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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승리자 (4) (76/200)

빛바랜 승리자 (4)2022.01.15.

휘릭-. 여의도에 있는 오피스텔에선 서류 넘기는 소리만이 적막하게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렇게 밤이 얼마나 깊었을까. 자정을 30분쯤 남겼을 무렵. “정춘식…….” 오성복 검사는 나직이 이름을 부르며 머리를 쓸어 넘기더니 문득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조카. 정춘식 이 양반이 민국당에서 공천받는 거 맞아? 아무리 봐도 사이즈가 안 나오는데.” 그의 심정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현재 정춘식은 민국당 내에서 지지율이 20% 남짓. 1위와 2위를 달리고 있는 김현태와 최창범이 각각 40%와 30%에 육박하는 지지율을 갖고 있는 만큼, 정춘식이 서울시장이 될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고 보는 게 맞으니까. 본 선거와 달리, 당내 경선은 어지간해서는 지지율이 극명하게 바뀌는 경우가 없기 때문이다. 허나, 오성복 검사의 물음에 대해서는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설명은 할 수도 없고, 할 필요는 없으니까. “이거 확실한 거야?” 그럼에도 연신 묻는 질문에 나는 간단명료하게 핵심만 대답했다. “100%입니다.” “어떻게 아는 건데? 누가 소스라도 준 거야?”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는 답답한지 턱을 매만졌고. 조용히 보고 있던 마돈나는 슬쩍 오성복 검사에게 다가가더니. “검사님. 잠깐 저랑 이야기 좀 하실까요?” 그를 데리고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방음 때문에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전혀 들리지 않았으나, 대충 가늠은 갔다. 내 인맥에 대해서 궁금해 하지 말고. 또 내가 흐름과 다른 상황에 대해 확신을 갖고 명령을 했을 때 반발하거나 의심하지 말라는 이야기겠지. 물론, 오성복 검사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겠지만, 마돈나가 잘 설명할 터. 그것에 반발한다면 그와 함께 일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내게 오는 미래 문자에 대해서는 아무리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한들, 밝힐 수 없으니까. 게다가 마돈나는 내가 확신해서 말한 건들 중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는 걸 알기도 하고. 무엇보다 사고 당시 그녀의 목숨을 구했던 상황은 설명할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아니까. 얼마나 지났을까. 자정이 다 되어 갈 즈음에야 오성복 검사와 마돈나가 방에서 빠져나왔다. 표정을 보아하니, 잘 해결이 된 모양. 오성복 검사는 더 물어보지 않고 다시금 서류를 들여다봤고. 마돈나는 가볍게 눈인사를 하며 물었다. “커피 한 잔 드릴까요?” “좋죠. 아니지, 제가 드릴게요. 거기 커피머신 새로 사 놨는데…….” “이거 쓸 줄 알아요. 제가 할게요.” “그럴래요?” 그녀는 진한 라떼 세 잔을 뽑아 거실로 가져왔다. 잠깐 쉴 생각으로 테이블 앞으로 모였다. 한 모금을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조만간 정춘식과 유주열 검찰총장이 만날 겁니다.” “마냥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지만, 상황 상 어느 정도 이해는 가네요.” 오성복 검사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만나서 어떤 이야기를 하려나요?” “정확히는 모릅니다. 다만, 굉장히 중요한 대화를 나눌 건 확실합니다.” 나는 턱을 매만지며 고심스러운 말을 뱉었다. “아무래도 그 대화는 직접 듣거나 녹취를 하면 좋을 것 같은데…….” “어디서 만나는지는 아십니까?” “정춘식이 가끔 대검에 들어간다는 건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검찰총장실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건데…….” 고민이 깊어졌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검찰총장실은 어지간해서는 들어갈 수가 없는 구조다. 아니나 다를까 마돈나도 고개를 저었다. “암만 방법을 떠올려 봐도 거긴 힘들 것 같습니다.” “그렇겠죠?” 마돈나가 안 되면 어지간한 방법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그런데 그때. “내가 한번 가 볼까?” 