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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승리자 (9) (81/200)

빛바랜 승리자 (9)2022.01.20.

“좋은 아침입니다.” “어, 최 프로 왔어?” 박성민 비서관은 들고 있던 커피 잔을 슬쩍 올려 보이며 반갑게 인사를 했다.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멀리서 오니까 광역 버스 배차 간격이 너무 길거든.” 업무시간 5분 전에 도착해서 촉박할 바에야 40분은 먼저 와서 여유롭게 준비하는 게 낫다는 그였으니까. 나는 커피 한 잔을 내리며 TV를 보고 있는 그에게 물었다. “재미있는 뉴스라도 있습니까?” 출근 전에 신문은 보긴 했지만, 또 세상 돌아가는 걸 신문만으로 전부 파악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으니까. “특별한 건 없어. 이번 올해 첫 분기 마무리하면서 국정수행 평가한 거 나오네.” 국정수행 평가. 한 마디로 말하면, 청와대를 포함한 정부가 나라의 정치를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 국민들이 판단을 내린 수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 국정수행에 대한 평가는 즉 현 대통령에 대한 지지율로도 이어지는데. “여전히 조금 부족하네.” 최준석 대통령이 지난 2021 대선에서 획득한 득표율은 86.1%. 그에 반해 이번 국정수행 평가에서 ‘현 정부가 국정을 잘 운영하고 있다.’에 대한 비율은 82.4%. 잘 모르겠다. 8%. 잘 못하고 있다. 9.6% 물론 부정적인 수치에 비해 긍정적인 평가가 여전히 압도적으로 높은 수치인 건 맞으나, 마냥 안심할 수는 없었다. 2년 만에 4% 가까운 감소는 마냥 적다고 볼 수는 없는 수치였으니까. “왜 그런 걸까요?” “재작년 정책의 타격이 좀 컸지.” “아…….” 내가 민국당에 있던 시절. 그때 아버지가 추진하셨던 코리안 뉴딜의 실패가 가장 큰 타격이었을 것이다. 당시 지지율이 70% 중반까지 내려가며 휘청거리나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아버지는 늘 그렇듯 꺾이지 않고 일어서셨다. 그리고 꾸준히 회복하여 80% 초중반까지 올라왔으나. 이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횡보 중인 상태. “게다가 만세당 지지자들이 좀 더 늘어나서 그래.” “성문종 때문이겠죠?” “그렇지.” 성문종. 올해 36세로 정치인치고 꽤 젊은 나이의 남자다. 하버드에서 정치학을 전공하고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정치권에 뛰어든 인물. 오자마자 지식인으로 관심을 받더니, 지난 총선에서 첫 출마하여 덜컥 당선된 것도 모자라. 젊은 피, 젊은 사상, 젊은 교육을 외치며 아버지의 정반대의 이미지로 쇄신과 혁신을 주장하며 지지율을 쌓고 있는 인물. 만세당에선 돌풍을 일으키며 중심부에 서고 있었다. 초선이라고 보기 힘들 정도로 강력한 리더십과 추진력을 갖고 있는 남자. 성문종이 젊은 유권자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었으니까. 생긴 것부터 구린내가 풀풀 풍겨 왔지만, 대한당 내부 조사 결과 놀랍게도 흠잡을 건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병역도 깨끗하다. 카투사로 1년 6개월을 만기 복무하며 병장 제대하였으니까. 그에게 특이사항이 있다면. 前 대통령 성태현의 아들이라는 점. ‘성태현.’ 그가 우리 집안에서 갖는 의미는 적지 않다. 길게 이야기하면 끝도 없다. 간단히 말하면, 우리 아버지와 손을 잡고 대통령 자리에 올랐고. 대권을 쥐기 무섭게 아버지의 뒤통수를 쳤던 인물. 그래서 나의 아버지가 대통령이 되기로 마음을 먹으셨다지. 다시 말하면, 우리 집안에서 완전히 적대시하는 ‘원수’ 집안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내가 국회에서 일하는 동안 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고, 일부러 엮이지도 않았던 것. 물론, 티는 내지 않았다. 아버지께서는 성태현을 탄핵시키고 대통령 자리에 오르셨고. 