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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바랜 승리자 (2) (74/200)

빛바랜 승리자 (2)2022.01.13.

“그러면 너는 누가 되길 원하는데?” “응?” “누가 당선되어야 너한테 더 좋은 건데?” 사실 누가 되든 일이 복잡해지긴 한다. 서울시장이라는 직책이 갖는 파워는 어마어마하니까. 첫째 형이 당선되면, 득세하던 둘째가 밀려난다는 장점이 있지만. 경상북도 도지사를 거쳐 서울시장이라는 화려한 커리어가 생긴다. 게다가 다른 형제들을 꺾었다는 명분까지 생기니, 대권에 도전하기 아주 좋아진다는 것이지. 둘째 형이 당선된다 해도, 크게 좋을 점은 없다. 이미 당내에서 커진 그의 ‘대통령의 후계자’라는 입지를 굳히는 것이니까. “내 입장에서는…….” 나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둘 다 당선되지 않는 게 좋지.” “하긴, 그렇겠네. 근데 그러기는 어렵지 않아?” “그렇게 만들어야지. 아무리 어렵더라도 불가능한 게 없는 곳이 바로 정치판이거든.” 내 대답에 넷째 형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설마…….” 나는 거칠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서울시장이 반드시 대한당에서 나오리라는 법은 없잖아?” 그때. 똑똑. 노크소리와 함께 문 건너편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들, 과일 먹어라.” “예, 어머니.” 나는 대답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그래.” 우리는 나란히 걸어와 거실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역시나 오늘도 최은실이 과일을 깎고 있었다. 다만, 다른 점이 있다면 그의 남편, 박홍성이 함께 앉아 있다는 점. “어, 처남들 왔어?” “아, 네. 매형.” 넷째 형과 나는 겉치레로 인사를 하며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사실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다. 아버지께서는 외부인이 청와대에 드나드는 걸 좋아하지 않으신다. 그에게는 며느리와 사위도 외부인에 속한다. 어머니와 나를 포함한 6남매라는 직계 가족 외에는 이 관저에 아무도 들이지 않으신다. 간혹 손주가 보고 싶을 때만 가끔 직접 자식들의 집에 가서 보시거나 삼성동에 있는 저택으로 그들을 부르지, 어지간해서는 청와대로 초청하지 않으니까. 오늘 같은 설날도 마찬가지. 이미 결혼하여 아이까지 있는 다른 형제들 중 그 누구도 며느리를 데려오지 않았다. 그저 최은실만이 홀로 남편을 데려온 것이지. 그것도 일부러 저녁 먹은 뒤의 늦은 시간에 불러서 돌려보낼 수 없도록. “아버지께는 말씀드렸어?” 나는 슬그머니 누나에게 물었다. 그러나 최은실은 코를 찡긋하며 대답했다. “나오시면 직접 인사드리려고.” “아버지가 안 좋아하실 것 같은데.” “에이, 그렇다고 설마 내치시겠어?” 그녀의 눈가에 있던 자글자글한 주름이 깊게 파였다. “사위가 손자까지 데리고 왔는데 말이야. 호호호.” “……시은이도 왔어?” “응. 지금 아버지한테 먼저 인사드린다고 갔는데.” “어디 계시는데?” “서재로 들어가셨다고 해서 시은이가 모시러 갔어.” 이거 아무래도 불안한데. 그때 첫째 형과 둘째 형이 천천히 거실로 나왔다. 그들은 서로 그러나 눈싸움도 잠시. “흐아아아아앙-!” 서재에서 여자아이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최은실과 박홍성이 다급하게 딸의 목소리가 들리는 서재로 뛰어갔고. 우리 형제들이 그 뒤를 따랐다. 그리고 내 눈앞에는 역시나 예상했던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넌 또 뭐야!” 사위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얼굴을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고. 목에는 핏대가 서 있었다. 그를 향한 아버지의 거센 일갈이 들려왔다. “내 집에서 당장 나가!” “아버지…….” 최은실이 다급하게 나아가 당황함을 감추고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새해 인사도 못 드려서 오랜만에 인사드리러 온 거예요.” “해외에 놀러가는 바람에 삼성동에 오지도 않은 녀석들이 무슨 낯짝을 들이밀어!” 2022년 1월 1일. 