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빛바랜 승리자 (12) (84/200)

빛바랜 승리자 (12)2022.01.23.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래, 쉬어.” 5명의 보좌진은 먼저 차를 타고 떠나는 이치현 의원을 향해 꾸벅 인사를 한 뒤, 허리를 폈다. “으아아!” 강선우 보좌관은 기지개를 쭉 켜며 말했다. “다들 수고했어.” “고생하셨습니다.” “오늘 생각보다 일찍 끝났는데 다 같이 한 잔 어때?” 술잔을 꺾는 시늉에 다른 보좌진들은 ‘좋죠.’라며 웃음을 지었지만. “저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 한유라 보좌관은 한 걸음 물러났다. “에이, 오늘 의원님도 없는데 같이 마시지.” 강선우 보좌관은 붙잡았지만. “오늘은 조금 피곤해서요.” 한유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 조심히 들어가.” “보좌관님 들어가세요.” “선배님 쉬세요.” “응.” 그녀는 눈인사를 하며 홀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늘 그렇듯 그녀는 리모컨으로 문을 열고 자신의 승용차의 운전석에 올랐다. 시동을 거는 순간, 자신도 모르게 느껴지는 왠지 모를 육감.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아보려는 찰나. “안녕하세요, 유라 씨.” 그녀는 ‘헙’ 숨을 들이마시며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뒷좌석에서는 한 남자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실내등을 켰다. “놀라지 마십시오. 접니다.” “……강 의원님?” 당황스러웠다. 뒷좌석에 있는 인물은 다름 아닌, 대한당의 강성철 의원이었으니까. “여긴 어떻게…….” “근처에서 우리 한 보좌관님 기다리려고 하는데 한 번 열어 보니까 열리더라고. 문단속을 잘하셨어야지.” “아…….” 한유라 보좌관은 여전히 짙은 경계심을 드러내며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 때문에 오신 거죠?” “유라 씨.” 강성철 의원은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유라 씨 정도면 상황 파악이 빠르지 않나?” “……네?” “지금 돌아가는 꼴 보면, 이치현 의원 오래 가지 못한다는 것 정도는 알 것 같았는데. 내가 너무 과대평가했나?” 한유라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녀가 모를 리 없었다. 이치현 의원이 점점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걸.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한유라를 포함한 보좌진들이 아무리 용쓰더라도 대세는 바꿀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말이다. “그래서 원하시는 게 뭡니까?” 강성철 의원은 의뭉스런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유라 씨도 정치에서 꿈꾸는 목표가 있을 거 아니야?” “…….” 그는 자신의 가슴팍에 달려 있는 배지를 떼어내더니 한유라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거 한 번 달아 봐야지. 안 그래?” 꿀꺽. 한유라는 눈앞에 펼쳐진 유혹에도 불구하고 정신을 붙잡았다. 그녀는 배지를 되돌려주기 위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됐습니다. 저는 어차피 이치현 의원님과 계속 갈 겁니다. 또한 민국당에 충성할 것이고…….” “진짜로?” 강성철 의원은 엉큼한 눈빛으로 되물었다. “민국당에서 맨날 이치현 뒤치다꺼리만 하다가 썩어 버리려고? 결혼도 할 생각 없다고 들었는데, 얼른 자리 잡아야지.” “…….” “시간 많지 않아. 나한테 오면 바로 공천받을 수 있어.” 그 대가가 없지 않다는 건 한유라가 모를 리 없었다. 분명 그녀가 생각하는 그것일 터. 다만, ‘공천’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게 한유라의 마음을 흔들었다. 안 그래도 이치현의 지역구에서 민국당의 입지가 점점 좁아지고 있는 만큼, 그곳에서 대한당의 공천만 받을 수 있다면 금배지는 따 놓은 당상이 될 테니까. 