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승리자 (6)2022.01.17.
“……저 인간이 왔다고?” 옆에 있던 박무원 의원은 놀란 목소리를 냈다. 강성철 의원이 데려온 남성은 인사를 하며 깍듯하게 허리를 접었다. “안녕하십니까, 정춘식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정춘식! 그의 등장에 머릿속에 빠져 있던 퍼즐 조각이 맞춰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민국당 내에서도 지지율이 한참 밀리는 그가 어떻게 갑자기 민국당의 공천을 받고, 또 어떤 과정을 거쳐서 40%를 넘는 지지율을 획득하나 했더니만……. 그래, 의한회에 들어오면 불가능할 것도 없지. “허어…….” 옆에 있던 박무원 의원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탄식을 터뜨렸다. “정춘식 저 양반은 강성철 의원과 어울릴 만한 인물은 아니었는데…… 완전 샌님 이미지였거든.” “그러게 말입니다.” 듣기 좋으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동의하는 바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정춘식은 지금까지 선(善)의 길을 걸었던 인물. 마돈나가 캤을 때 굵직한 건이 없는 것만 봐도 그렇고. 자세히 따질 것 없이, 유주열 검찰총장과 친하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청렴결백의 대명사로 불리는 유주열 검찰총장은 아주 조금이라도 먼지가 묻어 있는 인물과는 등을 돌리며 적대시하는 인물이니까. 조금 거칠게 말하자면. 정춘식은 서울시장이 되기 위해 타락하기로 결심했다고 봐야지. 의한회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올바르고 선한 길에서 어긋나겠다는 걸 증명하는 법이니까. 박무원 의원은 턱을 매만지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선거가 이렇게 무섭네.” “선거가 아니죠.” “그러면?” “권력이 무서운 거죠.” “……그렇지.” “의원님은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정춘식?” “예.” “굳이 등 돌릴 필요 있나?” “강성철 의원이 데려왔는데요?” “그렇다고 강성철 사람은 아니니까.” 박무원 의원도 확실히 프로는 프로다. 하긴, 정치판이라는 곳 자체가 원래 적이 아니면 동지라고 봐도 무방한 곳이니까. 아무리 강성철 의원이 데려왔어도 100% 그의 사람이라는 확신도 없고. 내가 봐도 그럴 만한 관계는 아닌 것 같았으니까. 아마 서로 윈윈하기 위해 데려왔겠지. 그 증거로 이 의한회에서 서울시장 후보에 출마한 인물은 단 한 명도 없었으니까. 정춘식은 당선을 통해 이번 선거의 승리자가 되고. 의한회에서는 서울시장이라는 큰 카드를 얻는 법이니까. “굳이 나까지 신경 쓰지 말고 편안하게 가 보게. 나도 다음번에 인사는 나눌 생각이니까.” “알겠습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자리를 옮겼다. 물론, 그렇다고 지금 당장 정춘식에게 다가갈 생각은 없었다. 방금 이곳에 입장했기에 정신이 없을 테기도 하고. 이렇게 초반에 접근해 봤자 임팩트도 없으니까. 한창 떠들고 있는 그들을 피해 홀로 구석으로 향했다. 저 멀리 천선화의 남편, 민종근 법무부 장관이 다른 이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곳의 실세답게 역시나 주변엔 인물들이 끊이지 않았다. 내 시선이 느껴졌는지, 문득 그의 고개가 내게로 돌려졌다. 나는 가볍게 목례를 했고, 민종근 장관도 가볍게 눈인사를 했다. 추가적인 대화를 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는 내게 우호적인 생각이 없을 테니까. 자연스럽게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 “어, 잠깐만.” 민종근 법무부 장관은 대화를 하던 이들을 뒤로하고 내게로 향해 왔다. “오랜만이야, 최 비서관.” 굳이 피할 필요는 없었다. “간만에 뵙습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했다. “잘 지냈나?” 그가 내민 손을 잡으며 답했다. “그럼요. 장관님은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뭐 늘 똑같지.” 한참동안 손을 잡고 있었다. 물론, 기선 제압처럼 힘겨루기가 있진 않았다. 