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어오르려는 녀석들은 (4) (97/200)
  • 기어오르려는 녀석들은 (4)2022.02.05.

    박병환 권한대행이 의한회를 다녀간 지 오래 지나지 않아 서울시에는 조례 하나가 발표되었다. -자치법규명: 서울특별시 서울 도시건축 비엔날레 운영에 관한 조례. -제‧개정 종류: 일부 개정. -공포일자: 2022년 8월 13일. -세부내용. 제1조 목적. …… 조례 개정 및 공포까지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운영 방식과 사업 계획 등에 대한 변경까지 총 15개 조항이 있지만, 그 중 핵심 내용은 하나. 한 마디로 정리하면, 후원사는 후원의 역할을 하는 것일 뿐, 과하게 회사를 홍보하거나 비엔날레의 모든 사업을 독점할 수 없다는 조항. 뿐만 아니라, 주관을 맡은 비엔날레 진흥위원회에도 추가적인 조직 개편이 이루어졌다. JK컬처의 사람들이 물러나고 실제로 문화센터 및 예술직에 복무했던 인원들 혹은 타 기업에서 끌어온 인물들로 빈자리를 채웠다.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신혜지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꾸벅였다. 이번 조례 개정에는 신혜지의 공도 꽤나 컸다. 마돈나가 어두운 곳에서 JK와 접촉하고 약속을 잡는 등 고생을 했고. 신혜지는 공식적으로 기존 조례 및 비엔날레 법안들을 검토하여 비엔날레 조례가 개정될 방향을 제시했다. 슬슬 업무 방향에 체계가 잡히는 듯한 느낌. “저희 쪽에서 요구한 사안들은 거의 다 적용이 된 것 같아 다행입니다.” “그래야죠.”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박병환 서울부시장이 의한회를 처음 보았을 때 그 신세계를 영접한 듯한 표정을 보면, 당연한 그림이었으니까. “이제 그러면 JK 쪽에서 접촉하기만 기다리면 됩니까?” “그래야죠.” 나는 거칠게 입꼬리를 휘었다. “그쪽에선 아마 똥줄 좀 탈 겁니다.” * * * “……해서 이번 비엔날레에 대한 서울시 조례가 개정되었다고 합니다.” 비서실장의 보고에 JK그룹의 우연상 회장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그렇게 사소한 사안까지 나한테 보고해? 게다가 비엔날레 사업은 우 본부장에게 일임했잖아.” 우현중 본부장. 자신의 장남이자, JK컬처의 실세인 그에게 힘을 밀어주기 위해 맡겼다. “저도 어지간하면 보고드리지 않으려 했으나, 생각보다 조례의 파급력이 커서 말씀드려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데?” “우선 저희 측에서 심어 놓은 비엔날레 진흥위원회의 인사 중 절반이 날아갔습니다.” “……뭐?” 그제야 심각성을 깨달은 우연상 회장은 멈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우 본부장이 뭐 잘못했어?” “그것까진 정확히 모르겠습니다만, 간부진에서는 이번에 서울시장이 바뀌면서 트러블이 생긴 게 아닐까 추정 중입니다.” “기다려 봐.” 내년에 열릴 비엔날레는 JK그룹에게도 꽤나 중요한 이슈다. 안 그래도 예술계통에 꽤나 힘을 기울이고 있고. 또한, 엔터 사업까지 진출하려고 준비 중인 상황이었기에. 서울 비엔날레는 국제적인 행사인 만큼, JK라는 이름을 알릴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우연상 회장은 곧장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수신인은 서울시장 권한대행 박병환. 한참의 수신음이 들린 후에야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전화 바꿨습니다. “우연상입니다.” -아, 네. 기억합니다. 서로 안면은 있었다. 박병환이 1년 간 서울시장 권한대행을 맡는 게 확정되자마자 온갖 그룹에서 그에게 접촉을 했으니까. JK그룹의 우연상 회장도 마찬가지. 그 당시에 연락처를 미리 받아 두었다. “다름이 아니고, 이번에 새로 개정된 조례 관련해서 이야기 좀 드리고 싶어서요.” -말씀하십시오. “제가 알기로는 이미 비엔날레 건과 관련해서는 협의가 완료되었는데, 갑자기 변경 사안이 생긴 것 같던데요.” -아, 그 협의라는 게 사실 전임자와 하셨던 것이잖습니까? 