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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승리자 (3) (75/200)

빛바랜 승리자 (3)2022.01.14.

2월 중순. 서울시장 예비 후보자 등록이 시작되었다. 민국당에서는 4명, 만세당에서는 2명, 무소속에서는 3명의 후보자가. 대한당에서는 단 두 명만이 예비 후보로 등록을 마쳤다. 물론, 예비 후보자는 말 그대로 예비 후보자일 뿐, 정식 입후보한 건 아니었다. 허나, 이 11명의 후보자들 중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은 단연코 두 명. 최지만과 최지원이었다. 총성 없는 전쟁이 끝나고 이제 본격적인 선거 운동을 시작할 수 있는 차례. 아니나 다를까, 둘은 기다렸다는 듯이. -속보! 대통령의 장남 최지만, A그룹과 유착 의혹……. -단독! 최지원 판사, 결국 목적은 권력이었나? -속보! 최지만, 경상북도 버리고 서울로 입성…… 믿어 달라고 해 놓고 경상북도민은 외면하나? -뉴스! 최지원 판사와 송병준 의원의 커넥션…… 끝나지 않은 비리를 밝힌다! 서로에 대한 비방 짙은 디스전을 시작했다. 오늘부터 펼쳐질 선거 운동을 대비해 아주 기똥차게 자료를 준비해 둔 모양. 본 선거는 6월이지만, 둘에게 중요한 건 공천권을 두고 4월에 펼쳐질 당내 경선. 겨우 2달밖에 남지 않았기에 그들은 총력전을 펼칠 것이다. 사실, 나 또한 오성복 검사와 마돈나를 통해 그들의 약점을 몇 가지 캐 두었다. 다만, 적극적으로 활용할 생각은 없었다. 다른 일과 업무도 병행했던 나와 달리, 최지만과 최지원은 1년 내내 서로에 대해 캐고 다녔을 터. 내가 있는 자료들을 그들이 들고 있을 확률이 높으니까. 그리고 내가 원하는 그림으로 가기 위해서는 둘 모두를 낙선시켜야 한다. 양 측에게 붙어 서로에게 자료를 넘기다가 자칫해서 걸리기라도 하면, 양쪽 모두를 적으로 돌리게 되는 법이니까. 며칠 전, 설날을 맞이해 청와대 관저에서 모였을 때 두 명의 형 모두 내게 접근했다. 둘 모두 의견은 같았다. 안 그래도 당내 경선을 고작 두 달 앞둔 상황이기에 고사리 손 같은 도움이라도 필요하니, 함께 하자는 것.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중립에 서겠다는 말과 함께 둘의 제안을 모두 거절했다. 원래 처음부터 중립이던 사람이 다른 곳에 간 것에 비해. 자신과 손을 잡았다가 배신하는 사람이 더 얄밉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굳이 미운털이 박힐 필요는 없지. 사실, 그들도 간절하게 나를 붙잡진 않았다. 내가 국회에 있던 2020년엔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국민들에게 노출되며 인지도를 높였지만. 작년인 2021년 초, 청와대에 들어온 직후 1년이 넘는 시간동안엔 청와대 뒤에서만 행동했기에 서서히 잊히고 있었으니까. 어차피 지금 당장 선거에 출마할 나이는 되지 않고. 그 전까지 내 입지를 탄탄하게 굳히는 게 목표니, 내게는 이 편이 더 낫지. 어쨌든 이러한 상황 안에서 나는 지방 선거 동안 민국당의 당선을 위해 움직일 예정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번에도 수면 밑에서 움직일 예정. 정확히는 최지훈이라는 정체 자체도 드러내지 않을 생각이다. 마돈나를 통해서 움직일 것이고, 당선이 되고 나서 그의 도움이 필요할 때 마돈나를 통해 요청할 예정이니까. 현재 예비 후보자로 등록된 11명 중 나의 두 형을 제외하고 가장 당선이 유력한 건 단연 민국당이다. 만세당은 국회의원 의석수는 제3당 치고는 많이 갖고 있더라고 한들, 대선과 서울시장과 같은 큰 선거에서 입지는 민국당과는 비교가 안 되니까. 민국당 후보는 총 4명. 그들 중 당내 입지를 순서대로 나열하면. 김현태. 최창범. 정춘식. 박미자. 이 중에서도 김현태의 지지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당내 경선에서 별다른 이변이 없다면 그가 승리하여 민국당의 최종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할 터. 우선, 마돈나를 통해 그를 만나 볼 생각이었다. 먼저 접촉하기 위해 자료를 준비하던 그때. 지잉지잉-. 지잉지잉-. 순간, 휴대폰에 두 개의 문자가 도착했다. 미래 문자가 올 때 특유의 알림. 