그런 유치한 걸 할 레벨도 아니고, 그럴 만한 나이도 아니니까. “사모님은 같이 안 오셨네요?” “오늘은 집에 일이 좀 있어서.” “아, 그러고 보니 요즘 애들 개학 준비할 시즌이라 바쁘시겠네요.” “뭐, 그렇지.” 눈빛이나 표정을 보아하니, 무언가 말하고 싶은 게 있는 모양. “청와대는 어떻고?” “특별할 건 없습니다. 요즘은…….” 그러나 곧바로 말을 꺼내기가 쉽지 않은지, 그와는 별 의미 없는 사담을 한참동안 나누었다. 그렇게 대화 소재가 다 떨어져 갈 즈음. “최 비서관.” “예, 장관님.” “저번엔 내가 조금 예민했던 것 같아.” 그는 어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해해 주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했더니만, 당시에 나와 신경전을 벌였던 게 영 마음에 걸렸던 모양. 그럴 만하지. 당시엔 그저 평범한 국회의원의 보좌진이었지만, 지금은 대통령과 같이 청와대에서 일을 하니까. 단순히 아들이라는 사실보다, 그게 더 중요할 터. 게다가 처음엔 기를 꺾어 주려고 했던 모양이지만, 내가 알고 있는 그의 부부 내외에 대한 비밀이 그 어디로도 퍼지지 않은 걸 생각하면, 믿을 수 있을 만한 사람이라는 것도 깨달았을 테고.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저는 아무 기억도 안 납니다. 머리가 안 좋아서 며칠만 지나도 다 잊거든요.” 내 대답에 민종근 장관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수능 만점자가 머리가 나쁘면 어떡하나. 난 자네한테 우리 애들 과외라도 시키고 싶은 심정인데.” “겸직 금지만 아니었으면 바로 했을 겁니다.” 그렇게 분위기를 풀고 나서야 민종근 장관은 마음이 편해졌는지 나와 샴페인 잔을 부딪쳤다.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게.” “예, 장관님도 좋은 밤 되십시오.” 민종근 장관과는 나쁘게 지낼 필요는 없다. 천선화가 그를 컨트롤할 수 있다는 약점을 알고 있다고는 해도, 어디까지나 실제로 써먹기는 쉽지 않기도 하고. 의한회의 실세라는 점과 법무부 장관이라는 파워는 언제든 유용하게 쓰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오히려 먼저 다가와 줘서 고마울 지경이지. 슬쩍 보아하니, 그사이 정춘식은 사람들과의 인사를 마치고 잠깐의 소강상태가 되어 있었다. 꼴깍. 남아 있는 샴페인을 한 입에 털어 마시고 그에게 다가갔다. “교수님.” 지금은 선거 때문에 휴직 중이지만, 얼마 전까지 겸임 교수를 했었으니 이 호칭이 편할 터. “……비서관님?” 나를 발견한 정춘식의 눈썹이 들썩였다. “여기서 뵐 줄은 몰랐는데…….”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가볍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최지훈입니다.” “비서관님 성함은 당연히 알죠. 정춘식입니다.” 정춘식의 득표율은 41.5%. 그 정도 득표율이면 서울시장에 당선될 확률은 높지 않으나, 적지도 않다. 평소처럼 대한당에서 단일 후보를 내세운다면, 당연히 그쪽에서 과반 이상의 득표율을 가져가 서울시장은 대한당의 차지가 되겠지만, 이번엔 최지만과 최지원이 경쟁을 하고 있는 만큼, 마냥 당선 불가능한 수치는 아니니까. 실제로 대선에서 40% 남짓한 득표율로 대통령에 당선된 역사도 있으니, 서울시장은 더욱 더 가능하지. “비서관님께서 의한회에 있으시리라고는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의 말에 가볍게 입꼬리를 휘었다. “원래 정치판이라는 게 한치 앞도 모르는 곳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죠.” 정춘식 교수가 서울시장에 당선될 가능성이 있다면, 조금이라도 친분을 만들어 두어야 한다. 그가 민국당의 단일 후보가 될 확률은 굉장히 높기도 하고. 무엇보다 미래 문자를 통해 상황을 알게 된 만큼, 그와는 기본적인 신뢰를 쌓아 두어야 후일 내 계획이 더 수월할 테니까. “문득 생각이 들었는데…….” 정춘식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가 조금 불편하신 거 아닐까 해서…….” “무슨 이유라도 있을까요?” “다른 형제분들이 이번 지방 선거에 출사표를 내셨잖습니까?” “에이,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내 형제의 경쟁자이기에 의한회에 들어온 걸 반기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모양. 