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오르려는 녀석들은 (5)2022.02.06.
신혜지와 구내식당에서 간단한 점심식사를 마친 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 지이잉-. 2G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 왔다. “먼저 들어가요, 혜지 씨.” “커피 한 잔 준비해 둘까요?” “아니요. 휴게실 가서 제가 챙겨 마시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나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네, 최지훈입니다.” -임지현입니다. 통화 괜찮으세요? “어, 말해.” -다름이 아니고, JK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내 입꼬리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뭐라고 하든?”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만나고 싶다는 말을 전해 왔습니다. “이제 조금 마음이 급해졌나 보네.” -그런 것 같습니다. 그것도 비서를 통해서가 아니라, 우현중 본부장이 직접 연락해 왔습니다. “그래?” 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지간히 똥줄 타는 게 아닌 모양. -뭐라고 답변할까요? “요즘 일이 많아서 바쁘다고 해.” 나는 여유롭게 허리를 폈다. “그 빳빳한 목 언제 꺾이나 한 번 보자고.”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은 뒤, 담배 한 대를 태우는데 저 멀리 한태석 정책실장이 반쯤 벗겨진 머리를 흩날리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배불뚝이 저 양반이 여기까지 산책을 한다고 올 리는 없는데. 운동을 그렇게 싫어한다고 유명하니까. 자세히 보아하니,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는 모양새. 그러나 그것도 잠시. 흡연 부스로 다가오던 도중, 내부에 사람이 있는 걸 발견하고는 황급히 전화를 끊어 왼쪽 주머니에 휴대폰을 넣었다. 나는 모르는 척 문을 열며 그를 반겼다. “실장님, 안녕하십니까.” “어, 최 비서관. 오랜만이야.” 그는 능청스레 악수를 건네며 담배를 꺼냈다. 나는 꺼내 둔 라이터로 그의 담뱃불을 붙여 주었다. “고마워.” “요즘 일은 어때?” “늘 똑같죠. 힘든데 할 만합니다.” “그게 좋은 거야.” 그는 클클대며 내 등을 두드렸다. 한태석 정책실장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물었다. “힘든 건 없고?” “예, 괜찮습니다.” “다행이네.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네, 감사합니다.” 안부 인사를 나누기도 잠시.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난 꽁초가 된 연초를 들어 보이며 걸음을 나섰다. “방금 막 다 피워서요.” “그래, 또 보자고.” “예.” 내가 꾸벅이며 흡연 부스를 나오려는 찰나. 띠리링-. 그의 휴대폰 벨소리가 들려왔다. 흘긋 본 한태석 정책실장은. “여보세요?” 오른쪽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조금 전에 분명 왼쪽 주머니에 휴대폰 집어넣는 걸 봤는데. 저 인간도 휴대폰을 두 대 이상 쓰는 모양. 뭔가 구린내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만……. 허나, 지금 당장 의심할 필요는 없다. 사실, 이 바닥에서 대포폰, 서브폰을 쓰지 않는 인물이 오히려 드무니까. 게다가 한태석 정채실장은 정무수석의 다음 가는 인물로, 청와대에서도 힘깨나 쓰는 인물이기도 하고. 흡연 부스를 나선 뒤, 곧장 정무수석실의 휴게실로 향했다. 먼저 식사를 마치고 온 박성민 비서관이 여유롭게 소파에 앉아 있었다. “점심 드셨습니까?” “어. 콩국수 먹었어. 최 프로는?” “저는 여기 구내식당에서 먹고, 잠깐 산책하고 왔습니다.” “오늘 메뉴 괜찮았어?” “반계탕 나왔습니다.” “아, 외부 미팅만 아니었으면 여기서 먹는 건데.” 그는 아쉬운 듯 손가락을 퉁기고는 내 옆을 가리켰다. “거기 커피믹스 말고 위에 새로 들어온 거 하나 있거든. 이번에 최일 식품에서 나온 건데 한 번 먹어 봐.” “받으신 겁니까?” “오는 길에 주더라고. 29,900원이니까 김영란법 안 걸린다고 꼭 받아 가라더라.” “하하하, 요즘 선물세트들 다 그렇잖아요.” 