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승리자 (1)2022.01.12.
“어, 나야.” -임지현입니다. 통화 괜찮으십니까? “말해.” -지시하셨던 최은실 씨와 그 남편 가족에 대해서 어느 정도 조사를 했는데요. 그녀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기업들과 접촉하며 자금을 모으는 건 확인했습니다만, 현재까지 모금한 자산의 규모나 그 이유는 아직까지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어느 정도나 걸릴 것 같은데?” -아무래도 장기적으로 파악해야할 것 같습니다. 마돈나가 파악하는 데 오래 걸린다고 말하는 건, 복잡하고 은닉된 게 어지간한 수준이 아니라는 뜻일 터. “급한 건 아니니까 천천히 파악해 봐.” -알겠습니다. 최은실…… 이 누나는 대체 무엇을 꾸미고 있는 걸까. 예전부터 권력에 욕심이 많은 건 알았지만, 얼마 전 청와대 관저에서 저녁 식사를 할 때도 그렇고, 최근 들어 더욱 얼굴에 욕심이 잔뜩 낀 게 티가 난다. 평범하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는 건 분명할 터. 다른 형제들과 달리, 최은실은 직접 움직이지 않는 만큼 변수가 많기에 더욱 주의해야 한다. “유심하게 지켜봐. 특이사항 있으면 바로바로 알려주고.” -예. 주기적으로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녀와 전화를 끊은 뒤, 곧바로 오성복 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당숙. 사람 없는 곳으로 자리 좀 옮겨 주실래요?” -사무실에 혼자 있어. 말해도 돼. “요즘 조사하고 있는 건 있나요?” -특별한 건 없어. 위에서 시키는 자질구레한 일들. 왜, 뭐 맡길 거 있어? “한중현 시장에 대해서 자료가 필요합니다. -한중현이라면…… 서울시장 말하는 거야? “맞습니다.” 現 서울시장 한중현. 대한당 소속으로 서울에서만 두 번의 시장을 역임한 거물. 서울시장이라는 자리가 대권으로 가는 마지막 문턱이라고는 하나, 아버지께서 권좌를 지키시고 있는 한, 그는 대통령 자리를 엄두도 내지 못할 테니까. 무엇보다 아버지와 친분이 꽤 두텁기도 하고. 허나, 그는 다음 지방 선거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아버지께서 첫째 형과 둘째 형에게 서울시장 선거에 나가라고 했으면, 다시 말해 그 자리엔 대한당에서 다른 이가 출마하지 않는다는 걸 뜻하니까. 한중현의 나이는 이제 겨우 57세. 정치인으로서는 젊은 나이다. 그렇기에 분명 은퇴를 할 생각은 아닐 터. 무엇보다 그는 야망이 있는 인물이었으니까. 다시 말해 이번 서울시장 임기가 끝나면, 그는 지금보다 더 높은 자리로 간다. 최소한 장관. 어느 부서로 갈지는 모르겠으나, 꽤나 파워가 있는 자리겠지. 그런 만큼, 한중현의 약점을 알고 있다면, 분명 내게 도움이 되는 순간이 올 터. -파 보긴 할 텐데, 나올지 모르겠네. 다만, 오성복 검사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풍겼다. 그의 말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갔다. 서울시장이라면, 지방 선거를 무려 2번이나 치러야 한다. 어지간한 비리라면 그동안, 선거 기간 내에 민국당에서 밝혀냈을 테니까. “급한 건 아닙니다. 천천히 한 번 알아봐 주십시오.” 다음 지방 선거가 끝나기 전에만 파악하면 된다. -인맥 동원해서라도 최대한 알아볼게. “부탁드립니다.” -그래. 아, 참. 그리고 조카. “예, 당숙.” -이건 내가 직접 만나서 말하려고 했는데, 통화하는 김에 말할게. 잘 전달받았어. 고맙게 잘 쓸게. 무슨 말을 하나 했더니, 마돈나를 통해 지급한 돈 이야기다. “편하게 쓰시고 모자라시면 더 말씀하십시오.” -내가 염치가 있지, 어떻게 말해. “그러면 제가 알아서 가끔씩 때 되면 챙겨 드리겠습니다.” -하하하. 사양은 않을게. 내가 상황보고 연락해 줄게. “알겠습니다. 들어가십시오.” -그래, 쉬어. 서울시장이 보통 사람이 아니기에 그의 말대로 쉽진 않겠지만, 그래도 높이 올라갈 사람이기에 무언가 작은 거라도 하나 잡혔으면 좋겠는데……. 나는 전화기를 안주머니에 넣은 뒤, 여민관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점심시간이 끝나지 않았기에 나는 휴게실로 향했다. “왔어?” 