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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승리자 (13) (85/200)
  • 빛바랜 승리자 (13)2022.01.24.

    “무슨 건인지 알아봤어?” “한정일보에서는 절대 알려 주지 않는다는 마인드입니다.” “그래?” “예. 아무래도 보통 건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 실장의 보고에 최지만은 거칠게 입꼬리를 휘었다. “우리한테도 말을 안 해 줄 정도라면…….” “보통 건이 아닌 것만큼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렇지?” 첫째 최지만은 참지 못하고 클클 웃음을 터뜨렸다. “정춘식이 확 나가리가 되어 버려야 되는데.” 그의 눈빛엔 탐욕이 거칠게 타올랐다. 이번 선거에서 최지만이 승리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건, 다른 당의 표를 빼앗아오는 일. 사실, 정춘식이 어떤 짓을 하더라도 그를 투표할 민국당 지지자들은 어차피 뺏어오지 못하는 표기에 욕심을 내지도 않는다. 다만, 이번 기사의 파워가 강력하다면, 분명 적지 않은 이탈자들이 생겨날 터. 그러면 부동층은 더 늘어나게 된다. 사실, 이번 선거에서 만큼은 부동층이 최지만에게 굉장히 유리하게 작용할 수밖에 없다. 그도 그럴 것이 국민들의 최준석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은 80% 중반대에 육박한다. 어지간한 시민이라면 최준석을 좋아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지. 심지어 야당 지지자들도 대통령으로는 민국당이나 만세당이 아닌 최준석을 지지한다는 뜻. 그런데 이번 선거에서 최지만이 표방하는 문구 자체가 ‘최준석의 장남’, ‘최준석의 영광을 이어받아 눈부신 성장을 재현한다.’는 등의 내용이었고. 부동층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본 선거 당일에서 고민하는 시민들은 결국 최준석 대통령의 후광을 받은 ‘장남 최지만’을 선택할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최지만이 할 일은 최대한 부동층을 늘리는 일. 반대로 둘째 최지원은 아버지의 후광이 아니라, ‘하나의 대한당’이라는 문구로 ‘최준석=대한당’이라는 그림을 그리고 있는 상태. “민국당이 빠지고 둘이 싸우게 되면, 오히려 더 할 만할 거야.” “예. 그렇게 되면 저희 측이 굉장히 유리해질 겁니다.” 최지만은 흡족스레 고개를 주억거리며 물었다. “한정일보는 언제쯤 터뜨리려고 하는 것 같은데?” “선거 열흘에서 일주일 정도 전에 보도하려는 것 같습니다.” “그래?” 그는 씨익 웃으며 수첩을 폈다. “한정일보에 ST자동차 연결시켜 줘. 이번에 광고 하나 큰 거 받으라고 해. 총알이 있으면 더 힘차게 움직일 원동력이 생기는 거 아니겠어?” “알겠습니다.” * * * 호텔에서 잠깐이라도 쉴 요량으로 일찍이 도착했다. 약속 시간까지는 꽤나 여유가 남은 상태. 나는 보고 있던 서류를 집어넣고 와인 하나를 따서 잔에 부었다. 와인잔을 빙글 돌려 스월링하며 향을 맡은 뒤, 한 모금을 입에 머금었다. 강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달지도 않은 맛. 비싼 와인은 아니었다. 호텔 룸서비스에서 고를 수 있는 것 중 상단에 있는 레드 중 하나. 와인을 삼킨 뒤, 살포시 눈을 감았다. 어느새 5월 말. 본 선거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약 보름 남짓. 여전히 선거판은 혼란스러웠다. 누가 당선되어도 이상하지 않은 그림. 그도 그럴 것이 현재 지지율 1위는 대한당의 최지원이 33%. 2위는 민국당의 정춘식이 29%. 3위는 무소속의 최지만이 약 23%. 마지막으로 뜨내기표라고 불리는 부동층이 약 15%. 지금까지의 지방 선거를 되돌아보면, 보통 이쯤에서는 서울시장 후보가 누가 될지 윤곽이 드러난다. 허나, 이렇게 부동표의 비율이 높은 건 역대 서울시장 경선에서도 유일했다. 저 부동층을 누가 흡수할 수 있느냐가 이번 선거의 승자를 결정하는 관건이 될 터. 이 상황에서 제일 웃고 있는 자는 단연 민국당과 정춘식일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무리 민국당이 분발한다고 한들, 서울에서는 대한당의 지지율이 과반을 훌쩍 넘어가는 만큼 대한당을 꺾을 수가 없는 게 현실이었으니까. 