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승리자 (5)2022.01.16.
청와대에서의 점심시간. 신혜지와 함께 점심을 먹은 뒤 여민관의 입구에서 멈춰 섰다. “혜지 씨 먼저 들어가세요.” “네, 알겠습니다.” 신혜지는 고개를 꾸벅이며 먼저 정무수석실로 향했다. 여느 때와 같았다. 그녀는 먼저 들어가서 커피를 한잔하며 업무 준비를 하고. 나는 담배를 한 대 태우기 위해 흡연 구역으로 향했다. 여민관 근처에는 몇몇 개의 흡연 구역이 있는데, 사람들이 선호하는 곳이 있고 선호하지 않는 장소가 있다. 내가 향한 곳은 오르막길을 너머에 있는 경무대. 즉 청와대의 구본관 터 근처에 있는 흡연실. 근처에 도착하자, 아니나 다를까 흡연부스 안에는 사람이 텅 비어 있었다. 식사 후 산책을 하는 사람도 굳이 오르막길을 선호하진 않으니까. 나는 그곳에서 담뱃불을 붙이며 2G 휴대폰을 꺼냈다. 마돈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도련님. “어, 밥은 먹었어?” -방금 막 식사했습니다. 도련님은요? “나도 방금 먹고 왔어.” 짙은 담배연기를 한 모금 마시며 물었다. “유주열 검찰총장은 어때?” -특별한 건 없습니다. 오전에 업무 보고받고 오후에 지방검찰청으로 출장 나간 것으로 확인했습니다. 오성복 검사가 검찰총장실에 설치한 도청기를 통해 들려오는 음성은 마돈나가 그녀의 오피스텔에서 전부 체크하고 있었다. 정확한 방식을 따지자면, 대검찰청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오성복 검사의 사무실에서 그 음성을 받아 장비를 사용해 다시 마돈나에게로 전해지는데, 정확한 시스템까지는 알 수 없으나, 확실한 건 전부 녹음이 된다는 사실. 그렇기에 간혹 마돈나가 집을 비우는 경우에도 검찰총장실에서 나오는 대화는 한 글자도 빼놓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주시하고 있다가 특이사항 있으면 알려 줘.” -알겠습니다. “그리고 저번에 맡긴 신 사무관 건은?” -신혜지 씨에 관해서는 작년에 1차, 이번에 2차까지 체크해 본 결과, 특이한 사항은 없었습니다. 서울에 있는 평범한 중산층의 집안에서 자라 온 여성입니다. “주변 인물은?” -청와대에서 일하는 만큼, 정재계에서 적지 않은 오퍼가 들어오고 있는 것으로 보이나, 그렇다 할 만한 접촉점은 찾지 못했습니다. “깨끗하다는 거지?” -예. 전혀 없습니다. “알겠어. 정춘식은?” -파악 중입니다. 자잘한 건은 파악하긴 했으나, 치명적인 건까지는 아직입니다. “자잘한 걸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을 확률은?” -꽤 높습니다. “그래. 그건 적당히 정리만 해 두고 지속적으로 팔로우해 봐.” -알겠습니다. 나는 전화를 끊고 담배를 다시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신혜지……. 능력이 있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히 아는 사실이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행정고시 수석 패스. 그뿐만 아니라, 내가 오기 전에 3년이나 정무수석실에서 버티는 것만으로도 실무에서 빠지지 않는다는 걸 증명했고. 그리고 나와 함께한 1년 동안 그녀는 단 한 번도 실수하지 않고 능력을 증명했으니까. 매일 같이 출근하며 같이 일하기에 간혹 사사로운 대화를 주고받기도 하나, 그러한 이야기가 가십거리가 되거나 외부로 유출된 적도 전혀 없었다. 정무수석실의 이야기는 그 어느 곳에서도 하지 않고, 또 다른 곳에서의 정보는 기가 막히게 가져온다.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어두운 곳에선 마돈나가 일을 처리해 주고. 밝은 곳에선 신혜지가 나머지를 도맡아 해 주는 느낌이었으니까. 그녀에 대한 신뢰도는 꽤나 많이 쌓여져 있으나, 여전히 100% 믿을 수는 없다. 오성복 검사는 혈연관계를 통해서, 마돈나는 그녀의 목숨을 구하고 미래를 약속한 것으로 완전한 신뢰를 갖고 있으나, 신혜지는 아직까지 그럴 만한 연결고리가 없으니까. 슬슬 신혜지를 100% 믿을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시험을 해 봐야 될 것 같은데. 서울시장 선거를 4달도 채 남기지 않은 이 시점에서는 그녀가 내 사람이라는 게 확실해져야 앞으로 일을 진행할 수 있을 테니까. “후우우.” 