박병환 권한대행은 뻔뻔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와 이야기된 건 없기도 하고, 따로 전달받은 사안도 없고요. 우연상 회장은 이를 빠득 깨물었다. ‘정치하는 새끼들은 꼭 좋은 자리 올라가자마자 뭐 하나라도 챙겨 달라고 이런다니까.’ 그는 차오르는 욕을 꾹 누르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부시장님께서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적당히 손에 돈 몇 푼 쥐여 주고 원상복구 시킬 생각이었다. -아니요. 그런 건 받을 생각 없습니다. “……예?” 그는 당황한 목소리로 미간을 찌푸렸다. ‘뭔데. 갑자기 그냥 이렇게 죽이겠다고?’ 멈칫한 사이, 휴대폰 너머로 다시금 박병환 부시장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저희 정치하는 사람들이 무언가 부조리한 검은 돈 같은 걸 받으려고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아, 죄송합니다. 제가 실수를 한 것 같네요.” -사실, 저 같은 정치인들은 주머니도 얇고, 가진 것도 없잖습니까. 그러면 적어도 어디 가서 대접은 받아야 된다고 생각을 하는데……. 휴대폰 너머로 푸욱 한숨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JK컬처에서 높으신 분들의 심기를 건드리시는 것 같더라고요. “……저희 JK에서요?” -예. 정확히 누구라고는 말할 순 없지만, 보통 사업하시는 분들 중에 그렇게 막 나가는 분들은 거의 본 적이 없어서요. 그제야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은 우연상 회장은 빠르게 태도를 바꿨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바로 진상 파악을 해서……. -아니요. 저한테 실수한 건 아니니 사과하실 필요는 없고요. 범접해서는 안 될 분들께 적잖은 실례를 한 것 같더라고요. 순간, 직감이 왔다. 이 바닥에서 범접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 함은, 몇 되지 않는다. 그 중 대표 격인 인물이 바로 최준석 대통령 일가. 그리고 JK컬처에서 그럴 만한 인물은 단 한 명. 자신의 아들밖에 없다. 그 자식이 아니고서야, 애초에 간부 자리까지 올라가지 못했을 테니까. -여하튼 이번 일은 ‘특별한 계기’가 없으면 되돌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일단 제가 업무 중이어서 조금 바쁘네요. 다음에 또 연락하시죠. 우연상 회장의 눈에 광채가 일었다. ‘특별한 계기’에 힘을 줘서 말했다는 것은 다시 말해, 아직 되돌릴 수 있는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뜻. “한 실장.” 그는 전화를 끊자마자 곧장 고개를 들어 명령했다. “지금 당장 우현중 그 자식 잡아와.” 한 실장의 몸이 움찔했다. ‘우 본부장’이라는 호칭 대신 아들의 이름을 불렀다는 건 그만큼 우연상 회장의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는 증거. 한시라도 빨리 우현중을 잡아와 대령해야 했다. “알겠습니다.” * * * “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야!” JK그룹 회장실엔 우연상의 목소리가 세차게 울려 퍼졌다. “어디서 뭐 하고 싸돌아다니길래 일이 이딴 식으로 돌아가?” “……예?” 아직 영문을 알지 못하는 우현중 본부장은 몸을 움츠리며 눈을 꿈뻑였다. “너 최근에 최 대통령 일가 만난 적 있어, 없어?” “어…….” 우현중 본부장의 머릿속에 한 남자가 스쳐지나갔다. “한 명 있긴 합니다.” “누군데?” “최지훈이라고…… 그 아시잖습니까? 막내아들이라 제대로 대접도 못 받고 권력의 반열에도 못 드는 녀석인데…….” “하이고…….” 우연상 회장은 이마를 짚으며 탄식을 내뱉었다. “너 최지훈 비서관 건드렸어?” “아니, 뭐 제가 무슨 짓을 한 건 아닙니다. 먼저 접촉해 왔길래 까불지 말라고 몇 마디 해 줬던 건데…….” “네가 뭔데 까불지 말라는 소리를 해!” 