아니나 다를까, 두 명의 선배들이 먼저 도착해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TV를 보고 있었다. “식사는 잘하셨습니까?” “응. 네가 추천해 준 요 앞 김치찌개집 갔는데, 확실히 괜찮더라.” “다행이네요.” “거기 커피포트 물 방금 끓었으니까 바로 부어서 먹으면 돼.” “예.” 나는 믹스커피 한 잔을 들고 그들의 옆에 착석했다. TV에는 검찰총장 내정자에 대한 인사청문회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저분 대단하신 것 같아요.” “그러게 말이야.” 유주열 검찰총장 내정자. 야당에서 한창 물어뜯기 했는데, 워낙 청렴결백했던 사람이기에 건드려서 때가 하나 나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야당에서 공격을 해도, 치부가 아니라 청백리의 면모가 더 돋보여지기에 국민들의 신뢰가 올라가고 있는 인물. “저분은 어쩌다 검찰총장에 내정되신 겁니까? 제가 알기론 대한당과 연줄이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던데.” “아무래도 요즘 검경수사권 조정에 대한 이야기가 계속 마무리가 안 되고 있잖아. 경찰에서 세게 나오니, 검찰에서도 꽤 강직한 인물이 필요한데, 경찰에서 물어뜯을 수 없을 만한 인물로는 유주열이 최고거든.” 역시 아버지가 검찰 출신인 건 숨길 수 없다. 겉으로는 중립을 지키고 계시지만, 속으로는 검찰을 더 중요시하는 모양. “유주열 검사님은 정말 먼지가 없나요?” “우리가 알기론 없어.” 그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자식 둘을 키우는데, 30년 된 아파트에서 그것도 23평짜리에서 살고 있잖아. 그러면 뭐 말할 것도 없지.” 검은돈을 아예 받지 않았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저분이 곧 확정되시겠네요.” “아마 그럴 거야. 적어도 2년 임기 동안에는 경찰에서 찍소리도 못 할걸?” 판사를 맡고 있는 둘째는 검찰과 더 가깝고. 첫째는 법대 출신 아니기에 경찰과 더 가깝다. 아마 당분간 둘째 형, 최지원이 조금 더 득세하겠는데? * * * HIT Investment. 고태욱 비서실장이 추천해 준 투자 회사. 물론, 나는 투자가 목적은 아니지만, 고태욱이 보장했으니 충분히 믿을 순 있겠지. 그 회사로 가서 사무실에 올라가는 대신, 명함의 주인인 이문석을 조수석에 태웠다. “죄송합니다. 제가 좋은 곳에서 모셨어야 하는데.” “아닙니다. 신분이 신분이시니 이해할 수 있습니다.” “평소엔 이러지 않는데…….” 나는 슬쩍 룸미러를 만지며 말했다. “요즘은 조금 민감해서요.” 확실한 건 아니지만, 최근 들어 누군가의 시선이 따라다닌다는 게 느껴진다. 어렸을 때부터 청와대의 늦둥이로 관심을 받았던지라, 워낙 많은 시선을 받기도 했고.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유괴 사건도 한 번 겪었던지라, 그런 면에서는 꽤나 육감이 발달해 있다. “괜찮습니다. 저도 안전한 게 좋은 법이니까요.” 나는 곧장 차를 몰아 도심을 빠져나왔다. 자유로. 익숙한 도로에 접어들며 우리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태욱 실장님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돈관리가 조금 필요하시다고요.” “예. 불릴 생각은 없고, 언제든 필요할 때 빼서 쓸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해 주셨으면 하거든요.” “혹시 규모가 어느 정도나 될까요?” “100억 정도 맡길 생각입니다.” “100억이라…… 역시 적지 않네요.” 그는 천천히 턱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그러면 최대한 안전한 펀드로 분산해서 굴리도록 하겠습니다.” “가만히 들고만 있는 것보단 그게 나을까요?” “그렇죠. 큰돈을 굴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테니까요.” 이문석은 곰곰이 생각하며 돈의 투자 방향과 추가 세탁 과정에 대해 언급했다. 이미 한 번 세탁이 된 돈이기에 굳이 해외로 돌릴 필요가 없으며 여러 개의 차명 계좌를 사용하면 다음에 다시 수령할 때도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점.