문득 박무원 의원이 말했던 ‘샌님’이라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정치판에서 본인의 이득보다 핏줄을 따지는 건 아직까지 더러운 꼴을 제대로 못 봤다는 뜻이니까. “저는 중립입니다.” “중립이요?” “예. 두 형님들 중에서 어떻게 한 명을 고를 수 있겠습니까?”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덧붙였다. “저는 이번 서울시장의 결과에 큰 기대도, 걱정도 않습니다.” “그래도 형제 두 명 중 하나가 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나는 주변에 다른 인물이 없는 걸 확인한 뒤, 슬쩍 목소리를 낮췄다. “과연 그럴까요?” “……!” 정춘식 교수의 동공이 휘둥그레졌다. 이 정도면 나를 각인시켜 주기엔 충분했을 터. 나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면 교수님,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최 비서관님도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예.” 나는 꾸벅이고 발걸음을 옮겼다가 문득 멈춰 섰다. “참, 교수님.” 다시금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다음번에 뵈었을 땐 말 편하게 하십시오. 그게 저도 편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정춘식은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 정도면 첫인상은 합격. 차차 더 접근해 봐야겠는걸. * * * 어느새 3월 중하순. 당내 경선까지는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시점. 어느새 봄이라는 게 느껴지듯 날은 점점 더 풀렸고. 사람들의 외투는 얇아지고, 거리엔 꽃향기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최 프로는 어떻게 생각해?” “예?” “이번 당내 경선 말이야. 둘 중에 누가 될 것 같아?” “글쎄요. 진짜 모르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발표한 첫째 최지만의 지지율은 45%, 둘째 최지원은 53%를 기록하고 있었다. 2%는 무응답. “진짜 격차가 굉장히 많이 줄었어요.” “그렇지?” 처음 시작할 때만 해도, 최지만의 지지율은 40%를 채 넘지 못했다. 그런데 ‘첫째’, ‘장남’이라는 키워드를 밀고 나가는 최지만의 선거 전략이 먹혔는지, 무서운 기세로 쫓아오고 있는 상태. 상황 상, 시간은 그의 편이겠지만, 당내 경선까지는 얼마 남지 않은 만큼, 결과는 여전히 확신할 수 없었다. 박성민 자치발전 비서관은 커피를 호로록 마시고는 진득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 내가 보기엔 최지만 도지사가 역전할 것 같은데.” “그래?” 김상진 정무기획 비서관은 소파에 몸을 묻으며 다른 의견을 냈다. “나는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에서 더 간격을 좁히긴 힘들어 보이거든.” “그렇습니까?” “그렇지. 박 비서관, 나랑 내기할래?” “좋죠. 5만 원 내기 어떻습니까?” “나쁘지 않지.” “최 프로도 들어올래?” “하하, 전 사양하겠습니다.” 지이잉-. 그때, 한동안 잠잠했던 2G 휴대폰에 전화가 걸려 왔다. 진동이 울리는 건 상관이 없다. 다른 이들이 보기엔 당연히 내 명의의 휴대폰이라고 생각하지, 2G 휴대폰이 있다고는 생각지 못하니까. 일부러 진동음도 똑같이 맞춰 두기도 했고. “먼저 나가 보겠습니다.” “그래.” 나는 곧장 내 사무실로 들어와 휴대폰을 꺼냈다. 발신인은 오성복 검사. “네, 최지훈입니다.” -어, 조카! 그의 목소리에서 활기찬 기운이 느껴져 왔다. 이렇게 오성복 검사가 밝을 땐 무언가 건수가 있다는 건데. “예, 당숙. 혹시 뭐라도 찾으셨습니까?” -당연하지! 그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지현 씨랑 듣고 확인했는데, 녹음본에서 기가 막힌 걸 잡아냈어.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렸던 소식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정말입니까?” -그래. 조카가 말한 대로 정춘식이 검찰총장실에 찾아갔더라고. 녹음본 바로 보낼 테니까 확인해 봐. “알겠습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