이미 30년을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기에 따로 터치하지 않으시려는 생각이었다. 당시엔 나 또한 성문종이 초선이기에 금방 무너질 줄 알고 건들지 않았으나, 예상보다 더 큰 세력을 모으고 있다는 게 문제 아닌 문제였다. “성문종은 요새 뭐 하고 지냅니까? 요즘은 또 조용한 것 같던데.” “그 친구는 나도 잘 모르겠네. 작년 말까지만 해도 엄청나게 시끄럽더만, 올해는 엄청 조용하네. 들려오는 소식이 없는데…… 6월에 임시 국회 열리면 알게 되지 않겠어?” 그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대단한 건 아닐 거야. 만세당에선 이번 서울시장 선거에 총력을 기울이는 게 아니니까.” “하도 조용하길래 저는 성문종이 서울시장 출마 준비하는 줄 알았습니다.” “인기가 있다고는 해도 아직은 이르지. 당내에서도 순서와 서열이라는 게 있는데, 성문종 위로 해먹을 사람들이 많거든. 게다가 만세당은 늘 서울에서는 약세였기도 하고.” “하긴, 그건 또 그러네요.” 그는 찡긋 웃으며 내 어깨를 툭 쳤다. “너무 신경 쓰지 마.” “괜찮습니다. 큰 관심 없어요.” “그래. 그러면 다행이고.” 굳이 알리고 싶진 않지만, 성문종의 집안과 내 집안이 앙숙이라는 건 누구나 다 알 수 있는 사실. 일부러 알려고 하지 않아도 우리 집안의 이야기는 대한민국 현대사 교과서에 실려 있으니까. “참, 최 프로.” “예, 선배님.” “대한당 내부 지지율은 확인했어?” “봤습니다.” 46% vs 52.5%. 첫째, 최지만의 지지율이 소폭 상승했다. 처음 아버지께서 둘 보고 선거에 나가라고 했을 때만 해도, 이렇게 치열한 접전이 될 줄은 몰랐다. 허나, 최지만은 증명해내고 있었다. 본인이 이 최 씨 집안의 장남이며. 자신 또한 둘째에 밀리지 않고 권좌에 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사실, 6.5%의 차이는 큰 것 같으면서도 마냥 크지는 않았다. 본 선거에서는 얼마든지 당일에 뒤집힐 수도 있는 수치. 허나, 문제는 며칠 뒤 펼쳐질 투표는 지방 선거가 아닌, 당내 경선이라는 점. 당내 경선은 본 선거만큼의 파급력이 없기에 득표율이 급격하게 바뀌는 일은 굉장히 드물다. 구조라는 게 단순히 당원들의 투표만 있는 게 아니라, 대한당 소속이 아닌, 일반 시민들의 견해도 포함이 되기 때문. 아직 본 선거까지 2달이나 남은 지금 시점에서는 어지간해서는 당내 경선의 득표율이 뒤집히기 힘든 게 사실이니까. “최 프로는 어떻게 생각해?” “전혀 가늠이 안 됩니다.” “응원하는 사람은 있고?”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없습니다.” “그래도 누구 한 쪽에 서는 게 낫지 않아?” “그것보다도 아버지께서 이번 선거에서는 손을 떼라고 하셨거든요.” “아, 그래?” 박성민 비서관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가만히 있는 게 낫지.” “예. 그래서 그냥 관망만 하는 중입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오늘 김상진 비서관님이 조금 늦으시네요?” “조금 전에 연락 왔는데, 대검 들어갔다 오신다네?” “대검이요?” “응. 민국당 내에서 뭐 큰 거 하나 터졌는데, 실장님이 직출해서 직접 자료 받아오라고 했나 봐.” “아…….” 당내 경선까지 남은 건 열흘 남짓. 이제 슬슬 터뜨리려는 모양인데? 박성민 비서관은 시간을 확인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55분이네. 우리도 업무 시작할까?” “그럴까요?” 커피 잔을 내려놓고 휴게실을 나서려던 그때. 지이잉-. 그의 휴대폰이 세차게 울리기 시작했다. “잠깐만. 김 선배님인데?” 박성민 비서관은 곧장 휴대폰을 들었다. “예, 선배님.” 그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준비해 두겠습니다. 오시기 전까지 처리해 둘게요.” 박성민 비서관은 휴대폰을 끊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민국당 내부에서 큰 거 하나 터졌어. 오늘 오전 중에 검찰들 영장 발부한다네.” “뭘 준비할까요?” “우선 김 선배님이 실장님께 직접 보고한다니까, 최 프로는 작년에 있었던 백두 비발디 건축 시공사 비리 내용이랑 3년 전 수자원공사 정책 중에 다세대 주택과 관련된 자료들 전부 정리해 둬.” “알겠습니다.” * * * 민국당 내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던 김현태는 구속되었고. 