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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승리자 (15) (87/200)

빛바랜 승리자 (15)2022.01.26.

“도착했습니다.” “…….” 차 안에는 침묵이 내려앉았다. 운전석에 있던 고태욱 비서실장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리시죠, 도련님들.” 그의 말에도 뒷좌석에 있던 두 남성은 요지부동이었다. 고태욱도 안 되겠다 싶었는지 시동을 끄며 먼저 문을 열었고. “하아…….” 그제야 짙은 탄식을 내뱉으며 둘째 최지원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최지만 또한 머리를 쓸어 넘기며 하차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고태욱은 두 명의 도련님들을 이끌고 안으로 향했다. 그들이 향한 곳은 집무실이 아닌, 관저. 서재로 그들을 불렀다는 건, 집무실에서도 차마 말 못 할 이야기라는 뜻이었다.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고태욱 비서실장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각하, 고태욱입니다.” “들어와.” 단 세 글자에서도 느껴지는 아버지의 심기가 불편하다는 것이 느껴졌다. 고태욱은 조심스레 문을 열었고. 들어가는 대신 안쪽으로 손을 안내했다. 먼저 들어간 것은 최지만. 그 뒤를 최지원이 잇따랐고. 고태욱 비서실장은 밖에서 문을 닫았다. 두 아들이 도착한 서재는 평소보다 훨씬 더 광활하게 느껴졌다. 허공엔 시뿌연 연기가 자욱했다. 최준석 대통령은 연신 담배를 뻑뻑 피워대고 있었다. 말 한 마디 없었지만, 두 아들에게 그 광경은 공포스럽기 그지없었다. 최지원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쭈뼛거렸고. 눈치를 보던 최지만이 먼저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그는 90도가 넘어 120도가 되도록 허리를 접었다. “제 불찰입니다.” 최준석 대통령은 대답 대신 담배를 재떨이에 짓이겼다. 그리고 차가운 눈으로 자식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네 불찰이지.” “…….” 그는 고개를 돌려 둘째를 바라보았다. “너는 할 말 없어?” “잘못했습니다, 아버지.” 최지원 또한 송구스럽게 허리를 접었다. “…….” 최준석 대통령은 입술을 꿈틀거리다가 다시금 담뱃불을 붙였다. “후우.” 자욱한 담배 연기가 다시금 집무실에 가득 채워졌다. 재떨이를 보아하니, 벌써 두 갑 넘게 피운 모양. 퇴근 시간 이후에 서재로 왔다는 걸 생각하면, 서너 시간 동안 이걸 다 피운 것이다. 거의 한 시도 쉬지 않고 계속 담배를 입에 물고 있었다는 뜻이지. 그는 담뱃재를 떨며 나직이 말했다. “못난 놈들.” 최지만은 입술을 꾹 깨물었고. 최지원은 눈을 질끈 감았다. “너희들이 그러고도 형제야?” “…….” 최준석은 참고 참다가 결국 터지고 말았다. 그는 재떨이를 집어던지며. “최지만!” 쩌렁쩌렁한 호통을 쳤다. “네가 그러고도 장남이야?!” “죄송합니다.” “동생을 돕지는 못할망정, 뺏어먹기나 해?” “…….” “꼴도 보기 싫어, 이 자식아!” 최지만은 그저 듣기만 할 뿐, 변명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여기서 한 마디라도 했다가는 정말 모가지가 날아가는 수가 있으니까. “당내 경선에 불복하고 나갔으면, 서울시장을 따내지는 못할망정 꼴등? 꼴등을 해?” 최지만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다급하게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다시?” 최준석 대통령은 코웃음을 쳤다. “다시 이런 기회가 올 것 같아?” “…….” 그 말을 끝으로 최준석 대통령은 다시금 둘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최지원.” “예, 아버지.” “너도 할 말 없어, 인마!” “……죄송합니다.” “대한당 공천까지 받았는데 민국당에게 패배해? 