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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줄 (3) (101/200)
  • 핏줄 (3)2022.02.09.

    “조심히 가십시오.” “예. 또 뵙겠습니다.” “다음에 먼저 연락드리겠습니다.” 꾸벅 인사하는 최지훈 비서관을 향해 성문종은 깍듯하게 허리를 접어 인사한 뒤, 먼저 차에 올라 식당을 빠져나왔다. 그는 최지훈이 멀어지자마자 넥타이를 거칠게 풀며. “어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룸미러를 본 수행비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화가 잘 안 풀렸습니까?” “아니, 이야기는 잘 끝났어. 그런데…….” 성문종은 고개를 휘휘 저으며 등받이에 머리를 푹 기대었다. “안 맞아.” “……네?” “나랑 안 맞아. 대화 스타일도 그렇고, 뭐랄까…… 사람 냄새가 안 나. 속내가 전혀 안 보여.” “아, 좀 깐깐하고 철벽 치는 그런 유형입니까?” “아니, 단순히 그런 스타일을 넘었어. 겉으로는 굉장히 대화도 잘되고 잘 통하는 것 같이 보이긴 하는데…… 근데 이게 진심이 아니라는 게 느껴진단 말이야.” “다른 형제들도 그렇다고 들었습니다.” “최 씨 집안 내력인가 보지.” 성문종은 불쾌한 속내를 감추지 않고 이죽거렸다. “분명 무언가 있어. 알고 있는 게 있는데…… 도저히 무엇인지 예상이 안 가네.” “한 번 떠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떠봤지. 근데 넘어오는 줄 알았거든?” 그는 조소를 지었다. “넘어오는 척한 것이더라고. 보통 놈이 아니야.” 수행비서는 아쉬운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저쪽 도움은 받는 게…….” “불가능해. 그건 확실하지.” 성문종은 창가로 시선을 돌리며 낮게 읊조렸다. “굉장히 위험한 놈이야……. 등 뒤에서 칼이나 안 꽂으면 다행이지.” * * * 4월 5일. 본격적인 선거 기간에 돌입하며 매일 같이 지지율이 갱신되기 시작했다. 53 대 46. 지난번보다 격차가 근소하게 더 줄어들었지만, 사실상 미미한 수준이었기에 큰 의미는 없었다. 보궐선거 당일까지는 앞으로 2주. 좁혀질 듯 좁혀지지 않는 지지율 차이는 최지만에게 적지 않은 압박감을 심어 주고 있었다. 대한당의 공천을 받아 출마했기에 당선이 유력하긴 하나. 민국당과 만세당이 단일화를 하는 바람에 최지만의 목전까지 추격한 상태였으니까. 게다가 만에 하나 최지만이 이번 선거에서 패배할 경우, 그는 정말 끝이었다. 단순히 대통령의 후계자 구도에서 밀려나는 것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정치를 할 수 없는 상황이 될 수밖에 없다. 본업인 의사로 돌아가든가. 아니면, 해외로 나가 숨겨둔 비자금으로 연명하는 선택지를 골라야만 할 터. 일반인들의 입장에서 보기에, 며칠 내내 7~8% 차이가 유지되고 있는 데다가 최지만이 과반수 이상을 득표하고 있기에 선거 당일까지도 이러한 차이는 줄어들지 않을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 간극은 결코 크지 않다. 커다란 사건 한 방이면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 차이라고 봐야만 했으니까. “이대로 지켜보실 생각이십니까?” “글쎄…….” 고민스러웠다. 이대로 흘러가서 최지만이 당선되면 좋긴 하지만, 지금 상태에서는 간당간당한 수치였다. 게다가 근소한 차이라면, 민국당에서 단일화 및 성문종이라는 카드를 얻었기에 후일 내게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도 있다. 또한, 당선이 되더라도 차기 지방 선거에서 서울시장 자리가 위태롭기도 할 터. 물론, 그렇더라도 당선이 되면 다행이다. 만에 하나 특별한 변수로 인해 성문종이 당선되게 되면, 그건 일이 굉장히 꼬이게 된다. 최지만은 아웃되겠지만, 단순히 첫째 한 명이 나가리가 되는 것보다도. 서울시장이라는 자리를 야당에서 차지하게 되면 아버지께 불이익이 갈 수밖에 없다. 사사건건 태클을 걸기도 할 것이고. 야당에서 인지도 높고, 인기 있으며 힘까지 센 권력자가 탄생할 수도 있는 법이니까. 그렇기에. 나는 오랜 고심 끝에 결정을 내렸다. “아무래도 성문종을 날려야겠어.” “생각해 두신 계획은 있으십니까?” 마돈나는 걱정스러운 듯한 목소리를 냈다. “특별한 카드를 구하기엔 시간이 부족해서요.” 보궐선거까지는 2주. 새로운 조사를 하기엔 촉박하지. 