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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승리자 (14) (86/200)

빛바랜 승리자 (14)2022.01.25.

국민들의 반응은 예상했던 그 자체였다. -녹취록이라길래 걱정했는데…… 듣고 나니까 더 멋있네. -역시 유주열 총장님이다. 진짜 믿고 가는 분. -최준석 대통령 다음에 유주열 총장이 차기 대선 후보로 나오면 좋겠다. -와, 그러면 정춘식도 깨끗한 거 아님? -└그럴 듯. 나 이번 선거 누구 뽑을지 못 고르고 있었는데 그냥 정춘식 찍어야 할 듯. -솔직히 대한민국 사회 부패한 걸 인정하면서도 그 와중에 정의로움을 지키려는 게 너무 멋있다. -정춘식, 유주열 파이팅이다. “반응 좋네.” “유도했던 그대로 나와서 다행입니다.” 마돈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다른 지지자들까지 크게 변하려나요?” “글쎄. 대한당 지지자들은 많이 이탈하진 않을 거야.” 사실, 특정 당의 골수층이라 불리는 지지층들은 어지간해서는 이탈하지 않는다. 몇몇 사건이 터지더라도 전라도에서는 대한당을 찍고, 경상도에서는 민국당을 찍는 것과 같은 이치. 대한당을 달고 있는 둘째 최지원의 지지율은 그대로이거나 소폭 감소할 터. 다만, 무소속인 최지만의 지지층은 적지 않은 이탈이 있겠지. 그렇더라도 5% 내외일 것이다. 허나, 문제는 따로 있었다. 부동층. 어떤 후보 한 명을 특정하지 못하고 고민하고 있는 부동표가 정춘식에게로 쏠릴 확률이 컸다. 약 15%에 가까운 이 뜨내기표가 한 쪽으로 쏠릴 경우, 최지원, 최지만, 정춘식 중 누구라도 당선이 될 수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현 상황에서는 그 부동층이 정춘식에게로 급격히 쏠리고 있는 만큼, 16년 만에 민국당에서 서울시장을 탈환할 수 있는 가능성이 커졌다. “민국당에서는 웃고 있긴 하지만, 유주열 총장은 조금 곤란해 보이더라고요.” “그렇겠지.” 당연히 득을 본 사람이 있으면, 반대로 손해를 보게 된 사람도 있다. 유주열의 정의를 생각하는 가치관은 칭찬받고 있지만. 그는 지금까지 늘 청렴하고 정치인들과 연루되지 않았던 인물이기에 적지 않은 논란이 되긴 했다. 온갖 기자들이 달려들어 단순히 이번 사건 외에도 둘이 주고받은 서신의 정체가 김현태와 최창범의 사건 외에 다른 것도 있느냐. 정춘식과 특수한 관계가 있는 것 아니냐는 둥의 질문을 퍼부었으니까. 대한당 측에서는 이러한 논란을 오래 끌고 싶어 했다. 그래야 정춘식에 대한 의문이 커지고 표가 쏠리지 않으니까. 하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이미 의혹은 마무리되었고 부동표는 정춘식에게로 쏠리고 말았다. 실제로 유주열 총장은 하루 이틀 정도 난처하긴 했으나, 워낙 깨끗한 인물인 만큼 흠을 잡을 수는 없었기에 논란은 오래 가지 않았기 때문. “지금 상황이면 뒤집히는 것도 가능하겠죠?” “가능한 게 아니라, 아마 그렇게 될 거야.” 서울시장 선거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겨우 닷새. 대한당의 최지원 지지율은 횡보하고 있는 반면. 민국당의 정춘식 지지율은 무서운 속도로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방 선거의 특성상. 이 5일 안에 시민들의 이목을 끌만한 어마어마한 사건이 없으면 지금 구도가 그대로 선거 당일까지 이어지겠지. “기대해도 좋을 것 같아.” 나는 거칠게 입꼬리를 휘었다. * * * 새벽 2시의 한강. 검은 승용차 두 대가 나란히 서있었고. 그 중 한 대에서는 은밀한 회동이 펼쳐지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어떡하긴 뭘 어떡해?” “……하아.” 짙은 한숨이 차내를 가득 채웠다. 조수석에 앉은 인물은 대통령의 첫째 아들 최지만. 그리고 옆에는 그의 동생 최지원이 앉아 있었다. 선거까지 남은 건 이제 겨우 나흘. “형.” 최지원은 진지한 얼굴로 최지만을 바라보았다. “이대로 가면 우리 둘 다 죽도 밥도 안 되는 거 알잖아.” “…….” 최지만도 직감하고 있었다. 2위를 달리고 있던 정춘식의 지지율은 빠르게 상승해 35%를 달성하며. 33% 수준에서 횡보하고 있던 최지원을 2% 차이로 따돌리며 1위에 안착했다. 그리고 상승세를 따졌을 때 지금 상황에서 변화가 없다면, 아마도 정춘식이 당선되는 그림으로 가겠지. “형.” 