핏줄 (1)2022.02.07.
-말씀하신대로 조례 개정안은 취소하였습니다. “감사합니다. 귀찮게 해 드려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감사하죠. “요즘은 어떠세요?” -화요일마다 계속 의한회에 가고 있는데…… 거기서 한 달 동안 뵌 분들이 제가 30년 가까이 공직 생활하며 만난 사람보다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하하핫.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박병환 서울부시장의 목소리에는 활기가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1년 뒤에 공직에서 무조건 은퇴해야 된다고만 생각하던 사람에게 새로운 정치계라는 활로가 열렸으니 즐겁지 않을 수가 없겠지. -이 은혜는 제가 꼭 보답하겠습니다. “그건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당연하죠. 그는 흡족스러운 웃음을 흘렸다. -참, 비서관님께서는 의한회 한 번 안 오십니까? 자주 오시지는 않는 것 같던데. “간혹 시간 날 때 한 번씩 가는데 요즘은 쉬고 있습니다.” -다음에 오시면 긴히 말씀 나누시죠.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많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러시죠.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예. 들어가시고 건강하십시오. “부시장님도요.” 전화를 끊자, 내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박병환 서울부시장은 의한회에 아주 잘 적응을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덕분에 당분간은 서울시에 문제가 생기면 처리하긴 수월할 터. 게다가 지금 모습을 보면, 그는 지방에서 한 자리를 할 게 분명한 상황. 언젠간 그의 도움을 받을 날이 올 수도 있겠지. 사실, 정치판에서 먼 미래를 보고 투자하는 일은 쉽지 않다. 당장 주변에 무언가를 주면 성과를 낼 만한 인물들이 널렸기도 하고. 또 정치라는 특성상, 투자가 빛을 보지 못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으니까. 허나, 이렇게 씨를 뿌려 두면, 언젠간 도움이 될 가능성이 높을 터. 박병환이 어딘가에서 한 자리라도 맡으면 참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나는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테이블 위에 있던 서류를 만지작거렸다. JK그룹의 약점이 적힌 내용. 얼마 전, 넷째 형 최지성에게 들었던 여배우 스폰서와 관련된 페이퍼 컴퍼니 자료. 우현중 본부장이 만세당만 지지하는 게 아니라, 성문종에게 들러붙어 있는 게 영 아니꼬와서 자존심을 짓밟아 준 뒤, 조례를 취소해 주는 척하다가 다시 엿을 먹일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허나, 오랜 생각 끝에 나는 그 서류들을 서랍에 넣고 잠가 버렸다. 이미 우현중 본부장이 무릎까지 꿇은 마당에 그룹을 위협한다면 오히려 악에 받쳐서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니까. 천천히 더 묵혀 둘 생각이다. 이 바닥은 원래 묵혀 두면 언젠간 쓸 날이 오니까. 반드시. * * * 똑똑. “선생님. 2시 약속 손님 오셨습니다.” “어, 들어오시라고 해.” 손님이 들어옴과 동시에 의사 가운을 입고 있던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셨습니까?”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깍듯하게 인사를 하는 건 대통령의 오른팔, 고태욱 비서실장. 고태욱 비서실장이 달갑게 인사를 하는 건 물론, 존댓말을 쓰는 건 흔치 않다. 그러한 그가 깍듯하게 대하는 인물은 50대 중반임에도 머리가 하얗게 센 남자. 특별한 게 있다면, 직업이 의사라는 점. “네, 오랜만이네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정확히는 대통령의 주치의였다. 그는 테이블 위에 미리 준비해 둔 문서를 꺼내며 안경을 썼다. “전에 말씀드린 대로 최준석 각하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습니다.” “특별한 게 있나요?” 고태욱 비서실장은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 좋은 거라든가…….” “아니요. 문제가 있는 건 없습니다. 다만…….” 