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빛바랜 승리자 (8) (80/200)

빛바랜 승리자 (8)2022.01.19.

“……비서관님?” 문 너머에 있던 인물은 신혜지. 그녀 혼자였다. “여기는 왜……?” 신혜지의 동공엔 의문이 가득했다. 내가 심부름을 시켰으니, 당연히 내가 아닌 다른 인물이 있으리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일단 주시죠.” 무거운 듯 힘겹게 낑낑거리며 짐을 들고 있던 그녀에게서 사과 박스를 넘겨받았다. “들어오시죠.” “아, 네.” 신혜지는 여전히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기에 눈을 꿈뻑거리며 현관으로 들어왔다. “다른 박스는요?” “하나는 주차장에 있습니다. 혼자서 두 개를 들 수가 없어서 왔다 갔다 하려고 했습니다.” 나는 사과 박스를 적당한 곳에 내려두며 물었다. “내부에 뭐가 있는지는 보셨죠?” 그녀는 송구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열어 보진 않았는데…… 뭔지 보이긴 하더라고요.” 박스에는 봉인을 풀었거나 안을 확인하려고 뜯은 자국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을 뒤로하고 소파로 향했다. “우선 앉으시죠.” 신혜지가 앉을 자리를 가리키고 나는 상석으로 향해 시계를 확인했다. 정확히 47분. 신호를 걸리거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온 시간 혹은 주차하는 타이밍을 고려하면 돈을 들고 도망가려고 한다거나 다른 기자들과 접선할 시도조차 하지 않고서 일말의 고민 없이 차를 몰아 이곳으로 왔다는 증거. 혹시나 모를 상황을 대비해 차내에 도청장치도 설치해 두었다. 이상 징후가 보이면, 마돈나가 내게 곧장 연락을 해 왔을 테지만, 따로 소식은 없었다. 즉, 아무런 일탈도 없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자면. 신혜지는 충분히 믿을 수 있다는 뜻이지. “비서관님, 이거 혹시…….” 그녀는 자신이 생각한 게 맞냐는 듯 조심스럽게 물었다. “예, 맞습니다.” “……아!” 그제야 신혜지도 내가 자신을 시험해 본 거라는 걸 깨달은 듯 낮게 탄성을 내뱉었다. “하아아…….” 그리고는 안도의 한숨을 쏟아냈다. “저는 무슨 일 있는 줄 알았거든요.” “그러셨습니까?” “네.” 그녀는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솔직한 심정을 털어놓았다. “비서관님께서 이런 거래를 하실 분이 아닌데, 무슨 일이 있으신 건가……. 고민스러운 점이 생기셨거나 약점이 잡히셨다면, 같이 고민하면 좋았을 텐데. 또 한편으로는 그래도 저를 믿을 수 있으니 이런 일을 시키신 것이라서 기쁘기도 했고요.” 신혜지의 눈에는 생기가 가득 차올랐다. “그런데 와 보니…… 이제 진짜로 비서관님의 신뢰를 얻을 수 있게 되어서 영광이네요.” “시험해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더 큰 물로 나아가려면 100%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 해서요.”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비서관님 입장이라도 쉽게 믿지 못했을 테니까요.” 나는 가볍게 웃으며 바닥에 있던 007가방 하나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이건…….” “혜지 씨가 가지시면 됩니다. 열어 보셔도 돼요.” 그녀는 눈을 연신 깜빡이며 가방을 열었다. “헙!” 신혜지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트렁크에 실린 것만큼 많지는 않습니다. 정성으로 생각해 주십시오.” “아닙니다. 저는 이런 걸 받으려고 비서관님을 모시는 게 아닙니다.” “사양 말고 받으십시오.” 나는 입꼬리를 휘며 말을 이었다. “일종의 족쇄를 채우는 겁니다.” “아…….” 도망가지 못할 족쇄. 물론, 말은 그렇지만, 앞으로 활동함에 있어서 사생활이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함. 사실, 대한민국에서 어지간한 일들은 돈으로 전부 해결이 되는 게 현실이니까. “그러면…….” 신혜지는 더 반항하지 않고 가방을 닫아 자신의 가까이 끌어당겼다. “감사히 쓰겠습니다.” “그리고…….” 나는 테이블 밑에서 똑같은 가방 하나를 더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신혜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하나 제안을 드리겠습니다.” 