최지원은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여기서 민국당이 당선되면, 우리 형제만 문제가 아니라, 대한당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는 거야.” “내가 그걸 모르겠어?” 최지만도 뻔히 알고 있는 사실. 허나, 그에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찌 저찌 지지율을 지키고 있는 최지원과 달리 최지만은 지지층마저 줄어들고 있는 추세였으니까. “후우우.” 둘 다 뚜렷한 수를 내지 못하고 계속해서 한숨만을 내쉬었다. 그렇게 얼마 쯤 지났을까. “지만이 형.” 최지원이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형이 사퇴해.” 최지만의 동공이 크게 흔들렸다. “……뭐?” “그러면 내가 당선 가능하다는 거 알잖아.” “…….” 동생의 말에 최지만은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것 또한 알고 있었다. 최지원이 위기에 직면한 건, 대한당 지지자들의 표를 자신이 갈라먹었기 때문이라는 걸. 하지만 그는 차마 동의할 수 없었다. “그렇게 해서 내가 얻는 건 뭔데?” 최지만은 날선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네가 당선되면 난 나가리 아니야?” “형. 우선 대한당부터 제대로 된 힘을 갖춰야 후일을 도모할 수 있는 거잖아. 여기서 민국당이 당선되면 둘 다 끝이라니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마.” 최지만은 눈을 부라리며 언성을 높였다. “넌 내가 멍청해 보이냐?” “아니, 그게 아니라…….” “어차피 이번 선거에서 지면 다 끝이야. 너도 알잖아?” “…….” “아버지가 직접 말하셨어. 너랑 나보고 서울시장 선거에 나가라고. 이긴 놈이 후계자가 되는 거야.” 대통령이 입 밖으로 낸 말은 아니었지만, 둘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사퇴하면 당연히 네가 당선되겠지. 그리고 아버지는 널 총애할 테고. 그 후의 그림은 어때? 너도 상상이 되지 않아?” “형. 내가 도우면 다시 아버지의 눈에 들 수 있어. 충분히 가능해.” “가능은 개뿔. 넌 아버지를 절대 거역할 수 없어.” “…….” 사실이었다. 반항이랍시고 몇 번이나마 샛길로 들어서 본 다른 형제와 달리, 지금까지 최지원은 아버지의 말씀에 토를 달아 본 적조차 없었으니까. “지원아.” 최지만은 격앙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넌 내가 정계 복귀할 수 있을 것 같아?” 냉정하게 판단하면 아니었다. 그러나 최지원은 차마 그것을 입 밖으로 낼 수는 없었기에 입을 꾹 다물었다. “난 이미 대한당 당내 경선에서 패배한 것도 모자라 불복해서 무소속 출마까지 했어. 아버지가 도와도 될까 말까인데…….” 최지만은 고개를 저었다. “네가 생각하기에도 내가 사퇴하는 게 최선이라고는 말 못 하잖아.” 최지원의 입은 굳게 닫혔다. 본인이었다면, 사퇴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만은 진실이었다. 허나,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설득뿐이었다. “형, 다시 생각해 봐. 둘 다 민국당에게 지면, 아버지가 어떻게 하겠어?” “……지곤이를 찾겠지.” “말도 안 되는 소리인 거 알잖아. 최지곤 걔는 대통령 깜냥이 아니야.” “…….” “넷째 지성이는 버린 자식이고, 은실이는 출가외인이라 그림 상 안 돼. 막내는 나이 때문에 안 되고.” 최지원은 진실된 목소리로 말했다. “결국 우리 형제들 다 죽는 거야. 그러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그러면 아마도…….” 둘의 머릿속엔 한 명의 인물이 떠올랐다. “고 실장이 먹는 거야. 고태욱 비서실장이 전부 다 차지하는 거라고.” “…….” “아버지 옆에서 30년을 있었어, 30년을. 권좌가 탐나지 않는 게 비정상이잖아.” 최지만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이야 아버지가 정정하시니까 조용히 있는 거지, 몇 년만 지나 봐.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걸?” “…….” “아버지가 어지간하면 전부 고 실장 통해서 소통하잖아. 이미 고 실장 그 인간이 정계 장악했다니까.” 최지원의 논리는 최지만도 머리로 이해가 갔다. 