쪽팔리지도 않아?” 최지원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억울했다. 그의 입장에선 첫째가 당내 경선 결과를 불복하고 대한당의 뒤통수를 쳐서 이 모양이 된 것이었고. 아버지는 그걸 알면서도 호통을 치는 것이었으니까. 다만, 앞에선 그 말을 할 수가 없었기에 부르르 떨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이 되었으면 형을 포용할 생각을 해야지, 맞서 싸우기만 해?” 최지원 또한 아버지가 말한 대로 하려 했다. 회유하려했지만, 실패했을 뿐. “어떻게 할 거야.” 최준석 대통령은 두 아들을 번갈아보며 소리쳤다. “어떻게 할 거냐고! 이제 쪽팔려서 의원들 만나겠어?” “…….” 최지원은 그저 입을 다물었고. “아버지, 제가 어떻게든 되돌려 놓을 수 있습니다.” 최지만은 결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니, 반드시 바로잡겠습니다.” “이미 선거 결과가 나왔는데 뭘 바로잡아? 재검표라도 할 거야?” “그건…….” “번지르르한 말을 하지 말고, 행동으로 보여 주라고, 행동으로!” 최준석은 말을 하면서 점점 얼굴에 혈압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쯧쯧. 이런 놈들도 아들이라고…….” 그는 참담한 얼굴로 등받이에 몸을 붙였다. “잘못 키운 내 잘못이지. 내 잘못이야.” 최지원은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저도 형과 힘을 보태서 어떻게든…….” “그걸 이제 와서 말이라고 해?!” 최준석은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둘 다 꼴도 보기 싫어. 나가!” “아버지!” “아버지, 죄송…….” “안 나가?” 그는 엄포가 아니라는 듯 당장 수화기를 들어 경호원을 부를 기세였다. “지금 당장 내 눈앞에서 안 사라지면, 너흰 평생 내 눈앞에서 사라질 줄 알아.” 최준석 대통령은 진심이라는 듯 주먹을 부르르 떨었다. 최지만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고. 최지원은 허리를 펴며. 둘은 도망치듯 서재를 빠져나왔다. “고 실장!” 문 너머에서 최준석 대통령의 외침이 들려왔다. “당장 들어와. 저 새끼들은 알아서 걸어가라 그래!” 고태욱 비서실장은 두 형제에게 고개만 꾸벅이고 서재로 들어갔다. * * * “……이런 X팔.” 최지만이 나직이 읊조렸다. “X같네.” 그들은 나란히 터벅터벅 걸어 청와대 밖으로 향했다. 한참을 걸어야 했다. 청와대는 보통 넓은 곳이 아니었으니까. 포장된 도로와 숲길 사이를 지나가던 무렵. “어떻게 할 거야?” 최지원이 걸음을 늦추며 물었다. “이게 형이 바라던 거야? 우리 둘 다 X되는 거?” 그는 화를 참지 못하고 따졌다. “그러니까 양보 좀 하지! 아무리 그래도 형인데 내가 내쳤겠어?” “네가 내 입장이었으면 했겠냐?” “…….” “지원아.” 최지만은 제자리에 우뚝 멈추며 고개를 들었다. “우리끼리 싸울 때가 아니야.” “그럼 뭘 해야 되는데? 이미 다 조진 마당에.” 그는 동생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며 말했다. “너 못 봤어? 우리 쫓겨나는데 고 실장 들어가는 거.” “…….” “우리 가족도 서재로 거의 들이지 않는 분이셔. 그런데 고 실장은 불렀다고. 그뿐이야?” 최지만은 눈을 부릅뜨며 말을 이었다. “고 실장, 처음에 관저 들어갈 때 직접 열쇠로 따고 들어갔어. 그 인간이 우리 청와대 본채 열쇠도 가지고 있다고.” 최지원도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고태욱 비서실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청와대 본채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이 최지만과 최지원의 입장에선 불쾌할 수밖에 없었다. 허나, 지금 상황에선 둘 모두 어쩔 도리가 없었다. “형은 어쩔 거야?” “어쩌긴 뭘 어째. 방도를 찾아야지.” “방도가 있겠어? 이미 선거는 끝났는데.” “그러면 조졌으니 안 되겠다, 단념하고 포기해? 