내가 새로운 커피를 뜯는 사이,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참, 요즘 선거법 개정으로 뜨겁더라.” “그러게요.” 얼마 전, 민국당에서 이야기했던 선거 연령 개정에 대한 이야기가 브라운관을 뜨겁게 달구고 있었다. 그는 TV로 시선을 고정한 채 커피를 호로록 한 모금을 마시며 조심스레 의견을 피력했다. “선거권 연령과 피선거권 연령을 똑같이 두는 건 동의할 만하지.” 현재 대한민국은 보통 선거 원칙에 의하여 만 18세 이상 국민들은 투표권을 갖게 된다. 허나, 국회의원을 포함한 지방자치단체장은 만 25세 이상이어야만 피선거권을 얻게 된다. 이걸 선거권과 동일하게 만 18세로 통일하자는 내용. “원래 선거권 자체도 만 19세였다가 21대 총선에서 만 18세로 내려간 거였죠?” “응. 2020년도에 바뀌었지.” 박성민 비서관은 커피잔을 천천히 내려두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실질적으로 혜택을 보는 사람은 적을 거야.” “그럴 겁니다. 20대 초반 핏덩이들을 누가 뽑아 주겠어요. 군대도 안 갔다 왔고, 사회에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한 명 뽑을 만한 사람은 있지.” 그는 장난기 넘치는 눈빛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어휴, 전 아닙니다.” “왜. 딱 최 프로가 수혜 볼 만한데?” “저는 청와대가 편해요.” “그래놓고 내년에 보궐선거 나가는 거 아니야?” “하하하, 아닙니다.” “그래?” 박성민 비서관은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금 TV로 시선을 돌렸다. “잘 생각했어. 사실, 이번에 개정되자마자 출마하면 괜히 특혜가 아닐까 하는 소리 들을 수도 있으니까.” “맞아요. 그것도 조금 두렵긴 하고요.” 나는 그의 옆자리에 적당히 착석했다. “그나저나 이걸로 대선 피선거권도 바뀝니까?” “만 30세로 하자, 만 35세로 하자, 이야기는 많은데…… 뭐 딱히 의미가 있을까 싶네.” “미국은 그래도 만 35세 이상이잖아요. 그쪽과 맞추지 않을까 싶은데.” “나도 그럴 것 같긴 하더라.” 나는 커피를 호록 한 잔 마셨다. 만 35세라……. 줄어들면 나에게 나쁠 건 없다. 지금 연령이 유지되어 내가 만 40세에 피선거권을 얻게 되면, 그때 아버지는 무려 91세. 대통령직에서 내려오셨을 가능성이 높고. 이는 중간에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차라리 피선거권 연령이 줄어들어 만 35세가 되면 더 가능성은 진해진다. 지금부터 12년 뒤, 그때 아버지는 85세시다. 그렇게 되면 바로 바통을 이어받을 수도 있으니까. “이거 통과될 것 같긴 합니까?” “아마 패스는 될 것 같아. 젊은 층 지지를 받는 야당 측에서 세게 밀고 있고, 대한당에서도 굳이 나쁠 건 없다는 생각이니까.” “다음 선거에서 재미있는 그림이 많이 나올 수도 있겠네요.” 진한 크림커피향이 입안을 가득 채웠다. * * * 새벽 2시 40분. 어둠이 짙게 깔린 한강변. “후우우…….” 저 멀리 짙은 담배 연기가 공기 중으로 옅게 퍼지고 있었다. 연기 뱉는 소리가 얼마나 큰지, 입모양만 봐도 한숨 소리가 다 들리는 것 같은 느낌. 슬쩍 주변을 보아하니, 담배꽁초가 10개 가까이 널브러져 있었다. 초조해도 보통 초조한 게 아닌 모양. 하긴, 그럴 수밖에. 2시에 보자고 약속을 잡아 놨는데 한참이나 늦었으니까. 당연한 말이지만, 일부러 늦었다. 집에서 여유롭게 와인이나 한잔하다가 산책할 겸 걸어 나왔으니까. 나는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 터벅터벅 남자의 곁으로 다가갔다. 한 10m쯤 남았을까. 그가 고개를 홱 돌리며 나를 발견했다. “아, 비서관님.” JK그룹의 우현중 본부장. 그는 이전과 달리, 먼저 다가오며 아주 깍듯하게 허리를 접었다. 처음의 오만한 모습이 생각나지도 않을 지경.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줄 알았습니다.” 나는 슬쩍 눈총을 주며 말했다. “늦었다고 눈치를 주실 줄은 몰랐네요.” “아닙니다.” 그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절대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네, 뭐.” 보아하니, 그룹 내에서 아주 호되게 혼이 나고 온 모양. 나는 슬쩍 그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전과 꽤나 태도가 다르시네요. 그땐 거만하게 오라 가라 하시던데.” 