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승리자 (7)2022.01.18.
“흐으음…….” 미래 문자에서는 정춘식 교수와 유주열 검찰총장이 나눈 대화의 뒷부분이 잘려 있어서 100%를 아는 건 불가능했지만, 녹음본의 풀버전을 들어보니, 어렴풋이나마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정춘식이 명확히 어떤 카드를 들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 타깃은 같은 민국당의 서울시장 후보인 김현태와 최창범이라는 것. 나의 두 형이 아니라는 점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했다. 둘 모두 낙선해야 내게 도움이 되지만. 또 그렇다고 민국당에서 서울시장을 차지하면 아버지의 입장이 불편해지니까. “그런다고 김현태와 최창범이 한 번에 무너질까요?” 부정적인 마돈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럴 거야.” 사실, 서울시장 후보로 꼽히는 인물 정도 되면, 어지간한 카드 한두 장으로는 무너지지 않는다. 당에서 지켜 주기도 하고, 본인 스스로도 살아남는 방법을 아니까. 허나, 이번엔 상황이 다르다. 평범한 기자나 경찰이 냄새를 맡은 게 아니라, 유주열 검찰총장이 직접 수사를 지시할 테니까. 아마 시작부터 대대적으로 보도가 되겠지. 오래지 않아 김현태와 최창범은 무너질 것이다. 당연히 민국당에서는 그나마 지지율이 높은 정춘식을 밀어줄 테고. 그가 당내 경선에서 승리해 공천을 받을 터. “추가적으로 한번 알아볼까요?” “아니, 굳이 그럴 필요는 없어.” 우리 쪽에서 민국당 후보들에 대해 조사할 필요는 없다. 미래 문자를 생각하면, 결국 정춘식이 민국당의 서울시장 후보로 나올 테니까. “우리는 이 녹음본을 써먹을 만한 방법을 강구해야 돼.” 나는 파일이 담긴 USB를 꺼내며 물었다. “지현 씨가 들었던 내용 중에 특이한 거 있었어?” “아니요. 유주열 검찰총장이 정말 깨끗한 사람이라는 것 외엔 없습니다.” 괜히 국민들의 존경을 받는 게 아니다. 그가 정치를 했으면, 최준석 대통령의 후임으로 그가 권좌에 올랐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오니 더 말할 것도 없지. 물론, 형제들과 내가 있는 한, 낭설에 불과하겠지만. “이걸 이대로 썩히긴 아까운데…….” 단순히 정춘식이 민국당의 최종 후보가 된다는 것만 알고 끝내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울 정도니까. “어차피 도청 파일은 법적으로는 못 쓰이니 언론용인데…….” 마돈나는 고심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도련님께서는 정춘식을 밀 생각이시죠?” “그렇지.” “그러면 딱히 김현태나 최창범 측에 알릴 필요도 없을 테고…… 각종 수사 내용을 지시하는 내용이 있긴 했지만, 저희가 기업과 접촉할 만한 건수는 없었습니다.” 여기서 추가적인 녹음본 획득은 불가능하다. 꼬리가 길면 밟히는 만큼, 이미 필요한 내용은 들었고 녹음까지 했으니, 오성복 검사는 더 오래 끌지 않고 녹음기를 회수하는 게 좋을 테니까. “김현태와 최창범 건수를 제외하면, 아무리 듣고 들어봐도 지금까지 파일로서 알 수 있는 건, 유주열 검찰총장은 알려진 대로 굉장히 정의롭다는 것과 정춘식 교수와 친하다는 점뿐입니다.” “……잠깐만.” 순간, 머릿속에 기가 막힌 생각이 하나 스쳐 지나갔다. “그걸 쓰면 되잖아.” “네?” “그 친분이 있다는 게 정춘식 교수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유리하지 않겠어?” “……아!” 마돈나는 낮게 탄성을 터뜨렸다. “그렇겠네요.” 유주열 검찰총장은 이미 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총장의 임기를 다하면, 정계로 진출할 생각도 없다고 몇 번이나 밝혔다. 아마도 명문대의 법학과 교수 정도를 맡게 되겠지. 다시 말해 정치와는 전혀 무관할 만큼 깨끗한 인물이라는 사실. 그 점이 국민들의 신뢰를 한 몸에 받고 있는 이유다. 그런데 그가 정춘식과 친분이 있다? 그 사실만으로도 정춘식에 대한 시민들의 신뢰는 증폭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둘이 나눈 ‘정의’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대한민국의 현실이 정의로울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겉으로 보기에는 정의로워 보여야만 한다. 