그러나 대한당의 당내 경선 결과에 불복한 최지만이 무소속으로 출마하며 대한당의 표를 나눠먹고 있었다. 그 덕분에 민국당도 해볼 만한 싸움이 된 상황. 의한회에서 들리는 말로는, 이번에 이기지 못하면 최준석 대통령이 사망하기 전까지 서울시장 자리만큼은 절대 수복할 수 없다는 말이 민국당 내에서도 나오고 있는 만큼 그들은 필사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당 내부에서 정춘식을 반대하던 인물들도 합심해서 그를 밀어주고 있을 정도니,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런 상황에서 한정일보가 정춘식의 약점을 잡고 있는 듯이 강력하게 어그로를 끌고 있으니, 굉장히 긴장이 될 수밖에. 그 증거로. 똑똑. 약속 시간이 아직 30분이나 남았는데, 벌써 도착했다. 나는 의자 옆에 있던 버튼을 눌러 문을 열어 주었다. 선거 유세를 하다가 바로 왔는지, 정춘식의 팔에는 그의 출마 번호가 이라고 적힌 바람막이가 들려 있었다. “오셨습니까?” 나는 앉은 채로 슬쩍 잔을 들며 인사했다. “예, 최 비서관님.” 그는 반가우면서도 긴장된 얼굴로 내게 앉았다. “앉으시죠.” “아, 네.” “아이, 교수님.” 나는 그의 잔에 와인을 채워 주며 말했다. “저번에 말씀드렸잖습니까? 다음에 만날 땐 말 편하게 하자고.” “아…….” 정춘식은 와인잔을 받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감사합니다.” 나는 말하는 대신 와인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그는 와인을 가볍게 한 모금 마시고는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매번 소주, 맥주, 막걸리 같은 거만 마셔서 그런지, 와인 맛은 잘 모르겠단 말이야.”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저도 잘 모릅니다. 폼이죠.” 정춘식은 이러한 사담이 답답한지, 와인잔을 내려두자마자 입술을 달싹였다. “최 비서관. 그래서 무슨 일인지 물어봐도 되나?”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고 싶은 모양. 나도 길게 끌 생각은 없었다. “한정일보에서 쥐고 있는 사건 말씀이시죠?” “자네는 확실하게 알고 있는 건가?” “그럼요.” 나는 잔을 내려놓으며 가볍게 입꼬리를 휘었다. “제가 제보를 했으니 당연히 알 수밖에 없죠.” “……뭐?” 순간, 그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차올랐다. 그것도 잠시, 정춘식은 굳은 얼굴로 물었다. “아니, 나는 자네가 나에게 화분도 보내고 편지도 보내서 우리가 우호적인 관계라고 생각했거든.” “맞습니다. 저는 여전히 교수님이 당선되시길 바랍니다.” “……무슨 말인가?” 그는 이해가 되지 않는지 엉덩이를 들썩이며 눈을 찌푸렸다. “내가 지금 일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이해를 못 하는 건가, 아니면 최 비서관이 날 놀리는 건가?” “복잡하신 것 같으니 돌려 말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정춘식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그 기사는 교수님께 도움이 될 겁니다.” 눈을 반짝이며 말을 덧붙였다. “지지율이 굉장히 크게 상승할 게 분명하거든요.” 그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정일보 측에서는 굉장히 큰 건을 잡은 것처럼 이야기하던데.” “당연히 큰 건이죠. 교수님과 검찰 관계자의 대화록이니까요. 다만, 특이한 게 있다면.” 나는 코를 찡긋이며 말했다. “그 검찰 관계자가 굉장히 시민들에게서 우호적인 인상을 갖고 있는 인물이거든요.” “설마…….” 그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맞습니다.” 나는 허리를 펴며 와인잔을 들었다. “유주열 검찰총장님이십니다.” “허어…….” 정춘식은 예상치도 못했는지, 헛숨을 들이마셨다. “대체 어떻게…….” 그의 궁금증엔 대답해 주지 않았다. 그저 내가 할 말을 이었다. “대화 내용 또한 기가 막힙니다. 대한민국의 정의와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 그리고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 “그 대화록을 들으면 알 수 있죠. 교수님과 유주열 검찰총장님이 생각하는 이상향은 같다. 