테이블 위에 다시금 가방을 올려 둔 뒤,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신혜지는 침을 꿀꺽 삼키며 물었다. “바라시는 게 있습니까?” “제가 청와대를 떠나서 정치판 어디에 있든 간에 제게 충성해 주실 수 있겠습니까?” 신혜지의 업무 능력은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다. 업무 능력을 갖춘 건 물론이고, 정보 파악력 또한 마돈나 못지않다. 첫 시작을 청와대에서 한 만큼, 그녀가 걸을 수 있는 행보는 결코 평범하지 않을 터. 그녀가 내 귀가 되어 준다면, 분명 어마어마한 시너지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앞으로 더 많은 걸 드리도록 하죠.” 나는 달콤한 말을 뱉었다. “상상할 수 없는 보상이 있을 겁니다.” “……좋은 자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녀의 말에 가볍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건 상상할 수 있는 거잖습니까?” “…….” 신혜지의 두 눈에 생기가 피어났다. 그녀는 결연한 목소리로 맹세하듯 외쳤다. “비서관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 * * 민국당 당내 경선 2주 전. 여전히 민국당 내에서는 김현태와 최창범이 1, 2위를 다투며 유력한 서울시장 후보로 떠오르고 있었다. 그 탓에 정춘식의 선거 캠프의 분위기가 마냥 좋지 않았으나. 정춘식 본인만큼은 얼굴에 자신감이 늘 가득 차 있었다. 그에게는 확실한 카드가 있었으니까. 유주열 검찰총장에 넘긴 자료들은 현재 내부 수사 중이며, 공론화되지는 않았다. 원래 사건이라는 건, 한 번 터지고 나서 얼마나 임팩트를 줄 수 있느냐, 또 얼마나 오래 갈 수 있느냐가 굉장히 중요한데. 내부 분석 결과, 해당 기사는 정확히 선거 열흘 전에 터뜨려 줘야 영향력이 크다는 판단을 내렸으니까. 미리 터뜨리면 김현태와 최창범은 후보에서 사퇴할지 몰라도. 민국당 내부에서 다른 후보를 찾을 가능성이 농후하기에 당내 경선을 코앞에 두고 밝힐 생각이었다. “오셨습니까, 의원님.” 정춘식이 오늘의 선거 운동을 끝내고 들어오자, 이미 저녁 시간이 된 만큼 선거 캠프엔 남아 있는 사람이 적었다. 실질적인 보좌관 외에 나머지 직원들은 퇴근을 했기 때문. “어, 오늘도 수고했어.” 다른 이들에게 격려를 하며 그는 바람막이를 벗었다. 선거용 옷을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가려는 생각으로 사무실을 들어서던 찰나. “저건 뭐야?” 문득 그의 시선에 커다란 화분 하나가 들어왔다. “아침에는 없었던 것 같은데.” 당선을 기원한다는 문구와 함께 본인의 이름을 큼지막하게 쓰며 보낸 이를 어필하는 다른 화분들과 달리, ‘응원합니다.’라는 짤막한 문구 한 줄만이 붙어 있는 화분. “아, 그게…….” 비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랍에서 봉투 하나를 꺼냈다. “점심 즈음에 퀵서비스로 전달됐거든요. 보낸 사람은 확인되지 않았고, 이 편지가 같이 동봉되었더라고요.” “편지에도 뭐 없고?” “여기 뒤에 글귀가 하나 있긴 한데…….” 비서가 가리키는 편지봉투의 뒷면을 보자, 깨알 같이 ‘From. CJH’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CJH?” 기업 이름은 아니다. 따로 화분을 보낸다고 이야기를 온 사람도 없다. 그렇다고 일반 시민이 보냈을 것 같지는 않은데. 편지봉투는 내용을 다른 이들이 볼 수 없도록 확실하게 봉인이 되어 있었다. 비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제가 네이버에 ‘CJH’라고 검색을 해 봤는데 따로 나오는 건 없더라고요.” “그래?” 그는 천천히 주억거리며 넥타이를 풀었다. “어, 일단 퇴근해.” “알겠습니다.” 정춘식은 비서를 내보내고 나서야 편지의 봉인을 뜯었다. 프린트로 뽑은 듯한 짤막한 글이 적혀 있었다. -최지훈입니다. 형제를 포함한 다른 이들에게 보내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정춘식 교수님만을 응원하겠습니다.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최지훈이라…….” 정춘식의 입가에는 짙은 미소가 피어났다. 단순히 의한회 때문은 아닐 터. 최지훈을 몇 번 보지 않았지만, 그곳에 구애받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으니까. 무슨 이유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형제들이 아닌 본인을 지지한다는 건 그때부터 확실했다. 