아버지의 언성이 높아지자, 우현중 본부장은 무언가 일이 잘못 되었음을 깨달았다. “가서 무슨 소리를 한 거야?” “특별한 건 아니었습니다.” “토씨 하나 빼놓지 말고 똑바로 말해.” 우현중 본부장은 등허리에 두 손을 모은 채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먼저 JK컬처로 최지훈을 부른 일부터 시작해서 정춘식에 대한 발언까지 전부. “너는 정신이 있는 새끼야, 없는 새끼야?!” 우연상 회장의 재떨이가 우현중 본부장에게로 날아들었다. 퍽-. 담뱃재가 정장을 뒤덮었지만, 아버지가 이토록 화내는 건 드물었기에 우현중 본부장은 채 닦아내지도 못하고 고개를 푹 박고 있었다. “내가 성문종 그 자식이랑 거리 두라고 했어, 안 했어? 유학 시절에 더러운 물만 들어가지고…….” “아니, 아버지. 어차피 정무수석실 비서관에 불과한 놈입니다.” “최준석 대통령 아들이잖아!” “…….” “먼저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도 모자란 마당에 도발을 해, 도발을?” “아버지, 저희 어차피 다음 보궐선거에서 분명…….” “허튼소리 하지 마!” 우연상 회장의 목에 핏대가 섰다. “내가 너보고 딱 필요한 거만 하랬지. 이상한 감투 욕심, 인맥 욕심, 야망 내비추지 말고 네 할 거만 하라고. 그러면 이 그룹 물려준다는데, 그걸 못 참아?” 그는 눈을 부라리며 말을 이었다. “단순히 중립을 지키는 것, 반대 인사 곁에 서는 것과 적대시하는 건 완전히 다르다고. 내가 대체 어디까지 알려 줘야 돼?” 우연상 회장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의자에 털썩 앉았다. “너 당분간 사교 모임 금지야. 집에서 출퇴근만 해.” 우현중 본부장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러나 그가 할 수 있는 대답은. “……알겠습니다.” 하나뿐이었다. “그리고 최 비서관 다시 만나고 와.” “예?” “가서 무릎을 꿇든, 싹싹 빌든. 어떻게 해서든 다시 원상복구 시켜 놔.” “……아버지!” “불만 있어?” “아니, 어떻게 그럽니까?” 우현중 본부장은 발끈하며 반항했다. “차기 JK 오너 될 사람이 일개 정치인한테 어떻게 무릎을 꿇어요?” “누구 마음대로 후계자야!” 우연상 회장의 일갈이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네 동생들 중에서도 똑똑한 녀석들 많아. 네가 장남이라 여기 있는 거야, 알아?” “…….” “아무리 돈이 많아도 대한민국에선 정치권 건들면 안 돼. 괜히 미움 받으면 X되는 거야. 특히 최 씨 일가한테는 더욱 더.” 우현중 본부장은 고개를 푹 숙였다. “하물며 태무그룹, 주옥그룹도 전부 최준석한테는 싹싹 기는 마당에…….” 우연상 회장은 한심하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어휴, 장남이란 녀석이 회사 키울 생각은 안 하고 목에 힘 줄 생각만 하니…… 쯧쯧.” 우현중 본부장은 치가 떨려왔지만, 차마 반박할 순 없었다. 여기서 아버지의 심기를 거스르는 순간, 후계 자리는 차남에게 넘어갈 테니까. “죄송합니다.” “목에 힘 주는 건 아랫것들 앞에서나 하라고. 알았어?” “……예, 아버지.” 우연상 회장은 의자를 돌려 아들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너 12년 전에 똑바로 못 배웠어?” 2010년. 대한민국 재계에는 아주 커다란 일이 있었다. “재계 8위였던 시연그룹이 해외에서 최준석 대통령 비난하는 기사 조장했다가 걸려서 18개월 만에 부도가 났어. 겨우 1년 반 만에 그 큰 재벌이 그룹이 해체되었는데 그걸 보고도 배운 게 없어?” 단순히 이번 일 하나로 끝나는 게 아니다. 만약 최지훈이 다른 형제들과 손을 잡고. 그 중 하나가 권좌에 오른다면, JK그룹이 망가지는 건 순식간의 일이 될 테니까. “……시정해 오겠습니다.” “제대로 해결해 와.” 우연상 회장은 으름장을 놓듯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 제대로 정리 안 되면, 유학 중인 네 동생들 국내로 들어오는 거 시간문제일 수도 있어. 알았어?” 우현중 본부장은 눈을 꾹 감으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16557382003023.jpg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