담배 연기를 자욱이 뱉어낸 뒤에야 꽁초를 재떨이에 짓이겼다. 업무 시간까지 남은 시간은 이제 10여분. 나는 구본관 터 흡연실에서 빠져나와 천천히 언덕길을 내려왔다. 정무수석실에 돌아갔을 때, 신혜지는 이미 자리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가볍게 눈인사만 하고 내 사무실로 들어가려는 찰나. “비서관님.”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나를 붙잡았다. “잠깐 이야기 좀 하실 수 있을까요?” 평소와 다른 눈빛. 무언가 있는 것 같은데. “들어오시죠.” 나는 그녀와 함께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다. 신혜지는 문까지 꽉 닫은 뒤에야 내게 한 발자국 더 다가와 입을 열었다. “방금 전에 한 남자가 왔다 갔는데, 아무래도 국정원 요원인 것 같았습니다.” 잠깐만. 국정원? 흠칫 놀란 티를 낼 뻔했다. 오늘은 다름 아닌, 국정원에서 내게 돈을 전달하기로 했던 날. 국정원장에게 따로 연락이 없기에 다른 직원을 통해서 지급 방식을 알려올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신혜지의 표정을 보아하니, 이거 아무래도……. “제게 이 편지를 주고 가셨습니다.” 도장으로 봉인되어 있는 쪽지다. 허나, 이건 신혜지를 거쳐서는 안 되는 사안이었다. 만에 하나, 그녀가 내용을 확인하기라도 했으면, 나는 물론이고 국정원장까지 약점을 잡히게 되는 것이니까. 얼마든지 휘둘릴 수 있을 뻔했다는 뜻이지. 여기서 끝나면 좋았겠으나. “어떤 사안이냐고 물어봤는데, 자금 관련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 “전달해 드리려고 들었는데, 막상 듣고 나니까 아무래도 제가 알면 안 되는 사안 같아서 직접 보고드립니다.” 신혜지도 적잖게 당황한 모양이었다. 말이 돈이지, 이런 식으로 은밀하게 전달이 되는 건, 결국 비자금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 내가 받는 건지, 캐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어떤 것이 되었든 간에 청와대에서 돈과 관련된 흐름은 엄격히 관리하고 그만큼 위험한 사안이었으니까. “아무래도 국정원 요원이 젊은 티가 나는 걸 보아하니, 신입이었던 것 같은데…….” 그 요원이 실수한 것이다. 신혜지였기에 망정이지, 만에 하나 그녀가 자리를 비우고 다른 인물이 앉아 있었다면 큰일이 날 뻔했을 터. “아, 비서관님께서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녀는 진실된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 일은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겠습니다. 제가 청와대를 떠나도 제 입 밖으로 나올 일은 없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지금까지 본 신혜지는 한 입으로 두 말 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약속하면 반드시 지키는 여자. 아무래도 지금이 적기인 것 같은데. 그녀를 믿기 전, 마지막으로 시험해 볼 관문을 꺼낼 차례. “혜지 씨.” “예, 비서관님.” “혹시 내일 퇴근하시고 뭐 하십니까?” “따로 정해진 일정은 없습니다.” “그러면 내일 업무 끝나고 부탁 하나만 들어주실 수 있을까요?” “네, 물론이죠.” “자세한 사항은 내일 말씀드리겠습니다. 시간만 비워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꾸벅이며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나는 문이 닫힌 걸 확인한 뒤, 곧장 국정원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최지훈입니다. 오늘 메시지 관련해서…….” 실수한 건 바로잡아야 한다. 여차했다가는 내 꼬리가 밟힐 수도 있는 법이니, 상처가 생기기 전에 미리 보호대부터 껴 둬야지. “네. 그 요원입니다. 우선 이번 일은 다행히 넘어갔으나…….” * * * “어, 최 비서관 왔어?” 오랜만에 도착한 의한회. 그곳에선 반가운 얼굴들이 나를 반겨 주었다. “진짜 간만이네. 왜 이렇게 오랜만에 온 거야?” “조금 바빴습니다. 자주 올게요.” “그래. 국회 떠나서 얼굴도 자주 보기 힘든데 여기서라도 보면 좋잖아?” “알겠습니다. 