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략과 괴락 (1)2022.02.12.
“아무래도 다음 총선에서 말이야…….” 현종성 의원은 은밀한 목소리로 말했다. “도봉구에서 성문종이 출마할 것 같더라고.” “……성문종이요?” 나는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확실한 겁니까?” “90% 이상 내정된 거라고 들었어. 그래도 명색이 만세당의 대표 신예인데 서울로 들어와야 되잖아. 강남이나 중심부 쪽은 조금 빡세서 외곽으로 돌리려다가 결정했다더라고.” “허어…….” 탄성이 새어나왔다. 서울시 도봉구 갑. 해당 지역구의 現 국회의원은 나의 셋째 형 최지곤이다. 보궐선거 2년을 포함해 총 3선을 하여 내년 총선까지 총합 10년 간 도봉구를 지켜온 만큼, 다음 총선에서도 당연히 해당 지역구에서 4선에 도전할 게 뻔하다. 3선과 4선은 국회에서 갖는 의미가 다르다. 3선도 물론 대단하긴 하나, 그래도 국회에서 어느 정도 줄을 잘 서고 큰 잘못을 하지 않는다면 어느 정도는 가능하다고 본다. 허나, 4선부터는 이야기가 다르다. 단순히 당의 공천을 받는 것만으로 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후보자가 잘해야만 당선이 가능해지니까. 3선까지는 ‘못하지 않는’ 게 중요하다면, 4선부터는 ‘잘하고 도드라져야’만 시민들의 표심을 얻을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보궐인 경우를 제외하고 3선이면 무려 12년이다. 10년 이상 한 지역구에 머물렀는데, 발전되는 게 보이지 않는다면 마음이 떠날 수밖에 없기도 하고. 또한, 10년이라는 건 강산이 바뀔 만큼 긴 시간이기에 세대가 바뀌는 영향도 있기에 표심이 갈릴 가능성도 높으니까. 다시 말해 다음 총선이 최지곤에게는 그가 대한당의 중진의원으로 올라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할 수 있는 시기라는 뜻. 그런 상황에서 성문종이 경쟁자로 출마한다? 최지곤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큰 위협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아니, 아마 굉장히 위태로울 테지. 성문종은 단순히 만세당에서 공천을 받은 게 전부인 남자가 아니다. 무려 대선 후보로 꼽히는 인물로 지난 2023 중간 결산에서 2위를 차지했고. 아쉽게 패배하긴 했으나,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최지만의 목전까지 칼을 대는 등 저력을 보여 주었으니까. 그만큼 대단한 인물이다. 게다가 젊은 층들의 탄탄한 지지를 받고 있는 만큼, 어지간한 지역구라면 총선에서는 패배하기 힘들겠지. 그러한 힘을 갖고 있기에 대한당에서도 파워가 센 최지곤에게 맞서 출마하려는 것일 터. 그를 이기고 당선이 된다면, 국회에서 갖는 힘이 강력해지는 것뿐만 아니라, 대한당의 힘을 빼는 게 가능해질 뿐더러, 우리 최 씨 집안에 대한 복수라는 명분도 채울 수 있으니까. “최지곤 의원 입장에선 꽤나 난처할 거야.” 현종성 의원은 턱을 매만지며 말했다. “싸워도 승산이 낮은데 그렇다고 피할 수도 없으니까.” “맞습니다. 여기서 도망치면 꼬리 말고 내뺀다고 할 테니까요.” 최지곤이 새로운 지역구에 도전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지역구를 지키는 입장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지역구로 옮긴다는 건, 공성하러 온 적군이 무서워서 수성하던 병력이 내빼는 꼴이지. 성문종과 싸워 보지도 않고 지레 겁먹어서 도망간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었으니까. 아무리 최지곤이라도 그건 용납할 수 없겠지. 게다가 만에 하나 그렇게 한다고 하면, 아버지가 엄하게 꾸짖으실 테고 눈 밖에 나게 되겠지. 뿐만 아니다. 그를 10년간 국회의원으로 지지했던 도봉구민들도 그를 비난할 수밖에 없을 터. 도망치는 건 어불성설이란 뜻이다. “결국 지곤이 형은 죽으나 사나 맞서 싸워야만 할 텐데…….” “결과가 뻔해 보인다는 게 문제지.” “그렇죠.” 나는 씁쓸한 척 입술을 깨물었다. “지곤이 형이 이기긴 힘들 것 같습니다.” “냉정하게 보면 그렇지.” 현종성 의원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만에 하나 각하께서 도와주신다면 모를까…….” “그럴 리가요.”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각하께선 절대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그렇겠지.”