허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새로 쥔 패를 쓰면 좋기야 하겠지만, 굳이 지금 손에 들고 있는 패를 아껴 둘 필요는 없잖아?” 순간, 마돈나가 눈을 번뜩였다. “혹시 도련님…….” “그래. 그 아껴 둔 거 써야지.” 작년 중순. JK컬처의 우현중 본부장에 대해 처음 조사를 착수하게 된 카드가 남아있다. 넷째 형 최지성의 제보로 알게 된, 우현중의 여배우 스폰 및 페이퍼 컴퍼니 자료. 그리고 그 우현중 본부장과 성문종이 굉장히 가까운 관계라는 증거는 미리 구해 두었다. JK그룹에서 만세당을 후원하는 건 정계에서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 또한, JK그룹은 이번 선거에서 대놓고 만세당을 후원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지원금이 페이퍼 컴퍼니의 돈세탁을 거친 결과물이고. 그 지원에 가장 앞장섰던 인물이자, 성문종의 최측근 중 하나는 여배우의 스폰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두 사실만 알려져도 기자들이 온갖 자극적인 기사들을 쏟아낼 테고. 또 끼워 맞추기를 하면 국민들은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에 아주 좋은 환경이 되겠지. “자료 준비해 둬.” “알겠습니다.” 마돈나를 뒤로하고 방으로 들어가 휴대폰을 들었다. 오랜만에 전화를 걸었다. -예, 비서관님! 휴대폰 너머에서는 힘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와 오래 전부터 함께 일하던 한정일보의 김태원 기자. -전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잘 지내셨죠?” -그럼요. 이번에 새로 보내 주신 화환도 감사히 잘 받았습니다. 정확히 따지면, 김태원 기자는 더 이상 한정일보에서 일하지 않는다. 동료들과 함께 팩트체커라는 언론사를 세워 그곳에서 기자 생활을 하고 있다. 몇 년 전에 미래 문자에서 본 내용대로 흘러간 것이지. “드릴 자료가 하나 있어서요.” -제가 가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주소 찍어 드리겠습니다.” -오랜만의 기삿거리에 벌써부터 몸이 달아오르네요.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전화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곧이어 최지만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무슨 일이야? “형, 바빠?” -잠깐 이동 중이야. 왜? “조만간 선물 하나 주려고 하는데, 언제가 좋아?” -무슨 선물? “형이 아주 좋아할 만한 거야.” 큰 걸 줄 땐 원래 생색도 조금 내야 하는 법. 상대방이 모르면, 선물을 준 의미가 없으니까. “이번 선거에서 승기를 굳힐 수 있을 만한 건이거든.” 나는 거칠게 입꼬리를 휘었다. * * * -[단독!] 성문종 정치 자금 중 주요 출처가 페이퍼 컴퍼니로 밝혀져…….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고 있는 야당의 단일 후보이자 만세당 소속인 성문종 후보의 주요 정치 자금원이었던 (주)시안홀딩스가 페이퍼 컴퍼니로 밝혀졌다. ……. 또한, (주)시안홀딩스의 김 아무개는 바지사장으로 알려져 있는데, 본지의 취재 결과 실질적인 대표는 JK컬처의 본부장으로 있는 우현중으로 확인되었다. 우현중 본부장은 JK그룹 우연상 회장의 장남으로 차기 JK그룹의 후계자로 지목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 한편, JK컬처의 우현중 본부장은 모 여배우의 스폰서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연예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 주었다. -팩트체커 김태원 기자. 당연한 말이지만, 실시간 검색어는 JK그룹과 성문종 및 만세당으로 도배되었다. 사실, 스폰 사실은 기사에 포함할까 말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내는 것으로 결정했다. 여배우에게는 미안하지만, 스폰을 받은 만큼 대가는 치러야 했으니까. 그녀가 부정하게 차지한 자리는 다른 누군가의 기회를 앗아간 것이기도 하고. 또 이러한 자극적인 내용까지 포함해 줘야 기사의 수명이 더 오래가기도 하며 더 많은 이들에게 기사가 전달되니까. 그 증거로 댓글은 폭발하고 있다. -와, 충격이네. -성문종 깨끗한 줄 알았는데. -└사실 성문종은 깨끗한 거 아님? 