2위였던 최창범은 불구속 수사로 진행되고 있으나, 그 사유가 검찰에서 이미 대부분의 자료를 확보한 탓에 증거 인멸 우려가 없기 때문인 만큼 그도 당내 경선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워낙 확실한 증거였는지, 김현태는 이틀 만에 그리고 최창범은 나흘 만에 민국당을 탈당하였다. 결국 민국당에서 남은 건 정춘식과 박미자 두 명. 허나, 박미자는 특정 세력들에게 지지율이 높을 뿐, 대중적이지 않았기에. 민국당에서 둘 중 한 명을 택하면 결국 정춘식밖에 없었다. 게다가 정춘식은 물밑 작업도 이미 마쳐 둔 상태. “예, 선배님. 감사합니다.” 정춘식은 올라가는 입꼬리를 부여잡고 말했다. “덕분에 잘 마무리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 예. 당연하죠. 제가 또 기억력 하나는 기가 막히잖습니까? 그럼요, 제가 멘사 회원입니다, 멘사 회원. 당선되면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네, 또 연락드리겠습니다.” 그는 전화를 끊자마자 주먹을 불끈 쥐었다. 김현태와 최창범은 아웃. 남은 6일 동안은 민국당에서 정춘식을 서울시장 후보로 치켜 올리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와 칭찬을 퍼부을 터. 그가 민국당 당내 경선에서 승리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이제 내부는 다 정리됐고…….” 그는 거칠게 입꼬리를 휘었다. “두 형제 놈들만 한 번 꺾어 볼까?” * * * -안녕하십니까, 정춘식입니다. 저는 민국당의 서울시장 후보로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서울시를 만들기 위해 총력을 다할 것이며, 또한 현재 청계천과……. TV에선 그가 출마 선언문을 낭독하는 모습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민국당 당내 경선에선 정춘식이 승리했다. 그의 득표율은 75.8%. 박미자와 일대일 구도였지만, 당에서 밀어준 덕분에 압도적인 표차이로 승리할 수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면…….” 정춘식의 41.5%라는 수치는 서울시장 본 선거에서 그가 획득한 득표율을 뜻하게 된다. 41.5%라……. 지금까지의 지방 선거를 생각하면, 해당 득표율로는 당선되기가 쉽지 않다. 늘 2강 구도이기에 만세당이나 그 외 정당에서 출마한 후보들의 총 득표율은 10% 남짓. 그러면 결국 대한당에서 출마한 후보가 과반 이상을 득표하며 당선이 되는 그림이지. 허나, 이번엔 달랐다. 서울시장 후보로 나간 게 지금까지 내로라하는 정치인들이 아니라, 나의 두 형제들이었으니까. 결국 그 정춘식의 득표율로 당선이 될지, 되지 못할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대한당의 당내 경선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 대한당의 당내 경선까지는 이제 겨우 사흘. 이미 격차가 많이 줄은 만큼,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으니까. * * * “안녕하십니까, 대한당 당대표 전상국입니다.” 간만에 펼쳐진 대한당의 전당대회. 마이크 앞에 선 그는 봉인된 봉투 하나를 들어보였다. “제 손에 이번 지방 선거 공천 결과가 나와 있는데요.” 일부 지역은 진즉에 수뇌부들의 판단을 통해 공천 후보가 결정되었고. 경쟁이 있었던 서울을 비롯해 딱 세 지역만 당내 경선을 펼쳐 공천 후보를 선정했다. 지금은 그 투표 결과를 발표하는 시간.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상국 의원은 봉투를 펼치며 읽어 나갔다. “부산은 44.2%를 득표한 최원태, 대전은 61.5%로 우미화, ……,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울입니다.” 그는 눈썹을 들썩이며 고개를 들었다. “서울시장 후보로 대한당의 공천을 받을 인물은…….” 전상국의 입에서는 예상치 못한 결과가 튀어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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