오성복 검사가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갈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오성복 검사도 아직까진 일개 평검사이기에 총장실에 드나들 일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가 연줄을 잡고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기에 당연히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다만, 그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모양. “방법이 있으십니까?” “없으면 만들면 되지.” 오성복 검사는 거칠게 입꼬리를 휘었다. “내가 괜히 미친개 소리 듣는 게 아니잖아.” “……아!”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래. 광견병 걸린 불도그, 미친개 소리를 듣는 오성복이라면 가능할지도. “가서 녹음기만 설치하면 되는 거지?” “예, 맞습니다.” “장비만 구해 줘. 천천히 준비해 볼 테니까.” “장비는 제가 구하겠습니다.” 마돈나는 눈썹을 들썩이며 미소를 지었다. “잘 아는 업체가 하나 있거든요.” “그래. 그러면 지현 씨가 장비 구해서 넘겨주고, 정춘식 뒤를 더 캐봐. 뭔가 나올 수도 있으니까.” “알겠습니다.” “장비 나오면 연락해 줘.” 오성복 검사의 얼굴에서 자신감이 가득 피어올랐다. 이래서 망나니들이 하나씩은 꼭 필요하다니까. * * * 서울중앙지검 문화범죄전담부의 부장검사실. 똑똑. 노크소리가 들리자, 책상 앞에 있던 남자는 고개를 들며 외쳤다. “들어와.” 조심스레 문이 열리며 들어온 인물은 다름 아닌, 오성복 검사. “어, 오 검사. 무슨 일이야?” “오전 회의에서 말씀드렸던 건 관련해서 말씀 좀 드리려고요.” “따로 보고한다던 거?” “예.” 부장검사는 알 것 같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또 우리 부서랑 관련 없는 일이지?” 오성복 검사의 끄덕임에 부장검사는 고개를 휘휘 저었다. 한두 번이 아니었다. 모든 지방 검찰청에서는 각각의 부서에 따라 업무가 나뉘어져 있다. 경찰청에서 넘어온 사건들을 부서에 맞게 배정하고 검사들이 맡아 진행을 한다. 문화범죄전담부도 마찬가지. 매주 월요일, 회의를 통해 부장검사가 직접 검사들에게 사건을 배정해 주고, 오성복 검사도 마찬가지로 사건을 받는다. 그런데 오성복 검사는 시키는 일 외에 늘 직접 커다란 사건들을 물어오곤 한다. 일이 복잡해지는 이유는 문화범죄전담부와 관련 없는 사건들이라는 것이지. 적당히 큰 거라면 실적이 될지도 모르지만, 더 중요한 건 어지간해서는 감당하기 힘든 문제들이라는 사실. “내가 시킨 일이나 좀 잘해라.” 오성복 검사는 능청스레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기한 넘긴 적은 한 번도 없잖습니까?” “공판부에서 요청하고 또 요청해야 겨우 넘겨주면서 무슨.” 아무리 말해 봤자, 들어먹지 않을 놈이라는 걸 알기에 부장검사는 혀를 끌끌 차며 펜을 내려두었다. “그래서 또 무슨 건인데?” “이번엔 진짜 어지간한 사건이 아닙니다.” 그는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검찰 내의 커넥션과 관련된 일이에요.” “……뭐?” 순간, 부장검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진짜야?” “이거 잘되면 부장님도 위에서 한 번 부를 수도 있습니다.” “…….” 꿀꺽. 부장검사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암만 서울중앙지검의 부장검사라고 한들, 문화범죄조사부라는 부서의 특성상 크나큰 파워는 지니지 못한다. 하지만 검찰 커넥션과 관련된 거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더 좋은 부서 혹은 대검으로 넘어갈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는 사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뭔데.” 그는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말해 봐. 괜찮으면 지원해 줄 테니까.” “여기서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뭐?” 부장검사의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오성복 검사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어지간한 수준이 아닙니다. 위에 직접 보고 드려야 될 만한 사안이에요.” “확실한 거야?” “예.” “증거는?” 오성복 검사는 대답 대신 자신의 주머니에서 USB 하나를 꺼내 보이며 미소를 지었다. 사실, 쥐뿔도 없었다. USB에는 직박구리 폴더와 자신의 어릴 적 사진 몇 장뿐. 지금 말하는 검찰 커넥션과는 일말의 연관성도 없었다. 그저 검찰총장실에 들어가기 위한 거짓부렁. 그러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부장검사는 진지하게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 내가 차장님께 말씀드릴게. 한 번 같이 브리핑 받자고.” “안 됩니다.” “위에 직접 보고한다며?” “차장님보다 더 높으신 분이 필요합니다.” “검사장님? 너 미쳤어? 어떻게 평검사가 검사장님을 직접 뵈려고 그래?” “아니요. 더 높으신 분이요.” “…….” “총장님을 직접 뵙고 싶습니다.” “이런 또라이 새끼.” 