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자면, 최지훈 씨의 자산과 관련해서는 아무리 고태욱 실장님이라도 일말의 정보조차 누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100억. 적지 않은 돈이지만, 고태욱 비서실장의 소개였기에 믿고 맡길 수 있다. 물론, 국정원에서 받게 될 돈은 150억. 그리고 이미 태무그룹에서 받은 돈이 100억. 총 250억이긴 하나, 굳이 돈의 전부를 털어 넣을 생각은 없었다. 또한, 150억보다 더 많은 돈을 넣게 되면, 내가 태무그룹에서 돈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 수밖에 없을 터. 투자회사 특성상 보안이 생명인 만큼, 이문석이 고태욱 비서실장에게 말하진 않을 테지만, 굳이 위험 부담을 안을 필요는 없으니까. 150억은 충분히 내가 굴릴 수도 있고. “연락은 어떻게 드리면 될까요?” “제가 필요할 때 따로 연락을 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 * *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청와대에서 정무비서관으로 업무를 빠삭하게 익히고 내부 인사들과 친분을 쌓는 사이, 1년이 훌쩍 더 흘러 2022년이 다가왔다. 나는 한 살을 더 먹어 24살이 되었고. 국회의원 출마까지는 이제 겨우 2년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2월 1일. 설날임에도 집안은 썰렁했다. 가족들이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히려 있어서 더 분위기가 싸하다고 봐야지. 첫째 형과 둘째 형은 여전히 대한당에서 공천을 받기위해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으니까. “완전 살얼음판이다.” 넷째 형, 최지성은 무섭다는 듯 자신의 팔뚝을 슥슥 쓸며 내 방으로 들어왔다. “뭐 하고 있어?” “그냥 정리.” 그는 슬쩍 내 책상을 들여다보고는. “국회의원들 명단 아니야?” “맞아.” “이게 뭔데?” “형들이 포섭한 사람들 구분해 둔 거야.” 국회의원은 세 부류로 나눠 두었다. 첫째 형 최지만을 지지하는 62명. 둘째 형 최지원을 지지하는 88명. 그리고 나머지 중도세력 10명. “생각보다 첫째 형이 많이 선방했네?” “들어보니까 말을 좀 잘했더라고.” 첫째 최지만이 갖고 있는 건 말빨. 이미 둘째 최지원에게 판도가 기울어진 상황에서 그는 오직 ‘말빨’과 ‘장남’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만으로 62명의 국회의원을 포섭하는 데 성공했다. 논리는 간단했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서울시장 출마를 하라고 말했고, 최지원이 확정적이라면, 그럴 이유가 없다. 또한, 현재의 구도를 뒤집으라고 이런 판을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그의 이 논리는 ‘장남’이라는 유교사상에 찌든 정치인들에게 아주 효과적으로 먹혀들었다. 물론, 아직까지 최지원이 과반을 넘긴 했으나, 이 정도면 충분히 싸움을 해 볼 만한 상황이 된 것이지. 넷째 형은 흥미로운 듯 눈을 꿈뻑이며 물었다. “이렇게 되면 둘이 6월 지방 선거에 출마하는 거야?” “아니, 4월에 당내 경선이 있어.” 대한당의 공천 후보를 받을 한 명을 뽑는 것이다. 사실상 그게 결승이라고 봐도 무방하지. 2월에 예비 후보자로 등록을 하여 선거 기간 전부터 캠페인 활동을 벌일 수 있는 자격을 얻고. 4월에 당내 경선을 치러 대한당의 서울시장 후보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가 출마하여 6월 지방 선거에서 민국당 후보와 선거하여 겨루는 것이지. 그런데 서울시에서 대한당에 대한 지지율은 약 65%에서 70%를 오간다. 그러니 대한당 마크만 달면 어지간해서는 서울시장에 당선될 수 있다는 뜻이다. “어쩐지 둘이 한 마디도 안 하더라니.” “괜히 꼬리 잡히지 않으려고 하는 거지.” “그래서 누가 될 것 같은데?” “글쎄. 현재 구도로 보면 둘째 형이 유리하긴 한데, 당내 경선에서는 일반 시민들의 표가 들어가니까 변수는 있어. 특히 고령자분들은 장남을 더 선호하니까.” “음…….” 그는 천천히 주억거리더니 흥미로운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그러면 너는 누가 되길 원하는데?” “응?” “누가 당선되어야 너한테 더 좋은 건데?” “내 입장에서는…….”