가 했더니, 최지훈 비서관과 같이 일하시는 분이셨네요.” “맞습니다.” “어쩐 일로 부르셨죠? 이러한 야밤에 부른 게…….” 그는 더러운 눈빛으로 스윽 신혜지의 몸을 훑었다. “그렇고 그런 의미는 아닌 것 같은데. 물론, 그렇다면 환영이긴 하지만요.” 신혜지는 미간을 찌푸리며 불쾌한 기색을 표했다.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건 만세당 특징인가 보네요.” “허허, 생각보다 입이 거치시네요. 저한테 제안을 하러 오신 줄 알았는데.” “말 그대로 제안이니까요. ‘부탁’이 아니라, ‘제안.’” 그녀는 되바라진 목소리로 말했다. “대등하지는 못하더라도, 끌려갈 필요는 없잖아요?” “그렇죠.” 성문종은 클클대며 웃더니. “당돌해서 좋네요.” 이내 눈빛을 돌변해서 말했다. “그래서 할 제안이 뭐죠?” “앞으로 정무수석실의 자료를 넘겨드리죠.” 그녀의 대답에 성문종은 흥미롭다는 듯 눈을 반짝였다. “원하는 건 뭡니까. 돈? 아니면 자리?” “사람.” 신혜지는 눈을 똑바로 뜨며 말했다. “정확히는 당신이라는 사람의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네요.” “하하하핫!” 성문종은 흡족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결혼을 원하는 건 아닐 테니, 좋은 자리를 원하시는 거겠네요.” 되도 않는 농담을 했지만, 신혜지는 흔들리지 않고 되물었다. “받아들이시는 건가요? 아니면 거절하실 건가요?” “내가 여기서 거절하면, 당신만 나가리 되는 거 아닌가?” 성문종은 태도를 바꾸며 강압적인 목소리로 반말을 하기 시작했다. “최지훈이 알게 되면 굉장히 곤란해질 텐데?” “글쎄요. 그걸 믿을까요? 아직 넘긴 자료도 없는데.” “그건 모르지. 최지훈이 당신을 경계하게 될지.” “그런 걸로 의심할 정도의 관계였으면, 내가 정보를 빼 올 거라는 딜을 걸지도 못했죠.” 신혜지는 오히려 반문했다. “지금까지 그런 이간질이 없었겠습니까?” 그녀의 목소리에선 여유가 넘쳤다. 만만치 않은 상대란 걸 깨달은 성문종 또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면 다시 한 번 묻지.” 그는 차에 기대며 물었다. “말하는 자료는 단순히 정무수석실에 한정된 건가?” “딜을 걸 때는 메리트 없는 걸로 딜을 걸진 않죠.” 신혜지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최 씨 일가에 대한 자료입니다.” “어떻게 빼내려고? 만만치 않을 텐데.” 신혜지는 대답하는 대신 입고 있던 외투를 벗었다. 푸시업 속옷에 굴곡이 드러나는 원피스. 요염하게 다리까지 살짝 꼬아 보이자, 그녀의 관능적인 매력이 도드라졌다. 그것으로는 모자랐는지, 신혜지는 뇌쇄적인 목소리를 냈다. “정치는 잘하는데, 샌님이더라고.” 원색적인 대답에. “크하하하하핫!” 성문종은 박장대소를 했다. “하긴,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입대하고 전역하자마자 정계에서 일했으니 그쪽으로 시간이 날 리가 없었겠지.” 성문종 또한 청와대에서 자라본 경험이 있기에 잘 알고 있다. 최지훈은 아주 어렸을 적부터 청와대의 보호와 감시 하에 자란 만큼, 밖으로 샐 여유도 시간도 없었으리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고민인가요?” “아니, 이 정도면 할 만하지.” 성문종은 흡족스러운 얼굴로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기대고 있던 차에서 일어났다. 신혜지는 다시 외투를 걸친 뒤, 주머니에서 USB 하나를 꺼내 성문종에게 던졌다. 떨어지기 직전, 아슬아슬하게 잡은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이건 뭐야?” “첫 거래 성사 선물입니다.” 그녀는 코를 찡긋하고는. “집에 가서 한 번 천천히 보시든가요.” 여유로운 말을 남긴 뒤, 차에 올라탔다. 이내 신혜지가 운전하는 차량이 시야에서 사라졌고. 성문종은 피식 웃고는 뒷좌석에 올라탔다. “출발할까요?” “어. 집으로 가자.” 그는 시트에 몸을 기댄 채 USB를 천천히 만지작거렸다. 운전석을 잡고 있는 인물은 평소의 수행비서가 아닌, 성문종의 오른팔 오재욱 보좌관. 그는 흘긋 룸미러를 보며 물었다. “어떠셨습니까?” “예상했던 대로였어.” “역시였군요.” 신혜지가 자신에게 발을 걸치려고 한다는 건 충분히 예상했다. 이 바닥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기로 하셨습니까?” “한 번 손잡아 보려고.”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위험성 없는 정치가 있나?” 성문종은 여유로운 목소리를 내며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모든 일은 리스크가 있는 법이야.” 허나, 오재욱 보좌관은 영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지, 조심스레 의견을 피력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최 씨 집안과 굉장히 긴밀한 사이의 사람이잖습니까?” “틀린 말은 아니지. 그렇다고 해도 지금 손잡아서 나쁠 건 없잖아?” 그는 탐욕스런 눈빛을 내며 음흉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못 믿겠다 싶으면 적당히 살만 벗겨다가 빼먹고 버리면 되니까.” 오재욱 보좌관은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은 적당히 이용해야지. 신혜지도 내 마음을 얻으려면 어떻게든 자료를 빼 올 테고, 그건 우리한테도 도움이 될 거 아니야?” 맞는 말이었다. 신혜지가 어떤 의도를 품고 있든 간에, 당분간은 실제로 성문종에게 도움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였으니까. “그러다가 나중에 믿을 수 있다 싶으면 그때 진짜로 우리 측 사람으로 넣으면 되지.” “하긴, 그게 맞는 것 같습니다.” 성문종은 여유롭게 입꼬리를 비틀더니 이윽고 숨기고 있던 더러운 야욕을 표출했다. “정 아니다 싶으면, 뽕이라도 맞춰서 노리개로 써도 되고.” “하긴, 약 한 번 맞으면 정신 나갈 테니까요.” “그래.” 성문종은 혀를 꺼내더니 탐욕스럽게 입술을 핥았다. “슬쩍 보니까 얼굴도 반반하고 몸매도 좋더라고.” “머리 회전 빠른 게 아쉽긴 한데…….” “이 판에 머리 좋은 사람은 널렸잖아?” “그건 또 맞습니다.” “그래도 우리 오 보좌관만 한 사람은 없지.” “감사합니다.” “천천히 지켜봐 보자고.” “예, 위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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