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그나마 최지만 서울시장과 가깝지 않나? 그분이 도우면 가능성은 있을 텐데.” “그렇긴 하지요.” 현종성에게는 적당하게 대답했지만, 아마 최지만이 그를 도울 일은 없을 것이다. 지난번, 청와대에서 그가 나에게 말한 걸 미루어보아, 최지곤은 이번 선거에서 최지만을 돕지 않았을 확률이 굉장히 높다. 돕더라도 지지부진했을 터. 그러면 반대로도 최지만 또한 최지곤을 도울 이유가 없지. “여하튼 최 비서관만 알고 있어. 알았지?” “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그는 찡긋 웃으며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또 이야기하자고.” 화장실을 향해 자리를 옮겼다. 나는 홀로 창가에 앉아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성문종이 도봉구에 출마를 결정할 줄이야. 이건 대놓고 최지곤을 찍어 누르겠다는 소리다. 아마 버티기 힘들 테지. 셋째 형에게는 유감이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내게는 기회다. 그를 후계구도에서 날려 버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이 찬스를 놓칠 필요는 없겠지. * * * “어, 조카. 오랜만이네.” 간만에 오성복 검사를 찾아갔다. 그렇다고 거창한 술자리는 아니고, 잠깐 은밀하게 대화를 나눌 시간 정도. “요즘 일은 어떠십니까?” “뭐, 나야 늘 똑같지.” 그는 웃으며 담배를 물었다. “조카는?” “저는 요새 좀 조용합니다.” 나는 슬쩍 라이터를 꺼내 그의 담뱃불을 붙여 주었다. “조카도 내년 총선 준비한다고 했지?” “예. 확정은 아닌데…… 아마 그럴 가능성이 큽니다.” “지역구는?” “그것 때문에 문제라서요.” “하긴, 첫 공천이니까 지역구가 굉장히 중요하겠네.” “네. 나오면 말씀드릴게요.” “그래. 내가 도울 수 있는 건 도울게.” “감사합니다. 그런데.” 나는 슬쩍 물었던 담배를 내리며 말했다. “그 전에 하나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뭔데?” 오성복 검사는 인상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조카 부탁은 어지간하면 들어줄 수 있지.” “다음 주에 셋째 형수님…… 그러니까 최지곤 와이프가 미국행 티켓을 끊었거든요.” “어, 그래?” “네. 그래서 당숙이 한 번 따라가서 조사를 좀 해 주셨으면 해서요.” “수상한 거라도 있나?” 그는 기억을 떠올리나 싶더니. “내 기억으로는 최지곤이 아들이 미국에서 유학 중인 걸로 아는데, 그 조카 보러 가는 거 아니야?” “명목은 그렇긴 하죠. 다만…….” 나는 거칠게 입꼬리를 휘었다. “지곤이 형의 보좌관이 묘하게 여행 일정이 겹치거든요.” “……그래?” 순간 오성복 검사의 눈이 반짝였다. “형수님과 하루씩 일정 차이가 나긴 하는데, 장소는 똑같습니다. 미국의 오클랜드예요.” “오클랜드면 가늠 가는 게 없는데?” “예. 저도 뚜렷한 게 없는데, 제가 따라가기엔 너무 대놓고 미행하는 티가 나서요.” “그렇지. 차라리 내가 가는 게 나아.” 그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날짜 언젠데?” “다음 달 11일부터 4박 5일 일정입니다.” “조금 길긴 한데…… 연차 많이 남아서 문제는 없을 거야.” “감사합니다.” “고맙긴, 당연하지.” 그는 내 어깨를 툭 쳤다. 나는 담배를 아예 내려놓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안주머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오성복 검사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내용물이 달러라는 걸 알고 흠칫 놀란 눈치를 내보였다. “따로 해야 될 게 있어?” “그런 건 아닙니다.” “어유, 그러면 됐어.” 그는 봉투를 내밀었다. “얼마 전에도 활동비 줬잖아. 굳이 이것까진 안 줘도 돼.” “당숙께 드리는 게 아닙니다.” “응?” “확인해 봤더니, 오클랜드가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도시더라고요.” “…….” 순간, 그의 안색이 굳었다. “고모할머니가 캘리포니아에 계시잖습니까?” 나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간만에 뵐 수 있는 기회인데, 선물이라도 하나 사 드렸으면 해서요.” “……우리 어머니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데.” 애써 태연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선 감동한 빛이 가시질 않았다. 