후원의 문제니까. -검은 돈 썼으면 아무튼 더러운 거임. -이래서 야당은 뽑으면 안 돼. -└인정. 잘 모를 땐 대한당 뽑는 게 정석임. -역시 최 씨 일가가 믿을 만하지. -최지만은 잘 몰라도, 최준석 아들이니 믿고 뽑는다. -아니, 님들 그래서 저 스폰 받은 여배우는 누군데요? -└조만간 TV에서 하차하는 사람 생기면 100%지 ㅋㅋ. 까놓고 말하면, 이번 사건에서 성문종은 죄가 없다. 굳이 트집을 잡자면, 더러운 물에서 놀고 있는 우현중 본부장과 가깝게 지냈다는 것 정도? 허나, 이러한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것만으로도 신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국민들이 보기에 나쁜 놈과 가깝게 지내는 인물이 깨끗해 보이진 않으니까. 단순히 성문종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이 정도면 내가 더 손쓰지 않아도 JK그룹 내에서 우현중은 방출되겠지. 아마 후계자 자리도 다른 이들에게 넘어갈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발악하거나 내게 덤비려 들면, 과거에 찍어 놓았던 사진을 쓸 수도 있고. 내게 대들었던 녀석의 최후다. 그러게 사람을 보고 까불었어야지. 지이잉-.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 왔다. “네, 최지훈입니다.” -막내야!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역시나 첫째 최지만. “어, 형.” -기사 봤다. 휴대폰 너머의 그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핫! 고맙다. 기대는 하고 있었는데, 생각했던 것 그 이상인데? “당연하지. 내가 일 허투루 하는 거 봤어?” -알지, 알지. 역시 우리 막내다. 고마워. “맨입으로?” -에헤이,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 텐션을 보아하니, 어떤 부탁을 해도 다 들어줄 모양새. -선거만 딱 끝나면, 내가 화끈하게 보답할게. “기대한다?” -그럼! 형이 스케일 한 번 보여줄게. “알았어.” 성문종이 당선될 바에야 최지만이 당선되는 게 여러모로 더 낫지. 언제 적대하더라도 다시금 화해할 수 있는 게 바로 ‘핏줄’이니까. “꼭 이겨.” -고마워, 우리 막내. * * * 65대 35. 성문종의 정치 자금 중 큰 축을 담당하는 곳이었던 (주)시안홀딩스가 페이퍼 컴퍼니라는 내용과 함께 검은 돈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격차는 순식간에 벌어졌다. 민심이 돌아서자, 최지만은 수월하게 표심을 가져올 수 있었고. 덕분에 그는 가뿐하게 성문종을 누르고 65%의 득표율을 가져가며 서울시장 선거에서 압승하는 데 성공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검찰의 수사를 통해 기사의 스폰서가 우현중 본부장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그는 완전히 후계 구도에서 아웃되었다. 뿐만 아니라, JK그룹까지도 큰 타격을 입은 상태. 내가 건들지 않아도 아마 JK그룹의 우연상 회장이 직접 우현중 본부장에게 철퇴를 내릴 터. 그게 재벌이니까. 지이잉-. 또 다시 최지만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네, 최지훈입니다.” -지훈아, 고맙다! “저번에도 그러더만, 또 그러면 민망해.” -아슬아슬하게 이겼으면 아버지 볼 낯이 없었거든. 근데 네 덕분에 당당히 얼굴 들 수 있겠어. “다행이네. 축하해.” -그래. 내가 언젠간 찐하게 보답할게. “알았어.” -참, 그리고 조만간 내가 청와대 한 번 들어가야 되거든? “아버지 호출이야?” -응. 요새 계속 어깨도 못 폈는데, 당당히 들를 수 있겠다. 여하튼 그건 중요한 건 아니고, 너도 요즘 청와대에 있잖아, 그치? “나는 여전히 정무수석실에 있지.” -그래. 가는 김에 한 번 보자고. 이번 주 토요일 날 점심쯤에 시간 돼? “어차피 그날 오전 근무니까 끝나고 남아 있을게.” -그러면 그때 보자. “들어가.” 그래. 이게 핏줄이고 진짜 혈연이지. 허나, 방심할 생각은 없다. 언젠간 내가 넘어야 할 산이니까. 다만, 지금은 웃어도 되겠지. 내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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