노력할게요.” “좋아.” 박무원 의원은 흡족스레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민국당에서 2선을 한 인물인데, 나름대로 입지가 탄탄하여 3선은 확실할 터.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이전, 지하철 파업 사건에서 기관사의 목숨을 희생해 승리하려 했던 강성철 의원과 대립되는 인물이라는 점. 같은 민국당에다가 의한회까지 함께하지만, 둘은 볼 때마다 앙숙처럼 사납게 이빨을 드러내니까. “그나저나 최 비서관, 간만에 봐서 그런 건 아닌 것 같고…… 오늘 얼굴이 밝은데?” “아, 티가 납니까?” “그래. 완전 좋아 보여.” 그럴 수밖에. 오기 전에 국정원으로부터 현금 150억 원을 받아 왔으니까. 든든한 총알이 생겼는데 좋지 않을 수가 없지. 박무원 의원은 슬쩍 새끼손가락을 들어 보이며 물었다. “혹시 최 비서관 여자 생겼어?” “어유,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일인데?” “오늘따라 일이 잘 풀렸거든요.” “아, 퇴근을 일찍 해서 올 수 있었던 건가?” “예, 맞습니다.” “하하하, 일도 좀 쉬엄쉬엄해. 청춘을 즐겨야지. 여자도 만나고. 연애도 해보고.” “그래야 되는데 영 쉽지가 않네요.” “원래 일과 사랑 두 마리 토끼 잡기가 원래 힘든 법이니까.” 그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게다가 청와대면 설렁설렁 일하기도 힘들겠네.” 나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옆에 놓여있던 샴페인 한 잔을 들어 한 모금을 마셨다. “참, 최 비서관.” “예, 의원님.” 박무원 의원은 스윽 주변의 눈치를 보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노선은 정했어?” “어떤 것 말씀이십니까?” “이번 지방 선거 말이야. 자네 형제가 둘이나 나가잖아. 한 명은 지원해야 될 거 아니야?” “글쎄요.” “최 의원 보니까 어느 정도 노선은 굳힌 것 같던데?” 최 의원이란, 나의 셋째 형 최지곤을 뜻하는 말일 터. 그렇겠지. 그는 옛날부터 오로지 첫째 형과 손을 잡았으니까. “저는 조금 더 지켜보려고요.” “슬슬 정해야 되는 거 아니야?” “요즘 일하기에도 벅차서 신경 쓸 겨를이 있어야죠. 그리고 정하더라도 제가 어떻게 함부로 말하겠습니까?” 나는 능청스레 미소를 지었다. “한 명이 당선되기 전까지는 묵비권 행사해야죠.” “하하하하하, 맞네. 맞아.” 박무원 의원은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슬쩍 내부 동향에 대해 물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민국당에서는 누구를 밀어주고 있습니까?” “일단 그림 상 김현태 구청장이 될 것 같긴 한데…… 나는 잘 모르겠어.” “의원님은 최창범 위원장과 친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박무원 의원이 거짓말할 성격은 아니고. 그렇다고 내부 정보를 파악하지 못할 만한 인물도 아니니, 여전히 민국당에서는 정춘식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는 것일 터. 대체 어떻게 구도가 바뀌는 걸까. 그때. 띵-. 엘리베이터가 열리며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그곳에선 두 명의 남자가 타고 있었다. 먼저 얼굴을 드러낸 인물은 강성철 의원. 별로 반갑지 않기에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갑자기. 짝-! 그가 커다란 박수 소리를 내며 시선을 모았다. “여러분, 한 번만 주목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늘부터 의한회로 들어오신 분이 있습니다.” 강성철 의원은 방긋 웃으며 한 발 옆으로 물러나 손짓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의 뒤에서는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 등장했다. 나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고. 이내 입꼬리가 거칠게 비틀어졌다. 그래. 그게 이렇게 된 거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