우현중 본부장은 짐짓 망설이다가.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그런 의미로 말한 게 아닌데, 전달 과정에서 오해가 생겼던 것 모양입니다.” “오해라…….” 헛웃음이 나왔다. 이 와중에도 자존심을 세우려고 하다니. 조금 더 세게 나갈 필요성이 생겼다. “본부장님 말도 이해 못 할 만큼 제가 멍청하다는 건가요?” “비서관님.” 그는 다급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 뜻이 아니고…….” “그러면 어떤 뜻인데요?” 우현중 본부장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제가 정말 잘못했습니다.” “사과하는 태도가 마음에 안 드네요.” 내가 돌아서려는 모션을 취하자. 그의 무릎이 황급히 땅에 닿았다. “죄송합니다!” 무릎을 꿇은 채 그는 머리를 푹 숙였다. “제가 오만했습니다. 비서관님을 못 알아보고…….” “그러게 진즉에 눈 좀 잘 뜨고 다니시지 그러셨습니까? 처신을 잘했어야죠.” “…….” “사실, 사과라는 게 마음에서 우러나와서 용서를 빌어야 되는데, 이게 또 누가 시켜서 한다거나 강제로 받아내는 사과는 진심이 느껴지지가 않거든요.” 우현중 본부장은 비굴하게 손을 모았다. “제가 어떻게 해야 사과를 받아 주실까요?” “글쎄요.” 나는 턱을 매만지며 한참을 고민하다가, 문득 입을 열었다. “벗으세요.” “……예?” “벗으라고.” “그게 무슨…….” “말귀 못 알아 처먹어?” 나는 냉소적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안 벗어?” 그의 허망한 표정만 봐도 알 것 같았다. 머리털이 곤두서고 오금이 저리겠지. 허나, 우현중 본부장의 선택지는 하나밖에 없었다. 그는 황급히 웃옷을 벗음과 동시에 벨트를 풀었다. 속옷 하나 남기지 않고 나체가 된 채 그는 다시금 무릎을 꿇었고. 나는 휴대폰을 들어. 찰칵. 사진을 한 장 남긴 뒤. 눈을 가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보기 싫으니까 얼른 입으쇼.” 우현중 본부장은 황망하게 옷을 챙겨 입었다. 셔츠는 바지 밖으로 튀어 나오고 넥타이는 삐뚤어진 상태. 녀석은 그 모습과 함께 멍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았다. “나중에 허튼 짓하면 전 국민들한테 다 공개될 테니까 알고 있어.” 그의 입술이 부르르 떨리는 게 눈에 들어왔다. 허나, 귀여울 뿐이었다. “다음부터는 상대가 누군지 알고 깝쳐.” “……알겠습니다.” 어찌나 억울한지,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게 눈으로 보일 지경. 나는 피식 웃으며 쪼그려 앉아 그의 눈높이를 맞췄다. “왜, 꼽냐?” “……아닙니다.” “아니, X나게 꼬울 걸. 눈빛에서 다 보여.” 그의 입이 꾹 닫혔다. “어렸을 때부터 도련님 소리 들으면서 죄다 발밑에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까. 이런 대접 받는 거 처음이잖아.” “…….” “근데 어쩌라고. 꼬우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든가. 아, 금수저지? 근데 어쩌나? 난 다이아수저네.” 뿌드득. 그의 치아가 입술을 깨물다 못해 찢고 들어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우현중 본부장의 뺨을 툭툭 쳤다. “다음 생엔 꼭 나보다 좋은 수저 물고 태어나.” 그는 눈에 살기를 죽인 채 어렵게 입을 열었다. “비서관님, 조례는…….” 클클 웃음을 흘리며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례라…….” 이 녀석만 봐서는 이미 개정된 조례를 취소할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허나, 제 아들을 나한테 보낸 우연상 회장을 봐서라도 한 번 봐줄 용의는 든다. 원래 정치라는 게 어떤 일이든 후일까지 끌고 가는 것보단, 하나의 건 자체에서 끝내는 게 깔끔하니까. “내가 한 번 생각은 해 볼게.” 허무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는 우현중 본부장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사실, 정치에선 적을 만들지 않는 게 굉장히 중요하다지만 우현중 본부장처럼 깝치는 녀석들에게는 압도적인 힘을 보여 줄 필요성이 있다. 기어오르는 녀석들은 싹부터 지르밟아 줘야 허튼 맘을 품지 않는 법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