나는 오성복 검사가 내민 봉투를 다시금 그의 품에 넣어 주었다. “많지는 않습니다. 정성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고마워.” 그는 감복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내가 조카랑 함께하기로 결정한 게 잘한 것 같아.” “다행이네요.” 나는 코를 찡긋하며 말했다. “좋은 시간 보내고 오세요. 4박 5일이지만 앞뒤로 주말 붙이시면 고모할머니 뵈실 시간은 충분하실 겁니다.” “진짜 나한텐 조카밖에 없다.” 오성복 검사는 내 두 손을 굳건하게 붙잡았다. “진심으로 고마워.” “천만에요.” 들린다. 그의 충성심이 아주 더 굳건해지는 소리가. 아주 선명하게 들려온다. * * * “그러니까 결론은…….” 마돈나는 자신이 이해한 바가 맞는지 물었다. “이번 기회에 최지곤을 날리는 데 동참을 하시겠다는 뜻이죠?” “그렇지.” 형제들은 제거할 수 있을 때 제거해야 한다. 지난번에 최지만을 제거하지 못한 게 아쉽긴 하지만. 그렇다고 핏줄을 없애자고, 적에게 날개를 달아 줄 수는 없는 법이니까. “굳이 최지곤을 날릴 필요가 있을까요?”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가만히 냅둬서 누가 이기든 간에 저희에겐 일장일단이 있을 것 같은데.” “그렇긴 하지만, 성문종은 어차피 이번 선거에서 패배하더라도 재기할 수 있는 힘이 있어. 다만, 최지곤은 그렇지 않지.” 게다가 최지곤이 패배할 가능성은 굉장히 높다. 기왕이면 재기할 수 없는 쪽을 완전히 제거하는 게 내 미래에 도움이 되는 법이니까. “사실, 까놓고 말하자면 지금 상태에서 최지곤은 위협이 되는 상대가 아니긴 해.” 현재의 후계 구도에서 유력한 경쟁자는 첫째와 둘째. 허나, 첫째가 갑자기 치고 올라간 만큼, 셋째가 올라가지 말라는 법은 없다. 또한, 셋째 최지곤이 필요에 의해 다른 형제들과 손을 잡는다면 그 위력 또한 무시할 수 없을 터. 그리고 무엇보다 폭탄의 싹이 될 수 있는 형제들은 사전에 제거하는 게 나의 신상과 앞길에 훨씬 더 이롭다. 삼국시대부터 역사가 그렇게 말하고 있으니까. “무엇보다 성문종의 주요 비리들은 대부분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전부 까발려져서 최지곤 측에선 네거티브가 힘들 거야.” “반대로 성문종은 최지곤에 대한 비방을 할 테고요.” “그렇지.” 나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성문종이 당선되는 꼴이 달갑진 않지만, 지금은 여러모로 최지곤을 날리는 게 장기적으로 좋을 거야.” 사실, 위에 말한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다. 최지곤과 최은실이 합심해 무언가 일을 꾸미고 있다는 정보는 입수했지만, 그 모략이 어떤 것인지 모르기에 최대한 빠르게 전장에서 제거하는 게 좋을 것이기도 하고. 또 시기상 성문종을 날리기엔 너무나도 빡세다. 내년 총선이면, 성문종과 최지곤이 맞붙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때는 나 또한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도전해야 하는데. 보통 지역구도 아니고, 종로에서 혈투를 벌일 가능성이 높은 이 상황에선 다른 곳까지 신경을 기울일 만한 여력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니까. 무엇보다도 성문종은 내가 상대하지 않더라도, 앞으로 첫째 형과 둘째 형이 훨씬 더 맞대면하여 싸우며 힘을 빼 놓을 것이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아버지의 눈에 들기 위해서라도 성문종을 무너뜨리고 싶을 테니까. 그가 사전에 쓰러지면 좋고. 그렇지 않으면, 내가 대선에 나갈 때 즈음에, 형제들이 힘 빼 놓은 성문종의 도가니를 노려 한 방에 무너뜨리면 된다. 즉 지금부터 성문종을 견제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뜻. “다만, 혹시 모를 변수를 제거하기 위해서 미리 준비해 둘 필요는 있겠지.” 나는 씨익 입꼬리를 휘었다. “이건 내가 준비해 둘 테니까 지현 씨는 걱정 말고 다음 총선 대비에 신경 써 줘.” “알겠습니다.” 그녀를 뒤로하고 방으로 향했다. 곧이어 한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네, 비서관님.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 “어, 혜지 씨. 부탁할 일이 하나 생겼는데, 내일 일 끝나고 시간 되나요?” 그녀야말로 성문종의 담당 마크를 할 수 있는 인재 중의 인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