또한, 그 방향은 본인들의 배를 불리는 게 아니라, ‘정의’라는 사실까지도요.” “허허…….” 그는 낮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걸 어떻게 입수했는지는 물어봐도 안 가르쳐주겠지?” “어떻게 밑천까지 다 팔아서 장사할 수는 없잖습니까?” 그제야 정춘식은 안심한 듯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나는 한정일보에서 그런 내용을 쥐고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했어.” “그럼요. 제가 일부러 지금처럼 어그로를 끌어 달라고 꼭 부탁을 드렸거든요.” “전부 최 비서관 아이디어였을 줄이야…….” 그는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녹취록은 전부 공개하는 건가?” “예. 전문을 기사로 보도할 생각입니다. 한 치의 의혹도 남지 않게요.” 그렇게 되면 민국당 내부에서도 당내에서 유력한 후보였던 최창범과 김현태를 보낸 게 정춘식이라는 사실도 알게 될 터. 허나, 지금 상황에선 큰 의미가 없다. 둘은 이미 탈당을 했고, 정계 복귀가 힘들어진 상황인 데다가. 정춘식의 당선이 더 유력해질 테기에, 그를 도와줄 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만에 하나 서울시장까지 당선된다? 그러면 정춘식은 민국당 내에서 일약 최고 당원급으로 올라서게 되는 법. “국민들의 의심이 커져 가고, 나에 대한 의문이 커져 갈 무렵, 녹취록을 공개해서 오히려 그 불신을 긍정으로 돌린다…….” 그는 계획을 되뇌며 헛웃음을 흘렸다. “도저히 나로서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전략이야.” “원래 기회라는 건 위기일 때 찾아오는 법 아니겠습니까?” 정춘식은 단번에 와인잔을 비워냈다. 그는 손등으로 입술을 훔치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이제 보니 와인도 꽤 입에 맞는 것 같네.”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내가 어떻게 보답을 해야 할지…….” “에이, 뭐 제가 무언가를 바라고 하는 거겠습니까?” 나는 능청스레 미소를 지었다. “그저 교수님을 응원하니까. 그리고 또 잘되기를 바라니까 순수한 마음으로 돕는 것 아니겠습니까?” “마음의 짐으로 잘 품고 있겠네.” 정춘식은 눈을 빛내며 나를 똑바로 마주봤다. “언젠간 필요한 일이 생기면 말하게. 내 반드시 도와줄 테니까.” “하하, 정 그러시다면 거절하진 않겠습니다.” “내가 만약 당선이 된다면.” 그는 진지한 어투로 말을 보탰다. “최 비서관, 자네의 공이 5할은 족히 넘을 거야.” “어찌 그러겠습니까? 저는 그저 슬쩍 거든 것뿐이죠.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놓은 것인데요.” “수저가 없으면 식사를 할 수가 없지 않나?”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호탕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고맙네. 정말 큰 도움이 될 거야.” “얼른 가 보시지요. 오늘 피곤하셨을 텐데 일찍 들어가서 쉬셔야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야지.” 정춘식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와인잔을 채우며 그를 불렀다. “참, 교수님.” 그는 돌아서며 날 바라봤다. “말하게.” “하나만 부탁드리겠습니다.” “뭔가?” “이번 일에 제가 개입했다는 건 비밀로 해 주십시오.” “걱정 말게.” 정춘식 교수는 인상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죽는 한이 있어도 그건 절대 말하지 않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쉬게나.” * * * 지방 선거 열흘 전. 뜨거운 감자를 넘어서 불타오르기 시작한 시민들의 항의에 한정일보는 묵히고 묵혀 둔 기사를 꺼내들었다. -단독! 정춘식 서울시장 후보와 유주열 검찰총장과의 비밀 대화록 전문 공개! 그 결과. 지금까지 3자 구도에 아주 큰 변화가 일어났다. 대통령의 두 아들이 서울시장의 자리에서 멀어지는 그림. 다시 말하자면. 민국당 정춘식의 지지율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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