허나, 최지원은 차마 그것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후환이 두렵기는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다시는 최지원을 이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을 테니까. 영원히 둘째에게 진 장남으로 남는 것이다. “그건 안 돼.” “형. 내가 진짜 다음에 돕는다니까. 내가 말하면 지키는 건 알잖아.” “그렇다고 해도 안 돼.” “아니, 형!” 최지원 또한 언성을 높였다. “둘 다 죽는 것보단 한 사람은 살아야 될 것 아니야? 그래야 후일을 장담하지.” “네가 내 심정을 알아?” 최지만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학 하나 잘못 갔다고 평생을 눈치 보며 살았어, 평생을. 내가 의대를 지망해서 대학을 신촌으로 갔지, 아니었으면 한국대 갈 수 있었다고. 그런데 그 선택 하나 잘못한 걸로 평생을 비교당하고 장남 대접을 못 받았어. 이게 말이 돼?” “…….” “사퇴 후 지지 선언? 절대 안 해. 아니, 못 해!” 결국 최지만은 조수석을 박차고 나갔다. 부우웅-! 거친 액셀러레이터 소리와 함께 최지만이 탄 차가 한강변을 빠져나갔고. “이런 제기랄!” 홀로 남은 최지원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핸들을 내리쳤다. * * * “허허…….” “이거 아무래도 역전은 불가능하겠는데?” “그럴 것 같습니다.” 정무수석실의 휴게실. 오후 10시가 넘은 늦은 시간임에도 나를 포함한 비서관 세 명 중 그 누구도 퇴근하지 않고 개표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은 지방 선거로 인해 임시 공휴일이긴 해도,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투표 후 정상 출근을 했다. 사실, 청와대라는 곳의 특성상 주말이나 명절이 아니면, 어지간한 공휴일은 쉬는 날이 아니니까. 오늘 같은 날은 오히려 야근이지. 현재까지 서울시장 득표율은. 민국당의 정춘식이 39.5%. 대한당의 최지원이 37.3%. 무소속의 최지만이 19.8%. 남은 개표 결과는 겨우 3.4%였다. “이렇게 되면 진짜…….” 휴게실엔 탄식이 가득 새어나왔다. 민국당에서 서울시장을 차지하면, 청와대 업무에도 차질이 생기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니까. “많이 위험한데…….” 3.4%의 표로 2.2%의 격차를 줄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아니나 다를까, 10분쯤 지났을 때는. -속보입니다. 민국당의 정춘식 후보가 서울시장에 당선이 확정되었습니다. 이는 16년 만에 처음으로 민국당이 서울시장 자리를 탈환한 것으로……. “망했네.” “조졌어.” 김상진 비서관과 박성민 비서관은 개탄스러운 목소리를 냈고. “그러게요.” 나 또한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그들이 보지 못하는 내 주먹은 이미 불끈 쥐어져 있었다. 됐다. 역시 미래 문자가 예상했던 대로다. 정춘식의 최종 득표율은 미래 문자에 나왔던 대로 41.5%를 기록하겠지. “내일부터 정신없어지겠어.” 우리는 탄식을 내뱉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퇴근들 하자고. 분명 내일 아침부터 엄청나게 시달릴 테니까.” “그러시죠.” 우리가 휴게실에서 나오려고 하던 그때. 부우우웅-! 창밖에서 자동차의 거친 엔진음이 들려왔다. “이거 설마…….” 이곳은 여민관 앞. 엔진음이 사라진 방향은 본관 쪽이었다. 사실, 청와대에선 차량으로 갈 수 있는 장소가 정해져 있다. 이곳은 당연히 들어올 수 없는 위치. 여기까지 차를 몰고 올 수 있는 인물은 청와대에서도 몇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중 하나가 바로. “고태욱 비서실장님이시네.” 김상진 비서관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확실해요?” “차 번호판 봤어.” 고 실장이 이렇게 늦은 시간에 왔다는 건 100% 아버지의 호출일 터. 이거 상황이 꽤나 재미있게 흘러가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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