그는 엑스레이 사진 한 장을 장치에 걸어 보여 주며 말했다. “이건 췌장인데, 요 부분 보이십니까?” “네. 뭐가 나 있는 것 같은데…….” “작은 혹입니다. 물혹으로 추정되는데 0.5cm에서 0.6cm 정도로 매우 작아서 담당 의사의 소견으로는 굳이 조직 검사까지 할 필요성은 없어 보인다고 합니다.” “예. 그렇긴 한데, 이제 각하께서 꽤 연세가 있으셔서…….” “정 걱정되시면 CT 촬영을 진행해도 되는데, 보통 이 정도면 어지간해서는 문제가 없거든요. 정기적 검진만 꾸준히 하신다면 괜찮을 겁니다.” “아, 그렇습니까?” 고태욱 비서실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외에 특별한 소견은요?” “늘 그렇듯 혈압이 높고, 흡연량이 많으셔서 음식 짜게 드시지 않고, 담배를 조금 줄이셨으면 좋겠는데…….” 의사는 안경을 벗으며 씁쓸하게 물었다. “그건 힘들겠죠?” “예. 제가 말씀드려도 차라리 빨리 죽었으면 죽었지, 담배는 못 끊는다고 하시거든요.” “하긴, 워낙 애연가시니…….” 오죽하면 최준석 대통령이 공식 석상을 제외하고, B컷에서는 온갖 담배 피우는 사진들이 즐비한데, 또 국민들이 그걸 보고 친근함을 느낄 정도니 말할 것도 없지. “어쩔 수 없죠. 꾸준히 관리하는 수밖에. 그 외에 특이한 건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고태욱 비서실장이 떠난 뒤, 대통령 주치의는 슬쩍 휴대폰을 꺼내 한 곳으로 전화를 걸었다. -네, 여보세요? 휴대폰 너머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 “예, 최 여사님.” 대통령의 유일한 딸, 최은실이었다. “방금 막 비서실장님 다녀가셨습니다.” -어떻게 됐어요? “잘 전달했습니다. 별다른 의혹은 없으시고, 해당 유전자는 다음 조직 검사 때 주입하도록 하겠습니다.” -잘하셨습니다. 고생했어요. “그러면 제 해외 이민 준비는 혹시…….” -착실하게 되고 있으니 걱정 마세요. 말씀하신 대로 망명이 아니라, 이민으로 진행 중인데 아마 잘 마무리될 겁니다. “감사합니다.” * * * 지방 선거와 서울시장 당선인의 죽음 때문일까. 2022년은 그 외에 커다란 이슈 없이 지나갔다. 그리고 맞이한 2023년. 대한민국에선 2010년도에 대통령이 4년 중임제로 바뀌며 2년마다 있는 중간 결산이라는 걸 하게 되었다. 미국의 중간 선거와는 다른 개념으로. 차기 대선에 대해 미리 가늠해 보는 공식적인 추산이라고 보면 된다. 지난 18대 대선. 즉 2021 대선에서 아버지는 86.1% 득표를 하셨고. 2위였던 민국당은 6.2%를 얻었는데. 이번 2023 중간 결산에서 아버지는 87.5%. 민국당은 5.2%. 그리고 만세당의 성문종이 7%를 획득했다. 사실, 아버지의 지지율은 1.4%가 더 증가한 압도적인 수치였다. 아마 스스로 내려오려는 의지를 품으시기 전까지 대한민국 최준석 통치 체제에서 변하지 않겠지. 다만, 걸리는 게 있다면, 만세당의 지지율이 문제였다. 만년 차기 주자였던 민국당을 꺾고 만세당이 2위로 올라섰으니까. 그렇다고는 해도, 대권에 도전할 수 있다고 보기엔 역부족이었다. 허나, 성문종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민국당이 힘을 전혀 못 쓰고 있는 건 또 아니었다. 어차피 최준석 대통령이 살아 있는 한, 민국당에서 대권을 거머쥐는 건 불가능하기에 괜히 나갔다가 참패해서 흑역사를 세울 바엔, 권좌가 공석이 되는 타이밍만을 노리고 있었으니까. 2023 중간 결산의 결과는 결국. 만세당의 성문종이 떠오르고 있다는 것 외에, 커다란 정치적 이슈는 없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오히려 아버지의 건재함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모습이라고 봐야지. 그리고 찾아온 4월. 기다리고 기다렸던 지난 지방 선거의 보궐선거가 시작되었다. “확실히 이번엔 선거 구도가 바뀌긴 했네요.” 마돈나의 말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확실히 젊은 피가 많아졌어.” 작년 말, 만세당과 민국당의 합심으로 피선거권 연령 제한 법은 개정되었다. 지방자체단체장은 만 18세부터. 대선은 만 35세부터 출마가 가능해졌지. “물론, 그렇다고 해도 당선 구도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 같긴 해요.” “그렇지. 이번에 대한당에서는 울산광역시 울주 군수에 22살이 출마했다며?” “예. 그렇긴 한데, 어차피 민국당 텃밭이라 대한당에서는 얼굴이라도 알리려고 출마시킨 것 같아요. 당내 최연소 출마자니까.” “그래. 출마하는 데 의의를 둔 거겠지.” 청년들의 정치 참여를 늘린다, 뭐 이런 식으로 정당이 고여 있지 않고 신선한 피가 유입되며 활발하게 돌아간다는 걸 국민들에게 보여 주는 정도. “어차피 다른 곳은 커다란 변수도 없고, 있어도 대세에 영향을 끼치진 못해.” “그렇죠.” “제일 중요한 건…….” 