새해를 맞이하여 삼성동 저택에 모이라는 아버지의 전언이 있으셨다. 문제가 있다면, 그 하루 전날에 통보가 갔다는 점. 결국 해외에 놀러가 있던 최은실 내외는 오지 못했고. 그것을 핑계 삼아 오늘 눈도장을 찍으려고 데려왔던 모양. “내가 아무나 함부로 들이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아버지, 아무나라뇨. 아버지 사위와 손녀예요. 오랜만에 만났으니 따뜻하게 손녀도 한 번 안아 주시고…….” “…….” 최은실의 변명에 아버지의 동공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그제야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그녀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제 방에서 조용히 오늘밤만 머물고…….” “너도 나가.” 누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는 단호하게 말했다. “다시 내가 부르기 전까지는 이 관저에 얼씬도 하지 마. 한 걸음이라도 들였다가 내 눈에 걸릴 시에는…….” 아버지는 살벌한 목소리로 말을 덧붙이셨다. “박 서방은 물론이고 사돈까지 정계에서 지워 버릴 테니까.” 경고 짙은 목소리에 최은실은 아연실색하여 아이의 손을 잡고 도망치듯 남편과 함께 청와대를 빠져나갔다. “너희도 똑똑히 들어.” 아버지는 눈을 부릅뜨고 우리 형제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 허락 없인 관저엔 아무도 못 들어와.” “……예.” 아버지는 문을 쾅 닫으며 서재로 들어가셨다. 우리는 그제야 숨을 몰아쉬며 거실로 돌아왔다. 최은실이 깎다가 내던져 둔 과일은 어머니가 다시 과도를 들고 깎기 시작하셨다. 첫째 형은 슬쩍 아버지의 서재 쪽을 바라보고는 목소리를 낮춘 채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예전보다 더 예민해지신 것 같지 않아?” “그런 감이 없진 않아.” 셋째 형은 그렇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나이가 드셔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둘째 형 최지원은 내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막내야, 네가 보기엔 어때? 청와대에서 근무하니까 제일 잘 알 거 아니야?” “글쎄. 나도 잘 모르겠는데. 여기서 근무해도 아버지 얼굴은 거의 못 보니까.” “하긴…… 그래도 네가 잘 챙겨 드려. 아버지 곁에 있는 건 너뿐이다.” “알았어.” 입에 발린 소리는. 겉으로 신경 쓰는 척해도, 둘째 저 인간이야말로 아버지가 잘못되기를 바라고 있을 터. 지금 구도에서 대통령이 공석이 되면, 자신이 가장 유력한 권좌에 오를 후보가 될 테니까. 어머니는 사과에 포크를 하나씩 찍어 테이블 가운데 내려 두며 말했다. “아버지 건강은 내가 챙기니까 너희는 과일 먹으면서 TV나 봐.” 셋째는 리모컨을 찾으며 툴툴대는 소리를 냈다. “TV에서도 재미있는 거 안 하는데요, 뭐.” 슬쩍 바라본 TV의 방영중인 채널에서는 뉴스가 한창이었다. 현재 검찰이 신뢰도와 공정성에서 시민들의 평가 1위를 달리고 있는데, 이는 최준석 정부 출범 이후 처음이었으니까. 첫째 형은 사과를 아삭아삭 씹어 먹으며 툭 말을 던졌다. “확실히 수장 하나로 조직이 바뀌긴 바뀌네.” “그렇지. 유주열 검찰총장 팬클럽까지 생겼다잖아.” “저분 대한당에 영입하면 참 좋을 텐데.” “저 양반은 죽어도 정치는 안 할 것 같아.” “하긴, 뼛속부터 아예 검사를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더라.” 그때 문득 넷째 형도 입을 열었다. “정치에 관심 없는 나도 저 검찰총장은 알겠더라. 그렇게 청렴결백하다며? 일도 잘하고.” “괜찮은 사람 같아.” 첫째 형은 무심코 말을 던졌다. “내가 영입하려 했는데 안 되더라고.” 둘째 형의 눈빛이 사납게 쏘아졌다. “법조계는 건들지 말라니까.” 또 시작이네, 또 시작이야. 어머니가 깎던 배의 껍질이 툭 끊어졌다. “그만.” 어머니는 첫째 형과 둘째 형을 번갈아보며 말했다. “둘 다 입 닫고 과일 먹어.” “……예.” “네.” * * * 여의도의 오피스텔. 초인종에 문을 열어 주자, 오성복 검사가 빠르게 신발을 벗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오셨어요?” “어, 조카.” 그는 굳이 사담을 꺼낼 필요가 없다는 듯 곧바로 책상 위로 다가가 자신의 서류 가방을 내려놓았다. 