마치 무언가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지. “재미있는 남자야.” 그는 편지를 들어 곧장 파쇄기로 향했다. 최지훈에 대한 모독이나 불쾌감이 아닌, 보안을 위해서. 둘의 관계가 어떻든 간에, 이 편지가 외부로 나가면 둘 모두에게 좋을 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러한 부담을 안고서 편지와 화환을 보냈다는 건. 분명하게 자신을 지지하겠다는 뜻. 이를 다시 말하면. ‘서울시장 선거, 진짜 해볼 만하겠는데?’ * * * 똑똑.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최지곤은 차의 잠금장치를 풀었다. 딸칵- 문이 열리며 비슷한 외모의 여성이 차에 올랐다. “여기까지 어쩐 일이야?” 최은실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물었다. “너 보러 왔지.” 셋째 최지곤의 말에 쌍둥이 남매 최은실은 혼내듯 스읍 숨을 들이마셨다. “너라니, 누나라고 안 해?” “3분 먼저 태어난 걸로 유세는.” “그래서 무슨 일인데?” 최지곤은 액셀러레이터를 밟으며 대답했다. “요즘 돈 좀 모으고 다닌다더라.” “돈?” 최은실은 모르는 척 되물었지만, 최지곤은 코웃음을 쳤다. “우리 사이에 모르쇠 잡아 봤자 의미 없는 거 알잖아.” 이미 알고 왔다는 듯 그는 확신을 가진 채 말했다. “강원도에서 돈 긁어모은다며. 내가 떠보는 것 같아?” 최은실은 들켰다는 듯 의뭉스런 목소리를 냈다. “어떻게 알았대?” “여기저기 발 걸치면 알지.” 최지곤은 흘긋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수원시장 선거에 그렇게 큰돈이 필요하진 않을 텐데.” “돈은 늘 필요하지. 요즘 애들 키우는 데 생활비가 얼마인지 알아? 플루트 배운다고 또 과외를 붙였더니 장난 아니야. 또 악기 값은 얼마나 비싼지…….” 당연한 말이지만, 최은실은 말해 줄 생각이 없었다. 최지곤은 한숨을 푹 내쉬며 지하 주차장의 구석에 차를 멈췄다. “은실아. 우리 이럴 때가 아니야.” “무슨 소리야?” “지금 상황 보면 몰라?” 그는 눈을 부릅뜨며 최은실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첫째 형 아니면 둘째 형이 권좌 이어받게 생겼어. 이거 못 막으면 우린 끝나.” “그걸 어떻게 막니?” 그녀는 흥 콧소리를 냈다. “이미 정해진 흐름이야. 못 바꾼다고.” “그러면 너는 돈을 왜 모으는 건데?” “……다른 이유가 있지.” “그게 뭐냐고.” “내가 뭘 믿고 말해 줘?” “우리끼리 힘을 합쳐야 돼. 위에선 두 형들이 꽉 잡고서 누르고, 밑에서는 막내 놈 치고 올라오는데 쌍둥이끼리 적대시하면 되겠어?” “우선 누나라고 부르고서 쌍둥이라고 하지 그래?” “어휴, 됐다, 됐어.” 최지곤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최은실은 음흉하게 눈썹을 들썩이며 물었다. “그건 그렇고 요즘 막내는 뭐 하고 산대? “몰라. 그 자식 정무수석실 처음 들어갔을 때는 조금 활발한 것 같더만, 요즘은 죽었는지, 살았는지 별 소식도 없네.” “걔는 똘똘한 것 같기는 한데, 정치에서는 영 힘을 못 쓰는가 보네?” “그건 또 아닌 것 같더라. 나름대로 일은 옹골차게 하나 봐.” “그래?” “근데 속내를 감추는 건지, 아니면 진짜 야망이 없는 건지 파악이 안 된다니까. 내 핏줄이지만, 가늠이 안 가, 가늠이.” 최지곤은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건 그렇고 진짜 돈 어떻게 쓸 건데?” “말하면 보태 줄 거야?” “무슨 일인지 들어보고. 투자처는 알아야 돈을 모으지.” 최은실은 씨익 입꼬리를 휘었다. “보안은?” “확실하지.” 최지곤은 믿어 달라는 듯 가슴을 탁 치더니, 블랙박스의 선을 뽑는 것도 모자라 녹음 중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듯 휴대폰 두 대를 모두 꺼냈다. 최은실은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그래. 뭐 어차피 혼자서 하기는 힘든 일이었으니까.” 이내 고개를 주억거렸다. “진짜 너만 알아야 돼.” “알았다니까.” 최은실은 운전석을 향해 슬쩍 몸을 기울이며 목소리를 낮췄다. “아버지 벌써 일흔셋이야. 73살.” “그래. 슬슬 안 좋아지실 때도 됐지.” “어디 하나 아파도 이상하지 않다는 거야.” 예상치 못한 그녀의 말에 최지곤을 침을 꿀꺽 삼켰고. 최은실은 엉큼하고 흉악한 계획을 내뱉었다. “그런데 이번에 건강검진 받으시잖아? 그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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