너는 판사 때려치웠으니 변호사라도 할 거야? 나는 의사 복직하고?” “……아니.” “말도 안 되지. 절대 이렇게 못 끝내.” 하지만 그렇게 말했어도 둘 다 뚜렷한 방법은 없었다. 첫째가 말한 대로 최지원은 판사직을 이미 내려두었기 때문에 복직할 수가 없었고. 최지만은 경상북도 도지사 연임을 포기하며 서울시장에 도전했기에 돌아갈 곳도 없었다. 게다가 경상도 자체는 전통적인 민국당 텃밭. 그나마 최준석 대통령의 장남이라는 그 힘으로 대한당 깃발을 꽂았던 것이었으나, 이번 지방 선거를 통해서 다시금 민국당에게 수복되고 말았다. 그것도 모자라 서울시장 자리도 최지만 때문에 놓치게 되었으니 대한당 내부에서는 아무리 대통령의 장남이라고 한들, 최지만이 설 자리가 없어진 것. “지원아.” “또 왜?” “이제는 힘을 합쳐야 돼.” “X까는 소리 하지 마.” 최지원은 차가운 눈으로 내려다보며 냉철한 목소리를 냈다. “이미 다 조져 놓고 힘을 합쳐?” “화나는 건 알지만, 냉정하게 생각해. 여기서 우리 둘이 갈라지면 둘 다 끝이다. 아니, 우리 최 씨 정권 끝나는 거야.” “…….” “넌 대한당으로 돌아가.” “가서 뭐 어떡해?” “당 대표를 하든지, 최고위원을 하든지 해. 어차피 두 직위는 국회의원이 아니라도 할 수 있으니까.” 국회의원 신분이어야 가능한 원내대표만 아니면, 둘째 최지원은 대한당 이름을 걸고 다시 기반을 쌓을 수 있을 터. “나는 그렇다 치고, 형은 어쩔 건데?” “난 다른 방도를 찾아야지.” “대한당 없이 뭘 어떻게 하려고?” 최지원은 한심하다는 듯이 말했다. “형, 정신 차려. 아버지랑 대한당 없으면 형은 X도 아니야.” “최지원!” 최지만은 큼지막한 손을 뻗어 동생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찾겠다고 말하잖아.” “그래서 방법이 있냐고!” 화가 차오른 최지원도 이를 악물며 멱살 잡은 형의 손을 밀쳐냈다. “4년 남았어, 4년. 다음 지방 선거까지 4년이라고. 4년을 가만히 기다리다간 아버지가 호적에서 팔걸.” “그러니까 다른 방법을 찾겠다고.” 최지만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내가 어떻게 바로잡을 테니까 넌 대한당 관리나 잘하고 있어. 내가 이 상황 어떻게든 원점으로 되돌릴 테니까, 너는 대한당부터 장악해. 그리고 그때 우리 둘이 싸우든 말든 하자고.” “하려면 똑바로 해.” 그제야 최지원도 머리를 식히며 말했다. “여기서 더 잘못되면 우리 둘 다 죽어. 이 상황 제대로 못 되돌리면, 오늘을 마지막으로 두 명 모두 청와대에 한 발자국도 못 들일 테니까.” “넌 나중에 잊지나 마. 네가 정리하고 나면 나도 복당해야 되니까.” “일이 제대로만 되면 내가 안 도울 이유가 없지.” “조금만 기다려. 내가 전부 되돌릴 테니까.” 최지만은 계속해서 되돌린다는 말을 중얼거리며 동생을 뒤로하고 청와대를 빠져나갔다. * * * 서울시장 취임식 열흘 전. “정춘식은 뭐래?” “고맙다며 다음에 도울 일 있으면 언제든 말하라고. 꼭 돕겠다고 하네요.” “다행히 민국당 놈인데도 뒤통수는 안 치네.” “그럼요. 그러니까 제가 믿고 도왔죠.” “잘됐네.” 오성복 검사는 가볍게 입꼬리를 휘었다. 우리는 여유롭게 커피를 한 모금씩 하며 서류를 넘겼다. 손에 들려 있는 서류는 정춘식이 임명할 서울시 내부의 사람들에 대한 자료들. 취임식 당일 발표라고 했으나, 정춘식 본인을 통해 미리 전해 받을 수 있었다. “지현 씨가 보기엔 어때?” “특이한 인물은 없습니다. 대단한 능력을 가진 건 아니지만, 또 그렇다고 특별히 걸릴 만한 사람도 없고요.” 마돈나의 정보력에도 딱히 흠잡을 만한 인물은 없었다. 정춘식의 특성상 깨끗하고 무난한 공무원들로 주변을 채우려 하겠지. 띠링-. 그때 마돈나의 컴퓨터에 알림이 울렸다. 그것을 확인한 그녀는. “……이런.” 그때 마돈나가 굳은 얼굴로 나를 불렀다. “도련님.” “왜?” “이거 좀 보셔야 될 것 같은데요.” “뭔데?” 그녀가 가리키는 화면엔 충격적인 기사가 떠있었다. -속보! 서울시장 당선인 정춘식 사망…… 경찰 曰) “자세한 경위는 조사 중.” “……미친.” 뭐가 어떻게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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