사회의 자정 작용을 위해서라도 법의 집행에는 정치의 이권이 개입해서는 안 된다. “시민들이 들으면 좋아할 수밖에 없겠네요.” “그렇지.” 안 그래도 좋아하는 유주열 검찰총장을 더 좋아하게 될 것이다. 중요한 건, 그러한 유주열 총장이 정춘식과 같은 생각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뜻이다. 실제로 그가 어떤 생각을 품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정치라는 게 원래 가면을 쓰는 것처럼 꾸미기 나름이니까. 당연히 정춘식의 입장에서는 그 프레임을 쓰고 정의롭게 나서겠지. 대한민국에 정의를 가져오겠다, 정의로운 사회를 설립하겠다, 이런 식으로 나서면 유권자들이 투표를 할 수밖에 없다. “잘 보관하고 있다가 필요한 타이밍이 올 때 써먹어야겠네요.” “지현 씨가 잘 보관하고 있어요.” “알겠습니다. 사본까지 준비해서 안전하게 들고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정춘식에게 아주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마음의 빚 하나 지어 주면 아주 좋지. 결국, 나에겐 아군이 될 사람이니까. * * * 오후 10시. 청와대에 있는 인물의 대부분이 퇴근을 하고 여민관에 켜진 불빛이 많지 않은 시간. 나는 인터폰의 호출 버튼을 눌렀다. 오래지 않아,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부르셨습니까?” 포니테일로 머리를 질끈 묶은 신혜지가 눈을 빛내며 들어왔다. “어제 말했던 부탁 때문에요. 오늘 시간 괜찮으신가요?” “예.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나는 서랍에서 차 키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어려운 건 아니에요.” “비서관님 차는 아닌 것 같은데…….” “밖에 은색 아반테 한 대 있을 겁니다. 리모컨 사용해서 여실 수 있을 겁니다.” “예. 출근하는 길에 본 것 같습니다.” “트렁크에 박스 두 개가 있어요. 그걸 벨로 오피스텔 803호로 전달해 주시면 됩니다. 자세한 주소는 내비게이션에 찍어 뒀으니 체크하시면 되고요.” “알겠습니다. 전달만 하고 오면 될까요?” “네. 차는 내일 출근할 때 가져오시면 돼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넘겨주기 전에 내용물은 제가 확인을 할까요?” “굳이 체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안전하게 전달만 해 주시면 돼요.” “알겠습니다.” “같이 나가시죠.” “예.” 나는 신혜지와 함께 여민관을 빠져나왔다. 시원한 밤공기를 들이마시며 먼저 내 차로 향했다. “고생하셨습니다.” * * * “내일 봅시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먼저 차를 몰고 나가는 최지훈 비서관에게 인사를 한 뒤, 그녀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후아아.” 오늘도 보람차게 청와대에서의 일을 마무리했다. 물론, 아직 한 가지 일이 남아있었다. 최지훈 비서관의 부탁. 불쾌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비서관의 개인 심부름도 업무의 연장이니까. 고위급 공무원들 중엔 개인적인 업무를 시키는 이들이 적진 않다. 청와대의 다른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심지어 자식들의 학원을 보내는 일도 있으니 더 말할 것도 없지. 그러나 어지간한 사무관들은 불평불만 없이 일을 수행하곤 한다. 어쩔 수 없이 부조리함을 참는 게 아니라. 워낙 윗선에서 업무 처리량이 많기에 불가항력이라는 걸 아니까. 게다가 하나 더. 직장인들의 입장에선 그들이 업무를 끝내야, 자신들도 퇴근할 수 있기도 하고. 신혜지도 마찬가지였다. ‘무슨 일일까?’ 그저 최지훈의 부탁이 어떤 것인지 궁금하기만 할 뿐, 불쾌하거나 불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지금까지 사사로운 심부름을 시킨 게 손에 꼽을 정도니 신기할 따름. 삐빅-. 리모컨을 누르자, 주차장 구석에 있는 승용차에서 불빛이 반짝였다. 최지훈 비서관이 말했던 은색 아반테. 그가 평소에 타고 다니는 차량은 아니니, 아마 렌트카일 터. ‘역시!’ 번호판엔 ‘허’ 자가 붙어있었다. 신혜지는 별 의심 없이 바로 운전석 문을 열었다. 그러나 문득 확인해 볼 사안이 떠올라 차에 오르는 대신, 트렁크로 향했다.