그것도 무려 두 번이나. -보낸 이: 24 -동영상 하나는 동영상이었고. -보낸 이: 24 -정춘식 득표율: 41.5%. 하나는 짧은 텍스트 문자였다. 나도 모르게 침이 꿀꺽 넘어갔다. 무려 두 개의 미래 문자. 한동안 미래 문자가 오지 않나 싶더니, 한 번에 두 개나 몰려왔다. 나는 우선 첫 번째 문자로 수신된 동영상부터 확인했다. 어두운 화면이 걷히며 널따란 사무실이 시야에 들어왔다.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실내로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오셨습니까?” 익숙한 목소리. 화면에는 다리만 찍히고 있지만, 분명 두 명의 목소리 모두 익숙했다. “너무 일찍 온 게 아닌가 싶네요.” “아닙니다. 마침 할 일이 없던 참이었어요. 앉으시죠.” 짧은 대화 이후, 카메라 앵글이 올라가며 두 사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놀란 탓에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으니까. 민국당의 예비 후보자 중 3위를 달리고 있는 정춘식. 그리고 국민들의 뜨거운 지지를 받고 있는 유주열 검찰총장. 그제야 배경이 확실하게 눈에 들어왔다. 대검찰청의 검찰총장의 사무실. 그곳에 정춘식이 찾아온 모양이었다. 왠지 모르겠지만, 고개가 갸웃거려졌다. 그가 왜? 정춘식도 나름 청렴하다고는 알려져 있긴 하나, 내가 아는 것은 그것뿐, 특별한 자료는 없었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내셨죠?” “그럼요.” 둘은 구면인 듯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특별한 건 아니고…….” 정춘식은 주머니에서 USB 하나를 건넸다. “그 두 명에 대한 자료인가요?” “예, 맞습니다.” 두 명이라……. 보낸 이로 미루어보아, 최지만과 최지원일 확률이 높으나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자료는 확실한가요?” “전화로 말씀드렸던 것과 같습니다.” “안 그래도 요즘 언론에서 크게 다루고 있는데…….” 유주열 검찰총장은 곧장 USB를 노트북에 꽂아 확인했다. 한참동안 자료를 살핀 그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무래도 둘 다 같이 나가리가 될 것 같군요.” “터뜨리실 수 있겠습니까?” “그럼요. 이미 검찰에서 조사를 착수했습니다. 혐의점도 적지 않게 드러났고요.” “제가 걱정하는 건.” 그는 잠깐 고민하는 듯하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총장님의 신변에 대한 문제입니다.” “제 안위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겁니까?” “예.” 정춘식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에게는 좋지만, 이렇게 되면 당내에서 유력한 후보 두 명이 사라지게 되잖습니까. 분명 당 차원에서 보복하려들 겁니다.” “그건 괜찮습니다.” 유주열 검찰총장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누군가가 제 흠을 잡으려고 했을 때 쉽게 잡힐 만큼, 저는 지저분하게 살지 않았으니까요.” 괜히 청렴결백의 대명사로 불리는 인물이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두 명은 반드시 처벌받아야만 해요.” 그는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미 혐의점이 적지 않게 드러났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서울시장 후보라고 지레 겁먹으면 쓰나요. 오히려 더 확실하게 조사를 해서 잘못된 점을 밝혀야죠.” “총장님이 피해를 입으실 수도 있으니, 그게 걱정되어서 그렇습니다. 원래 정치하는 양반들이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정말 더러워지니까요.” 유주열 검찰총장은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의원님. 제가 왜 검사가 된 줄 아십니까?” 그는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정직한 대한민국,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강직한 뜻을 이어 나갔다. “대한민국엔 부정부패가 만연합니다. 