오성복 검사의 얼굴엔 득의양양한 자신감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뭔가 찾으셨나 보네요.” “그렇지.” 그는 씨익 웃으며 서류 가방을 열었다. “서울시장 아들이 지금 대학생인 건 알지?” “예. 차남 한민성이 신촌대학교 재학 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국내에서는 한국대 다음으로 가는 명문대. 군대도 갔다 왔으니, 이제 아마 졸업반일 것이다. “맞아. 그런데 그 녀석이 수시로 입학했다고 알려졌거든.” 오성복 검사는 가방에서 서류뭉치 하나를 꺼냈다. “정확히는 학생부 종합 전형이라는 거야. 수능 성적 없이 생활기록부만으로 판단해서 대학에 합불 여부를 결정하는 건데.” 그가 건넨 서류는 한민성의 고등학교 시절 생활기록부. 한 번 살펴본 결과, 서류는 깔끔했다. 내가 입시 전문가는 아니지만, 실제 수능 만점 출신으로서 한민성의 생활기록부는 어지간한 학생들보다도 훌륭한 수준이었으니까. 성적이 우수한 것은 물론이고 선생님들의 온갖 호평에 각종 경시대회 수상까지. “이 생활기록부는 담임과 각 과목 선생님들이 작성하는 거잖아.” “그렇죠.” “그리고 단순히 수기나 문서로 작성하는 게 아니야. NEIS라는 사이트를 통해서만 작성이 가능해. 그런데.” 그는 가방에서 새로운 차트 하나를 꺼냈다. “이건…….” “한민성의 생활기록부 수정 내역이 담긴 파일이야.” 글의 수정 내역은 특별한 게 없었다. 그러나 우측 한 편에 있는 다른 로그가 눈에 들어왔다. 생활기록부 마감일로 알려진 날짜마다 오후 11시 이후에 전 과목에 걸쳐 한 사람에 의해 수정이 되었다. “잠깐만요. 이거 로그인한 사람이…….” “교감이야.” “교감이 이걸 건드릴 이유는 없을 텐데.” “그 교감 이름이 백미진이야.” “……아!” 백미진. 다시 말하면, 서울시장 한중현의 와이프다. 차남인 한민성의 어머니기도 하고. 머릿속에서 단숨에 퍼즐이 맞춰졌다. 학년이 바뀌면 이전 담임이 생활기록부를 볼 수 없다는 점을 노린 것이다. 그래서 일부러 생활기록부가 마감되기 직전에 임의로 접속하여 가장 중요한 행동 특성 및 종합의견과 교과별 세부사항 등 각종 항목을 그의 어머니인 백미진이 직접 수정한 것이지. “이러면 합격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네요.” “당연하지. 모든 걸 이상적으로 적어 놨는데 떨어지면 그게 문제인 거지.” 그리고 이 말인즉슨. “아주 확실한 입시 비리네요.” “그렇지.” 오성복 검사의 눈빛엔 자신감이 차올랐다. “아주 명백한 증거야. 혹시나 몰라서 NEIS 사이트에 요청해서 원본 파일도 받아 놨다.” “고생하셨습니다.” 나는 허리를 펴며 그를 바라봤다. 쉽지 않을 거라고 하더니만, 이렇게 기똥찬 증거를 가져올 줄이야. “어떻게 알아내신 겁니까?” 한중현은 이미 서울시장 선거를 두 번이나 겪은 인물. 다시 말해 그 동안의 선거를 통해 어지간한 건 전부 밝혀졌을 터.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걸 찾아낸 게 용할 수준이었다. “운이 좋았어.” 오성복 검사는 숨길 생각이 없는지 솔직한 사정을 털어놓았다. “얼마 전 초등학교 동창회를 했는데, 거기서 만난 동창 중 하나가 자기 제자 중에 유명한 사람의 자제가 있다면서 이야기를 하더라고.” 그게 한중현의 아들, 한민성이었던 것일 터. 일이 잘되려니, 이렇게 또 들어맞는다. “한참 대화하다 보니까 슬쩍 말이 나오더라고. 자기가 요즘 긴가민가한다길래 왜 그러냐고 물어봤더니, 애가 물어볼 게 있어서 왔는데 생기부에 자신이 적지 않은 내용이 있어서 의아했다고 하더라.” 우연도 보통 우연이 아니다. “2학년 때 담임이었대.” “허허…….” “그 친구 만나서 직접 확인했어. 이 생활기록부는 자신이 쓴 적 없다는 녹취까지 받아 놨다. 추가로 외부엔 내가 말하기 전까진 절대 언급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는 서류가방에서 USB 하나를 꺼내 일말의 망설임 없이 내게 건넸다. “녹취록 원본이야.” “원본이요?” 그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필요할 때 쓰려면 잘 보관해 둬.” 녹취록 원본.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적지 않았다. 이번 사건 전체를 나에게 넘긴다는 것. 힘들게 조사해 온 사건을 밝힐 결정권 자체를 내게 건넨 것이다. 이를 다시 말하면. 오성복 검사가 확실히 내 사람이 되겠다는 뜻. 충성을 맹세한 것이지. “잘 보관하겠습니다.” 나는 가볍게 입꼬리를 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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