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심부름 시킨 물건이 어떤 건지는 몰라도, 주차장에 대놓고 올라가야 할지, 아니면 입구 근처 적당한 곳에 세워 두고 들고 가도 될지는 체크해야 했으니까. 딸칵-. 천천히 열린 트렁크에는 커다란 사과 박스 두 개가 담겨 있었다. “……어?” 신혜지의 얼굴에 물음표가 띄워졌다. 익숙한 상자다. 정확히는 뉴스에서만 보던 모습. 사과박스는 확실하게 테이프로 봉인이 되어 있었으나, 환기용으로 만들어 둔 작은 사과박스 특유의 작은 구멍에서 노란색이 보였다. 꿀꺽. 그녀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긴가민가하며 슬쩍 상자를 들어 보자. 묵직했다. 노란색의 그 물건이 상자 가득 채워졌다는 증거. 신혜지는 황급히 트렁크의 문을 닫고 운전석에 올랐다. 타자마자 그녀는 차의 잠금장치를 걸고 핸들을 잡았다. ‘그 자태는 필시…….’ 돈이다. 100% 돈. 5만 원권 현금. 확실하다. 잠깐 들어보는 찰나, 박스에 만들어진 많은 숨구멍에서 전부 노란빛이 새어나왔고. 개중에는 신사임당의 얼굴까지 보였으니까. 사과박스에는 100장 묶음 지폐가 240묶음에서 250묶음 정도 들어가는 걸로 알고 있다. 다시 말해 그게 모두 5만 원권이라면, 12억 원을 조금 넘는 액수. 즉 트렁크에는 25억 원에 가까운 현금이 담겨 있다. ‘……이렇게 큰돈을?’ 그녀의 손에 땀이 쥐어졌다. 잠시 고민하던 신혜지는 눈을 부릅뜨며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 * * 벨로 오피스텔 803호. 신혜지에게 심부름을 시킨 그 장소에 먼저 도착했다. 따로 섭외해 둔 장소는 아니다. 혹시나 비상사태를 대비해 여의도에 있는 내 집 외에 새로운 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물론, 차명으로. 이 공간이 있는 건 마돈나 외에는 아무도 모른다. “흐음.” 기다리는 시간 동안 홀로 와인 한 병을 개봉했다. 과연 올까. 확신은 없었다. 꼼꼼한 신혜지의 성격 상, 출발하기 전에 트렁크를 한 번 확인할 터. 내용물을 뜯어 보려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확인하기 위함이겠지. 그때 그 안에 돈이 있는 걸 알아챌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이곳 주차장에 도착해서 사과 박스를 확인하면 알 수밖에 없을 것이다. 25억. 무려 25억 원이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은밀하게 전달하라고 했으면, 평범한 돈이 아니라, 검은 돈이라는 건 청와대에서 근무한 그녀가 누구보다 더 잘 알 터. 다시 말해 그녀가 그 돈을 들고 도망가더라도 내가 쉽게 추적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돈을 전달하라고 시킨 걸 언론에 제보라도 하면, 바로 내 목숨 줄이 끊어지는 것. 물론, 그런 일을 방지하기 위해 내가 이곳에 온 것이다. 기자들이 들이닥쳤을 때, 내가 이곳에 있어야 거짓 심부름이라는 걸 증명할 수 있을 테니까. 그 돈의 출처를 물을 테지만, 충분한 구색도 갖추어 둔 상태. 안전 고리는 확실하게 준비해 두었으니 걱정은 없다. 사실, 여기서 신혜지가 25억을 들고 도망가더라도 마냥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25억 원으로 사람을 하나 걸렀다면, 남는 장사니까. 이 정도로 고민할 사람이었다면, 미래에 반드시 돈으로 내 뒤통수를 치는 날이 올 수밖에 없기 때문. 그래서 시험하는 것이다. 내가 앞으로 그녀를 100% 믿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해 판단하기 위해서.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여의도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걸리는 시간은 내비게이션에 찍어 둔 경로로 45분. 이제 5분 남았다. 나는 와인을 한 모금 머금은 뒤, 살포시 눈을 감았다. 신혜지가 어떻게 판단하려나. 그리고 잠시 후.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으로 향했다. 이 문고리를 열기 전까지는 신혜지가 있을지, 아니면 기자들이 들이닥칠지는 알 수 없다. 뭐가 되었든 내게는 좋다. 신혜지를 100% 믿을 수 있게 되거나. 그게 아니라면, 위험했던 사람을 거른 것이니까. 나는 힘껏 문고리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