사실, 민주주의 사회라는 게 부의 불공평만큼, 권력 또한 불공평한 분배가 되기에 이상향만큼 정의로울 수가 없는 법이거든요. 하지만 최소한 정의로운 사회를 표방한다는 시늉은 해야 합니다. 명백한 잘못이 드러났으면, 반드시 처벌받아야 된다는 뜻이에요.” “…….” “총장으로 있으면서 더러운 꼴 한두 번 본 게 아닙니다. 확실한 유죄라도 집행유예로 빠져나가는 정치인들 적지 않은 거 알죠. 기업인들도 마찬가지고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잘못을 저질러 놓고 ‘내가 돈 많은 데 어때?’라든지, ‘내가 권력자인데 어쩔 거야?’ 이런 식으로 나가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유주열 검찰총장은 진솔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되면 사회가 자정 작용을 잃게 되는 겁니다. 부정부패가 판을 치는 거죠. 어떻게 되느냐, 결국 돈 많고 뇌물 쓰는 놈이 이기는 나라가 되는 겁니다. 그게 정의가 되는 거예요. 그것만큼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는 노트북에서 USB를 뽑아 들어 보였다. “특히나 이번처럼 사회적으로 문제가 두드러졌을 경우엔 더욱더 그렇죠. 사회가 불공정하다는 게 국민들의 인식에 깔리게 되면, 그때부터는 법보다 주먹과 돈이 우위에 설 수밖에 없어요. 국가체계가 무너지는 겁니다.” 유주열 검찰총장은 확고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기에 이번 건은 제가 책임지고 반드시 처벌토록 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 대화를 끝으로 동영상은 종료되었다. 어떻게 된 걸까. 표정과 말투에서 나오는 뉘앙스를 보아하면, 그 ‘두 명’은 확실하게 유죄 판정이 날 가능성이 높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찰총장이 이렇게 결심했다는 건 보통 사안이 아니니까. 다만, 상황으로 보아하면 첫째 형과 둘째 형에 대한 언급은 일언반구도 나오지 않는다. 그들이 아닐 가능성도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이지. 그리고 걸리는 건 두 번째 문자. 10글자를 겨우 넘는 짧은 글자였지만,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확실했다. “왜지?” 의문이 먼저 터져 나왔다. 정춘식은 현재 민국당 예비 후보자 두 명 중 지지율이 4명 중 3위에 불과하다. 그런데 득표율이 40%를 넘어가다니. 올해 펼쳐질 선거는 지방 선거와 당내 경선 두 개뿐. 당내 경선의 득표율일지, 지방 선거일지는 알 수 없으나, 둘 중 하나인 건 확실하다. 그가 부녀회장 같은 선거에 나갈 일은 없으니까. 문득 최종 지방 선거에서의 득표율이 아니라, 당내 경선에서의 득표율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지만, 그럴 가능성도 높지 않았다. 애초에 민국당 예비 후보자 중 1위와 2위인 김현태와 최창범 둘만 합치더라도 당내에서 80%이상의 지지율이 확보가 된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굉장히 혼란스러워졌다. 일단 중요한 건 첫 번째 문자 속 동영상의 대화 시기. 둘이 입고 있는 옷에 외투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미 일어난 일은 아니다. 보낸 이를 생각하면, 지금보다 이후 시점에서 발생했다고 말해야 할 가능성이 더 높으니까. 평범한 대화가 아닌 만큼, 둘이 어떤 관계인지. 또 정춘식이 무슨 자료를 들고 있는지. 그 자료의 대상이 누구인지부터 체크할 필요성이 있다. 시간이 많지 않다. 분주하게 움직여야만 한다. 나는 곧장 2G 휴대폰을 꺼내 마돈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도련님. “나야. 오늘 저녁에 회의할 게 생겼어.” -7시까지 도련님 댁으로 가면 될까요? “응. 그때 보자고.” -알겠습니다. “오성복 검사도 오늘 업무 끝나는 대로 곧장 들어오라고 해.” -예. 바로 연락해 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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