누군가의 보좌관이 아니라, 보좌관을 둔 ‘국회의원’이 될 수 있는 기회다. “배지는…….” “됐어, 유라 씨 가져.” 그는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데스크에 요청하면 다시 만들어 주거든.” 강성철 의원은 문을 열고 한 발을 밖으로 내밀며 말했다. “기다려 줄 시간은 많지 않아. 유라 씨 말고도 나랑 손잡고 싶어 하는 사람은 많으니까. 뭐, 강선우 보좌관도 몇 마디 하면 넘어오지 않겠어?” 그는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 차에서 빠져나갔다. 한유라는 혼자 남은 뒤에도 출발하지 못하고 손에 남은 금배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의 머릿속엔 온갖 많은 생각들이 차올라, 한참동안 시동을 걸지 못했다. * * * 어느새 가정의 달 5월. 지방 선거를 한 달도 채 남기지 않은 이 시점은 혼란 그 자체였다. 둘째 최지원과 첫째 최지만 그리고 민국당의 정춘식까지 치열한 삼파전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 굉장히 치열했다. 원래대로였으면, 대한당의 공천을 받음과 동시에 둘째 최지원이 서울시장에 당선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봐도 무방했을 테지만, 그 대한당의 표를 첫째 최지만이 나눠 가져가며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었으니까. 그리고 맞이한 5월 8일 어버이날. 여민관에서 근무를 일찍이 마치고 오늘은 여의도 집에 가는 대신 청와대 관저로 향했다. 허나, 관저엔 썰렁한 기운이 넘쳐났다. “지훈이 왔니?” “아, 네.” 거실에선 어머니 혼자서 과일을 깎으며 TV를 보고 계셨다. 보아하니, 다른 형제들은 오지 않은 모양. “다른 형님들은 바빠서 못 오시나 보네요.” “온다고 했는데, 네 아버지가 다 오지 말라고 했다.” “아…….” 어쩐지. 아무리 선거 때문에 바빠도 아버지를 뵐 수 있는 날에 오지 않을 만한 사람들이 아니긴 하지. “참, 어머니.” 나는 들고 온 쇼핑백을 그녀에게 건넸다. “이게 뭐니?” “어버이날 선물이요.” “선물?” 어머니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으셨다. “웬 선물이야?” “비싼 건 아닙니다. 가방 같은 명품들은 다 있을 것 같아서……. 취미로 하시라고요.” 보석 십자수. 실제 보석이 박혀 있는 건 아니고, 비즈와 같은 큐빅으로 십자수를 하는 물건이다. 신혜지의 추천을 받아서 산 선물. “어유, 고맙다. 잘 쓸게.” 어머니는 쇼핑백을 내려놓으며 슬쩍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너 요즘 지성이랑은 연락하니?” 넷째 최지성. 유일하게 정계를 떠나서 홀로서기를 하고 있는 인물. 아마 어머니에게는 넷째 형이 가장 아픈 손가락일 것이다. 자식들이 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자식들이 건강하기만을 바라셨으니까. 연예계 프로듀서가 되겠다며 집을 나간 뒤에도 유일하게 어머니만큼은 아버지 몰래 넷째 형과 연락을 한 것도 모자라. 그가 겨우 집안 모임에라도 참석할 수 있게 된 것도 어머니 덕분이었으니까. “가끔 연락은 해요.” “최근 들어 연예계가 워낙 안 좋다잖아. 그래서 요즘엔 내가 연락을 못 하겠어. 한 번 만나서 안부나 전해 주렴.” “형보고 자주 전화 드리라고 할게요.” “어유, 아서라. 그럴 필요까진 없다. 가끔 목소리만 들어도 충분해.” 하긴, 나 또한 최근 들어 최지성과는 자주 연락할 일이 없었다. 지난번에 집에서 함께 식사를 하다가 만난 것 정도가 전부. 그때도 제대로 대화를 나눌 만한 시간은 없었다. 이번에 선거만 끝나고 바쁜 것만 마무리되면 한 번 만나서 안부라도 물어봐야겠는데.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게 있다면 도와주고. 금전적인 면은 물론이고, 그 외에도 필요하면 정무수석실의 연줄을 이용해서라도 적지 않은 도움은 줄 수 있으니까. 벌컥. 그제야 거실 중문이 열리며 아버지께서 들어오셨다. 나는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 허리를 꾸벅였다. “아버지 오셨어요?” 나를 흘긋 본 아버지는 올 줄 알았다는 듯 무덤덤한 표정을 지으셨다. “왔느냐.” “예, 일 끝나고 잠깐 들렀습니다.” 다른 형제들에게는 오지 말라고 말했다. 다만, 나는 따로 묻지 않고 왔기에 혹시나 화를 내지 않으실까 걱정했지만. “그래. 이따 같이 저녁이나 같이 한 끼 먹고 가거라.”