그는 헛웃음을 차며 펜을 책상 위에 툭 던졌다. “안 돼. 이 미친놈아.” “왜 안 됩니까? 같은 검찰 대 검찰로 중대 사안을 보고하는 건데.” “무슨 같은 검찰이야? 너랑은 신분이 달라.” “안 된다는 겁니까?” “그래, 안 되지.” “그러면 차장님께 그대로 보고 드려도 되겠습니까?” 그는 광인을 보듯 오성복 검사를 바라봤다. “너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예. 제가 언제 거짓인 적 있었습니까?” “정신 차려. 너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래?” “진짜 중요한 건이라서 그렇습니다.” “하아…….” 부장검사는 이마를 짚으며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한참의 고민 후 다시금 물었다. “확실한 거야?” “예.” “기다려 봐. 내가 차장님 뵙고 올 테니까.” “감사합니다.” “너 진짜 별거 아니기만 해.” 오성복 검사는 씨익 입꼬리를 비틀었다. “걱정 마시라니까요.” * * *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오성복 검사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금까지 봐 왔던 여느 검사실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 내부의 공기가 달랐다. 묵직하게 목을 조여져 오는 듯한 느낌. “안녕하십니까!” 입장하자마자 그는 깍듯하게 허리를 접어 인사했다. “서울중앙지검 오성복입니다!” “그래.” 유주열 검찰총장은 짤막한 대답을 하며 손짓했다. “검찰 내부 커넥션에 대해서 정보를 들고 있다고?” “예, 그렇습니다.” “한번 줘 봐.” “전자 파일 형식이라서…….” 그는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USB를 꺼내 보였다. 유주열 검찰총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노트북이 있는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테이블에 있던 노트북의 전원을 켰고, 오성복 검사는 USB를 직접 꽂아 주었다. “여기 이 PPT 자료 보시면 됩니다.” “그래.” 그는 스크롤을 내리며 노트북 화면으로 시선을 집중했다. 자료는 보고용으로 대충 짜깁기를 해 두었다. 무언가 있어 보이는 척하면서도 실상은 없는. 읽는 데 시간만 한참 걸리는 문서. 유주열 검찰총장은 매섭게 집중을 하며 빠른 속도로 자료를 읽어 내려갔다. “우선 이 첫 번째 장에서는…….” 오성복 검사는 문서에 대해 설명을 하는 척하며 슬쩍 주머니에 있던 초소형 녹음기를 꺼냈다. 유주열 검찰총장이 문서에 집중하도록 만든 뒤, 그는 다른 손으로 조심스럽게 테이블 밑에 녹음기를 부착했다.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그의 손은 능숙했다. 유주열의 정신이 검찰 커넥션에 팔려 있는 사이, 녹음기를 완벽하게 테이블에 붙이는 데 성공했다. 검찰총장이 전혀 눈치채지 못한 완벽한 성공. 오성복 검사는 유주열이 보이지 않는 반대 손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기계는 실시간으로 녹음을 해서 마돈나에게로 전송할 터. 그녀가 직접 듣고 파일로 저장할 것이다. 사실, 당사자가 포함되지 않은 대화에 대한 동의 없는 녹음은 불법이다. 아무리 검사가 수사 목적이라는 핑계를 대도, 불법 사찰에 들어간다. 허나,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 녹음본은 수사용으로 쓰일 게 아니었으니까. 그러는 사이, 보고서를 전부 읽은 유주열 검찰총장은 미간을 찌푸리며 오성복 검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서울중앙지검 반부패부랑 문화체육부 장관이 손을 잡았다는 거야, 말았다는 거야?” “의심이 되어서 조사를 진행하고자 한다는 사안을 보고드리려고 왔습니다.” “……뭐?” 유주열 검찰총장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지금 확실한 증거도 없이 나한테 온 건가?” “…….” “자네 정신 나갔어?” 그의 목소리가 차갑게 굳었다. “세상 어느 검사가 그래!” 유주열 총장의 언성이 높아졌다. 그럼에도 오성복 검사는 모르는 척 미친개를 빙의해 연기했다. “혹시라도 총장님께서 커넥션이 있으시면 불편하실 수도 있어서 허락을 받으려고…….” “난 그렇게 부끄럽게 살지 않았어. 검찰에 있는 30년 동안 나는 단 한 번도 손에 오물을 묻히지 않았어! 아직도 그걸 몰라?” “죄송합니다.” 오성복 검사는 실수했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접었다. “만에 하나 불쾌해하실까 봐…….” 유주열 검찰총장은 불편한 표정을 잔뜩 드러내며 노트북을 덮었다. “나가. 당장 나가서 네가 말한 이 년놈들 유착 증거 다 캐 와. 못 가져오면 넌 지방으로 쫓겨날 줄 알아. 알아들었어?” “알겠습니다.” 오성복 검사는 도망가듯 검찰총장실을 빠져나왔다. 쫓겨나듯 엘리베이터에 탑승한 그는 휴대폰을 꺼내 문자를 한 통 보냈다. -수신인: 최지훈 -조카, 미션 성공했어. 그의 입가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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