보궐선거의 자리 중에서도 정치권의 이목을 한눈에 끌고 있는 건 단연 ‘서울시장’ 자리. 박병환 권한대행이 이끌고 있는 서울시의 바통을 누가 이어받을 것인가에 대하여 매일 같이 뉴스가 쏟아지고 있었으니까. 이전에 들었던 대로 둘째 형, 최지원은 출마를 포기했다. 괜히 아버지의 눈 밖에 나기 싫은 거겠지. 결국 대한당에서는 최지만이 공천을 받아 출마했고. 민국당과 만세당은 야권 후보 단일화라는 명목을 내세워 ‘성문종’이 출마하게 되었다. 2023 중간 결산의 영향이 컸던 탓이다. 민국당에서는 원치 않는 선택이었겠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택했을 터. 그도 그럴 것이 민국당과 만세당의 표가 갈리면 당연히 최지만이 승리하게 되는데. 그들의 입장에선 다시는 서울시를 여당에 넘기고 싶지 않았을 테니까. 사실, 성문종이 대권 중간 결산에서 획득한 표가 7% 남짓이라 굉장히 작아 보이지만. 그건 상대가 최준석 대통령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선방한 셈이지. 따라서 다른 후보와 맞상대하면, 성문종은 굉장히 무서운 상대가 된다. 그 증거로 현재 서울시장 보궐선거에서 최지만과 성문종은 54대 46으로 10% 차이도 나지 않는 근소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으니까. “도련님. 이 구도가 괜찮은 겁니까?” 마돈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최지만이 당선되면 이후 경쟁에서 꽤 힘들어질 것 같은데…….” “나한테 마냥 좋은 건 아니지.” 그가 서울시장에 오르게 되면, 다시금 재기할 수 있는 정치적 기반이 마련되는 것이니까. 허나, 최지원이 출마를 포기하고 양보한 상황에서 최지만이 낙선하면, 그는 후계 경쟁 구도에서 완전히 아웃이다. 아버지가 국외로 쫓아낼 가능성까지도 있지. 그러면 자연스레 경쟁 구도는 최지원과 나로 좁혀지게 되지만, 다른 의원들이라는 기반이 둘째에게로 쏠릴 가능성이 크다. 낙선하는 게 마냥 좋은 건 또 아니라는 뜻. “게다가 최지만이 남아 있어야 또 최지원이랑 서로 견제가 될 거거든.” “그건 또 그렇겠네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성문종이 당선되는 것보단 우리 형제가 당선되는 게 낫지.” “……아아.” 마돈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최지만이 마음에 들지는 않아도, 어쨌든 대한당이고 또 같은 핏줄이다. 성문종이 될 바엔, 차라리 최지만이 되는 게 낫지. 그 인간이 득세하는 꼴은 보고 싶지도 않고. 또 서울시를 뺏기게 되면, 일이 어떻게 꼬일지 모르는 법이니까. 그런데 그때. 지이잉-.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 왔다. “모르는 번호인데.” “나가 있을까요?” “아니, 괜찮아.” 우선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최지훈입니다.” -안녕하십니까, 비서관님. 휴대폰 너머에서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 -성문종입니다. 이 인간이 나한테 전화를? 일단, 확실한 건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다. -갑자기 전화 드려 죄송합니다. 잠깐 시간 괜찮으실까요? “말씀하십시오.” -다름이 아니고, 긴히 이야기 좀 나누고 싶은데…… 혹시 빠른 시일 내에 시간 괜찮으실까요? 이거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다. 성문종이 먼저 내게 접촉할 줄이야. 우선 거절할 필요는 없다. 만나서 무슨 꿍꿍이를 품고 있는지는 알아야 또 차후 계획을 세우는 법이니까. “그러시죠. 말 나온 김에 바로 내일 뵐까요?” -내일 저녁 괜찮으십니까? “예. 술 한잔하시죠.” -알겠습니다. 시간 장소 정해 주시면 제가 가겠습니다. “문자드리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마돈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성문종 후보입니까?” “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네.” 그녀는 스으읍 숨을 들이마시며 걱정스레 말했다. “좋진 않을 것 같은데…….” “일단 그래도 만나 보긴 해야지. 대화해서 나쁠 건 없으니까.” 휴대폰을 내려놓으려던 그 순간. 지잉지잉-. 짧게 두 번.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보낸 이: 17 -동영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