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를 냈다. “네, 아버지.” 나의 아버지, 최준석 대통령은 넥타이를 풀며 서재로 들어가셨다. * * * “뭐가 어떻게 된 거야?” 정춘식은 답답한 듯 한숨을 내뱉었다. “알아낸 거 없어?” “저희 쪽에서도 최대한 파악을 하고 있는데, 딱히 나오는 게 없습니다.” 한 실장은 곤란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리 회유를 해 봐도 알려 주는 게 없어서…….” “하아…….” 답답한 숨소리가 실내를 가득 채웠다. 그들의 손에는 두꺼운 신문지가 들려 있었다. -민국당 서울시장 후보 정춘식, 검찰 관계자와 접선…… 비밀리에 나눈 대화 단독 입수! 굉장히 충격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을 암시하는 내용으로 기사를 올리고 있었다. 오늘 뜬 게 아니었다. 며칠 전부터 한정일보에서 국민들의 관심을 주목시키고 있는 상태. 다른 언론사에서 갖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한정일보의 특보. 그렇기에 더욱더 걱정이 되었다. “혹시 후보님께서 기억나시는 건…….” “한두 명이 아니잖아.” 서울시장 후보로 선거 운동을 하다보면 정재계인은 물론이고, 검찰 관계자를 만날 수밖에 없다. 한두 명도 아니고 다수. 게다가 정춘식은 최근에 의한회에 들어간 탓에 직접 접촉한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한남동의 의한회에서 만난 검찰 관계자만 해도 십수 명에 달할 정도니 하나하나 세기도 어렵지. “아무리 생각해도 막 찔리는 건 없거든?” 정춘식 후보가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봤자, 켕기는 건 없었다. “그러면 당당하게 나가도 괜찮지 않습니까?” “나도 그러고는 싶지만…….” 그는 신중하게 입을 열었다. “한정일보가 무슨 듣보잡 회사도 아니고, 대형 언론사잖아. 저놈들이 별거 아닌 내용 들고 있으면서 이렇게 며칠 동안 사람 쪼고 이목을 끌려고 하겠어?” “……아, 하긴 그러네요.” 소형 언론사라면 트래픽에 미쳐서 그럴 수도 있다고는 하나, 한정일보는 어그로성 기사를 잘못 터뜨렸다가는 오히려 뭇매를 맞을 가능성이 크다. 후일, 정춘식을 포함한 민국당의 관계도 생각해야 하기도 하고. “한정일보랑은 접촉해 봤어?” “예. 사장과도 만나 봤는데, 걱정하지 말라는 말뿐이었습니다.” “무슨 개떡 같은 소리야?” 정춘식은 어이가 없는지 헛숨을 들이마셨다. “이딴 상황을 만들어 놓고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나온대?” “저도 도저히 모르겠습니다.” “하아…….” 정춘식은 짙은 한숨을 내뱉었다. 외부에서 시민들은 ‘검찰 관계자와의 비밀 대화록’이라는 말에 분명 비리와 관련된 것일 거라며 손가락질을 하고 있었고. 내부에서는 무슨 잘못을 저지른 게 있는 거 아니냐며, 쪼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언제 밝힌다는데?” “그것도 알려줄 수 없답니다.” “이런 망할 놈들이 진짜…….” 그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리 한 번 마련해 봐. 내가 직접 만나 봐야겠어.” “괜찮으시겠습니까? 괜히 상황이 더 악화될 수도 있는데.” “답답해서 유세도 제대로 못 다니잖아? 밖에 시민들만 만나면, 무슨 일이냐고 묻는데…… 어휴.” “알겠습니다.” 지이잉-. 그때 정춘식의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 왔다. “나가 봐.” “예.” 한 실장을 내보낸 뒤에야 그는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최 비서관님?” 그제야 그는 발신인을 확인했다. 다름 아닌, 정무수석실의 최지훈 비서관. “무슨 일이시죠?” -요즘 심려가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오니 정신이 없네요.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서…….” -그 일 관련해서 잠깐 만났으면 하는데, 오늘 저녁 시간 괜찮으십니까? 정춘식은 식겁하며 되물었다. “……혹시 알고 계시는 겁니까?” -오늘 저녁 펜타이어 호텔 2805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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